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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84화 (884/1,108)

884화 우리는 모두 색깔이 다른 바다 (2)

작은 범 대인의 설명을 들은 경국 관리들은 모두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만약 동이성 예관이 밖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면 지붕이 떠내려가고 동이성의 푸른 하늘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환호성을 질렀을 거였다.

피와 불 속에서 탄생한 경국은 변방의 작은 소국에서 시작해 제일 강국으로 발전할 때까지 끊임없이 국경 지역을 정벌하고 전쟁을 치러야 했다. 더욱이 경국은 2, 30년 전에 황제 폐하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남쪽과 북쪽을 정벌한 끝에 비로소 오늘날과 같은 드넓은 영토와 강력한 세력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모든 경국인들의 핏속에는 국경 지역을 정복해 영토를 확장하고 싶다는 열렬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탐관오리이건 청렴한 관리이건, 행상이건 신분이 보잘것없는 졸개이건, 책만 파고드는 서생이건 경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경국이 천하를 통일하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다.

다만 20년 전에 천하는 세 나라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황이었기에 경국은 자신들의 열망을 오랜 시간 참아야 했다. 국경을 확장하고 세력을 키우고 싶다는 열망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억눌려 있었다. 그러던 중 대동산 사건을 계기로 적국을 지키던 대종사들이 더는 힘을 못 쓰게 되면서 걸림돌이 사라지자 오랜 시간 잠자고 있던 경국 사람들의 열망이 마침내 폭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동이성이 경국 영토 지도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이 일은 남조를 정복하거나 서쪽의 초원 오랑캐들을 물리치거나 북제와 자질구레한 싸움으로 영토를 조금 떼어 오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것은 명실상부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거대 세력을 정복한 것이었다.

과거 황제 폐하가 세 차례 북벌을 직접 진행해 대위를 산산이 분해해 경국에 길이 남을 공적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동이성을 정복한 일은 의심할 여지없이 경국의 영토 확장 역사에 길이 남을 한 획을 그은 일이었다.

모든 관리들이 신선을 보는 것처럼 범한을 우러러봤다. 그들의 눈빛이 불처럼 이글거렸다. 군대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협상만으로 경국이 이처럼 큰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관리들은 어떤 말로도 지금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심지어 이들은 속으로 2년 전에 황제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을 왕야로 봉하려고 했던 게 선견지명이 있는 주장이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지금 이들의 머릿속에는 작은 범 대인이 엄청난 공로를 세운 만큼 영토를 하사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 왕으로 봉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약간 연로한 예부 시랑은 경천동지할 만한 기쁜 소식을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듯 얼굴 전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목구멍이 가래에 막혀 ‘끅끅’하는 소리를 내던 그가 결국 범한 앞에서 쓰러져버렸다.

* * *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신단 관리들과는 달리 범한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검을 설득하고 북제 젊은 황제를 힘으로 굴복시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롭게 동이성을 경국 영토에 포함한 건 그의 평생에 가장 큰 공적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고검이 승낙한 배후에 어떤 위험에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한이 사신단 관리들에게 남은 일을 인계했다. 한편 동이성에서 세세한 협상을 책임진 사람은 검려 수석 제자인 운지란이었다. 운지란이 이번 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사고검이 그런 그에게 세부 협상을 맡겼다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동이성을 위해 최대한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강경한 태도로 협상에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런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동이성을 실제로 통치하게 될지 아니면 명목상의 귀순이 될지에 대해서 최소한 올해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사고검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동이성에는 반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테니 앞으로 상황이 50년 동안 변하지 않을지 아니면 5년 동안 변하지 않을지는 모두 황제 폐하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다.

이런 생각에 범한은 마음이 다시 우울해졌다. 진원에 비밀 보고는 이미 보내 두었고, 줄곧 자취를 감추고 있던 그림자는 그가 보낸 사람에 의해 강남 황실 금고에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 일을 조용해 해결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사신단이 머무는 별궁 대문을 나온 범한이 마차에 올랐다. 그가 아픈 머리를 창가에 기대고 동이성의 번화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이성의 이러한 번화한 모습은 양국의 사신단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꾸며낸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주부 관리들의 집단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동이성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익 앞에서는 과감해지는 상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거리낄 거 없이 자유로웠다.

검은색 마차가 긴 거리 끝에 이르자 세 갈래 길이 나왔다. 마차를 몰던 계년조 사람이 범한의 안색을 힐끔 살피며 물었다.

“제사 대인, 이제 어디로 갈까요?”

“바닷가로 가세.”

범한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후 한참 동안 달린 마차는 동이성 안을 관통해 항구 쪽으로 향했다. 이윽고 정신없이 얽히고설킨 운송 마차 대열 안으로 들어간 검은색 마차는 가장 시끌벅적한 항구 등지고 동이성 밖 조용한 은색 백사장에 도착했다.

