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2화 중독 (3)
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눈으로 차가운 눈빛을 쏘며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고하 국사의 유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설사 제 누이가 훗날 해당타타를 이어 받아 천일도를 맡게 된다 해도, 천일도가 또 감히 우리 경국에게 이러쿵저러쿵 하면, 저는······ 계속 죽일 생각입니다.”
범한의 말에 나무 아래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랑도는 이런 긴급 상황에서 범한이 왜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건지 이해가 안 되어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검려 제자들은 떠났다지만, 그래도 북제 고수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사고검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범한과 저 검은색 옷을 입은 고수를 죽이지 않았지만, 북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천일도 수제자가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오늘 범한이 북제 고수들을 무슨 자기 부하들 보듯 보고 있다는 걸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범한은 ‘당신네들 황제 폐하는 이미 내 사람일세! 그러니 그대들이 내 사람이 될 때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생각했다.
나무 그늘에 있는 젊은 황제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 북제는 시서(詩書)의 종주국이니, 당연히 머릿수가 많다고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됩니다. 하여 랑도 대인, 우리는 이만 가볼까요!”
황제의 말에 이번에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황제를 바라보며 갑자기 말을 건넸다.
“이리 좀 와주시겠습니까?”
황제 폐하께 이런 불경한 말을 하다니.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북제 사람들의 눈과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든 건 황제 폐하께서 화는 고사하고 미소로 화답을 했다는 거였다.
“범 경, 집에 무슨 일이 있는가? 일단 좀 쉬고 다시 이야기 나누세!”
북제 젊은 황제의 미간에 냉담함과 노기가 옅게 어린 게 범한의 눈에 들어왔다. 상대방은 분명 황제 폐하의 신분이었으니 신하들 앞에서 무슨 실수라도 할까 우려하고 있는 거였다. 이에 조금 전 자신의 말이 확실히 좀 과했다는 걸 알아차린 범한이 저도 모르게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외국 사신인 제가 보고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젊은 황제가 속으로 어떤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그녀는 권력과 무관한 현묘한 일을 너무 많이 봐서 마음이 크게 요동쳤었다. 그런데 지금은 범한의 표정 때문에 어젯밤에 겪은 마음의 동요를 떠올리고 있었다.
한참 후 젊은 황제가 냉담하게 입을 뗐다.
“모두 물러나거라. 짐은 범 경과 할 얘기가 있구나.”
황제의 말에 현장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특히 랑도는 경악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황제 폐하는 요 며칠 전에야 검려 운지란파와 연계해 동이성에서 범한을 죽일 결정을 내린 터였다.
그리고 어제 범한이 황제 폐하를 납치해 검려로 들어가는 건 모두가 본 상태였다. 이렇듯 양측은 서로에게 맺힌 원한 때문에 한 하늘을 이고 있기 힘들 지경인데, 지금 두 사람이 말을 나누는 표정을 보니 모두가 상상하는 그런 일은 아닌 것만 같았다.
줄곧 황제 곁에 서 있던 하도인은 깜짝 놀라 의심의 눈초리로 랑도를 쓱 바라보고는 그가 무슨 말을 해주기만을 기다렸다.
랑도가 심호흡을 두 번 하고 손을 휘 내젓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성주부에서 물러났다. 랑도 입장에서는 범한이 황제 폐하께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황제 폐하께서 내리신 황명이니 신하된 도리로 그것을 따라야만 했다.
성주부에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마지막에 들은 건 말하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불어버릴 것입니다.”
젊은 황제의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눈동자에서 싸늘한 기색이 잠시 스쳤다. 생각지도 못하게 범한이 자신의 생각을 빨리 알아차린 것도 모자라 자신의 비밀을 가지고 협박해서였다.
감찰원 6처 수뇌는 사고검의 아우였다. 이 정보는 정말 쓸모가 많은 거였다. 심지어는 경국 조정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거였고, 경국 황제와 감찰원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북제 금의위는 무위도식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에 아주 오래 전에 북제 젊은 황제는 위화로부터 현공 사당의 자객 습격 사건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경국 황제가 사건의 범인을 사고검의 알려지지 않은 아우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젊은 황제가 심호흡 했다. 이 비밀은 경국에 내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사항이었으니, 분명 북제에게는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중요 정보였다. 다만······ 범한이 온 북제를 뒤집어 놓을만한 비밀을 쥐고 있는 게 문제였다.
한동안 낯빛이 이리저리 변하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부드럽게 대답했다.
“알았느니라.”
* * *
성주부 밖에 있는 랑도와 다른 사람들은 낯빛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서였다. 자신들은 검려 밖에서 황제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밤새 애를 태웠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 폐하께서는 범한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는 느낌을 풍기시다니.
랑도의 눈동자가 갑자기 수축되었다.
“경국으로 돌아가 목봉에게 서둘러 돌아오라는 명을 전하게.”
옆에 있던 하도인의 낯빛이 살짝 변하더니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대인, 범한이 황제 폐하께 독을 썼다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작금의 범한은 독을 잘 쓰는 대가네. 만약 독에 중독되신 게 아니라면, 그가 어찌 황제 폐하를 이리도 쉬이 놓아드렸겠는가.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왜 방금 전 범한과 밀담을 나누기 위해 남겠다고 하셨겠는가?”
랑도의 눈동자에 분노가 가득 들어차더니 매 글자에 힘을 주어 찬바람이 쌩쌩 돌게 말했다.
“범한이란 자는 독하기가 뱀과 전갈 같으니, 절대 얕봐서는 안 되네.”