마차를 몰던 관리가 폴짝 아래로 뛰어내리더니 말고삐를 쥐고 마차를 백사장 옆에 세웠다. 바로 그때 그의 눈에 백사장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주 예민한 관찰력을 지닌 계년조 관리가 단박에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제 사람들입니다.”

이미 마차에서 내린 범한이 잔뜩 긴장해 있는 계년조 관리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북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네.”

오늘 범한과 함께 온 계년조 관리는 바로 작년 가을에 범한이 청주성 안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었다. 범한은 자신의 심복인 그의 충성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왕계년과 등자월에게 두 차례 교육을 받은 그는 범한만을 생각하는 심복이 되어 심지어 황궁 깊숙한 곳에 있는 그 사람조차 마음에 두지 않았다.

오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범한은 감찰원 6처 검수 없이 심복 한 명만 데리고 왔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계년조 관리는 당황하면서도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마차를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구석으로 끌고 가더니 푸른 나무 아래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범한이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동해의 파도처럼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은색 모래사장에 짙고 옅은 물감으로 그려 넣은 것처럼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암초와 모래사장 위에 펼쳐진 푸른 나무들과 어울리면서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범한이 양손을 맞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랑도 대인을 뵙니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양손을 편하게 늘어뜨린 랑도가 범한을 바라봤다. 양옆에 곡도를 꽂아 넣은 칼집이 바닷바람에 가볍게 흔들거렸다. 자신의 앞에 선 청년을 바라보는 랑도는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했지만,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잠시 뒤 그가 해변 길을 열어주고는 자신은 반대쪽 백사장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범한이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의젓해 보이는 청년이 뒷짐을 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연황색 옷을 입은 사리리가 신선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청년은 바로 북제 젊은 황제였다. 동이성 일에서 북제가 전패를 한 상황에서 그는 상경 조정을 오래 떠나 있을 수도, 용상을 오래 비워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오늘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경국 사신단 관리들은 이겼다는 사실에 감격해하면서도 북제가 뒤에서 남몰래 훼방을 놓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범한은 북제 황제를 만나러 가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 관리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북제 젊은 황제의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은 꼿꼿했고, 맑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강인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러니 두루마기 아래 여자의 몸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범한이 왔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오른손가락으로 드넓은 바다를 가리키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짐이 남자였다면 분명 천하를 통일하고 저 바다를 정복했을 거야!”

이때 파도가 갑자기 크게 일면서 멀리 바다에 있는 암석을 덮쳤다. 천둥처럼 큰 파도 소리가 북제 젊은 황제의 자신감 충만하면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암석을 덮치며 천둥처럼 크게 울부짖던 파도가 눈과 같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는 점점 잦아들었다. 파도가 잦아들자 잔잔히 일렁이는 바다와 푸르른 하늘이 다시 드러났다.

북제 젊은 황제의 말에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만약 여자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즐겁게 살았을 겁니다.”

범한은 북제 젊은 황제가 그동안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해오면서 마음속에 엄청난 불만과 불평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범한은 경국 사람인 탓에 북제 젊은 황제에게 제왕의 심리나 권모술수를 알려줄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암암리에 교류해오면서 범한은 북제 젊은 황제가 자신보다 나이는 어린데도 굉장히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때로는 냉정하고 잔혹한 수단도 부릴 줄 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점을 보면 어쩌면 용상이라는 자리가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건지도 몰랐다.

옆에 서 있는 여황제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자로 자랐다. 그러니 그녀의 성장 과정은 상당히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그녀는 변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냉혹하면서 웅장한 포부를 품은 정해진 운명에 저항하는 황제로 자란 걸 보면 북제 황태후는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했다.

과거 북제 황제와 황태후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 범한은 이를 활용해 북제 조정에 침입하려 했다. 하지만 북제 황제와 황태후는 오히려 이를 이용해 심중을 제거하고 상삼호를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범한은 그때 일을 생각할 때면 저절로 북제 황제와 황태후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자였다면 더 즐거웠을 거라고?”

뒷짐을 진 채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는 북제 황제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걸렸다.

“이 세상에서 여자는 남자의 부속품일 뿐이네. 영원히 피지배자의 처지에 있어야 하지. 그러니 자네가 정말 여자였다면 즐거운 삶을 살기는커녕 매일 밤 이불 속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을 거야.”

범한이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자신이 여자인 게 원망스러우신 겁니까?”

“그렇다네.”

북제 황제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짐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자네에게 협박을 받지도 않았을 게 아닌가.”

아무 말 없이 웃는 범한이 속으로 여황제가 확실히 무정한 면에서는 남자와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다. 권위와 나라에 관한 생각으로만 머릿속에 가득한 여황제는 기존의 부드럽고 아름답던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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