랑도는 지략을 내놓고 대응책을 세우는 데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일찌감치 목봉을 감찰원 7처에 가둬두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이 정말로 자신들의 황제에게 독을 썼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류가 아닌 한 번 맛보면 절대 해독약이 없는 그런 독 말이다.
* * *
사고검은 검려 제자들에게 범한을 죽이라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심지어 겁 없이 날뛰며 자신을 죽이려 한 감찰원 자객 우두머리까지 놓아주었다. 사고검의 예상치 못한 의외의 결정에 검려 안에 있는 제자들은 몹시도 놀랐다. 특히 아무 말 없이 검려 밖으로 걸어 나온 운지란의 마음은 더 없이 무거웠다.
운지란이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스승인 사고검이 셋째 사형과 넷째 사형을 검려 안에 남게 한 게 아무래도 물어볼 말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자 운지란이 참지 못하고 서쪽에 저무는 석양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두 사형은 자신을 가장 공경했기에 왕 13랑을 가두고 범한을 매복해 공격한 일에 참여한 거였다. 스승이 그런 두 사형을 남게 한 건 이번 일에 관해 물어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운지란은 스승인 사고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사고검이 정말 수석 제자인 운지란이 한 짓에 대해 처벌하고 싶었다면 조사하거나 물어볼 필요 없이 직접 운지란에게 자살을 하라고 요구할 거였다. 그렇다면 아마 그 역시 반항할 용기를 내기 힘들 거였다.
옅은 석양 아래 서 있는 검려 수석 제자의 얼굴에는 우울함과 난처함이 가득했다. 피비린내와 죽음의 냄새만 가득한 성주부는 온통 초상 분위기였다. 사고검은 성주부 사람들을 모두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그러니 이제 곧 있으면 동이성 성벽 위에서 휘날리는 깃발은 경국 이씨 왕조의 깃발로 교체될 거였다.
그는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스승이 범한과 협상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경국 이씨 황제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그는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우울해졌다.
이미 어떤 방법으로도 진행되는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막을 힘을 가지고 있던 성주부는 이제 피 웅덩이와 시체만 남아 있었다. 사고검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잔인한 방법을 사용해서 동이성 상류층의 의견을 하나로 규합시켰고, 이 모습을 본 검려의 제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게다가 성안에 있는 상인을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동이성이 범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상인들 중에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운지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위쪽 산속 거처를 바라보았다. 북제 황제 폐하는 지금 랑도와 하도인의 보호를 받으며 조용히 산속 거처로 돌아가 있었다. 운지란은 북제 사람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암암리에 그들과 이루려 했던 협의를 이대로 중단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계속 진행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산속 거처의 문을 굳게 닫고 손님을 받으려 하지 않는 모습에 운지란의 가뜩이나 복잡한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북제 황제 폐하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먼 길을 온 이유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단번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북제 황제 폐하는 범한이 잡혀서 검려에 들어오자 마치 졌다는 걸 인정한 듯 동이성과 경국 사이를 벌어지게 할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산속 거처 밖에서 작은 목소리로 랑도와 몇 마디 말을 나눈 운지란이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산에서 내려왔다.
‘범한이 도대체 어떤 신묘한 능력을 부렸기에 북제가 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거지?’
시종일관 범한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운지란이 속으로 스승이 북제 황제에게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 북제 사람들이 낙담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진중한 얼굴로 석양이 비추는 검려를 바라보더니 잠시 뒤 동이성 안으로 걸어갔다. 그는 영원히 검려의 의견과 동이성의 이익을 배반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 밤 동이성 사람들의 민심이 흉흉한데 관리할 성주부 관리들이 없으니 검려 수석 제자인 그가 어쩔 수 없이 정무를 처리해야 했다.
* * *
운지란의 생각과 달리 북제인들은 낙담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북제의 전씨 성을 가진 황제 폐하는 낙담하지 않았다. 가만히 창가에 앉아서 꽃을 바라보는 그녀는 최근 이틀 동안 만남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황태후의 품에 안겨 용상에 앉은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두려움이 무엇이고 낙담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판단력을 가지게 되는 법이었다. 젊은 황제는 동이성을 차지하려는 일에서 자신이 이미 범한에게 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승패가 너무나도 확실해서 상황을 바꿀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북제 젊은 황제는 사고검이 경국을 선택한 이유가 경국에 호감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라 범한이라는 존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고검은 동이성이 계속 존속하는 일에 더 많은 보장을 할 수 있는 쪽은 선택한 거였다.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사고검이 드러내지 않은 생각이었다. 총명한 북제 젊은 황제는 오랜 시간 생각한 끝에 어렴풋하게나마 사고검의 숨겨진 의도를 포착해 낼 수 있었다. 비록 그녀도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사고검이 향후 범한에게 엄청난 골칫거리를 안겨 주리라는 건 확실했다.
범한의 골칫거리는 곧 경제의 골칫거리였으니 북제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물론 그녀도 만약 범한이 냉혹하게 행동한다면 자신은 상대방의 손 위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밖에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범한이 그 정도로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자신의 여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날 밤의 일은 북제 황제에게는 약간 치욕적이면서 자극적이고 흥분되고 신기한 일이었다. 더구나 앞으로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줄 것 같았다.
범한이 젊은 황제를 통제하려 한다면 젊은 황제는 두 사람의 관계로 범한을 아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젊은 황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사리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의 머리를 빗겨주어라.”
게다가 북제에는 범약약까지 포함해서 범한의 여자가 세 명이나 있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사리리가 옥처럼 고운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빗겨주는 손길을 느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세 여자로 인해서 아버지와 갈등이 생긴다면 범한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