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1화 중독 (2)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원 안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오늘 범한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나선 적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소모한 게 있다면 바로 정신력뿐이었다. 사고검의 강력한 의지에 무수히 많은 양의 정신력이 갈려나갔다. 하지만 그림자 앞에 서는 순간 범한의 정신력은 순식간에 체내로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냉담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어서 유난히 강력했다.
과거 연소을을 대할 때처럼 말이다.
모두들 범한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현재 경국의 권신은 과거 북제 사절단 시절 막 9등급에 들어섰던 풋풋한 사람이 아닌 어엿한 9등급 상의 강자였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연소을을 해치운 후 경도로 들어와 진씨 영감님도 제거했다. 초원에서 해당타타를 물리쳤음은 물론 어제 정말 기묘하게 벌어진 9등급 고수들의 두 차례 포위 공격에서도 빠져나갔었다. 즉 과거 9등급 강자들과의 교전에서 범한은 예외 없이 전승을 거둔 것이었다.
그건 사람의 이름도, 나무의 그림자도 아닌 제대로 된 믿음이 쌓여 생긴 거였다. 그래서 지금 검려의 첫 번째 제자인 운지란과 마주하고 있는데도 범한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냉랭하게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드러낸 거였다. 내 부하를 죽이려거든 먼저 나부터 죽여야 할 거라고 말이다.
범한과 운지란 서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운지란 뒤에서 더 많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검려에는 모두 13명의 제자가 있는데 오늘 그들은 모두 이 자리에 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건 불과 6명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살벌한 공격 의지인 검의를 뿜어내며 검의 선봉장인 운지란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불쑥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범한은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려버렸다.
나머지 검려 제자들은 사고검 옆에 무릎을 꿇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가슴을 졸이며 사고검의 시중을 들고 있는 거였다. 그중에는 매포 별원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범한을 공격한 검려 세 번째 제자와 네 번째 제자도 있었다. 이들 검려 고수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건 복잡한 이유 때문이었다. 범한과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이······ 모두 사고검 검법을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들은 이 사실을 운지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너무 중요한 일이라 스승 대인께만 몰래 보고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요 이틀 너무 많은 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그들은 보고할 때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은 너무 놀라 있었고, 속으로는 저쪽 돌계단 아래에 있는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에 대해 계속 추리를 하고 있었다. 스승 대인과 대체 어떤 관계인 건지, 왜 상대방이 스승 대인을 다치게 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왕 십삼랑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범한을 보러 가지도 않았다. 마음이 좀 복잡해서였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 은밀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 같아 오히려 입을 다물어 버렸다.
* * *
한편 운지란은 그런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과거 강님에서 그림자와 냉혈한 암살전을 벌인 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림자는 자신의 비장의 기술은 꽁꽁 숨겨둔 채 제대로 실력 발휘를 다 하지 않았었다.
운지란이 범한만 바라보며 들고 있던 검을 꽉 움켜쥐었다.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랑도 대인이 갑자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긴장시켰다. 그러자 팔에 달려 있던 쇠사슬이 순간 팽팽해졌다.
그런데 바로 이때, 랑도의 팔 위에 살짝 차가운 손 하나가 올라오더니 그의 공격을 저지했다.
랑도가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행동을 막을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이 우리 위대한 북제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본래 경국과 사고검은 협의를 하려 했지요. 하나 경국 쪽에서 사고검을 다치게 했으니, 지금 운지란을 도와 범한을 끌어내리거나 죽이고, 이어 사고검을 다치게 한 저 검은색 옷을 입은 자를 죽인다면, 동이성과 경국의 협의는 완전히 깨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무공 고수인 랑도는 저 검은색 옷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 그래서 저 자가 설마 정말로 소문으로만 듣던 천하제일 자객인 감찰원 그림자인지, 그리고 설마 저 자객이 사고검을 다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건지라는 생각을 하며 궁금해 했다.
젊은 황제는 살며시 웃고 있었다. 그리고 돌계단 옆에서 벌어진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짐을 믿어 봐요. 저들은 싸우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굳이 악인이 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 * *
현장 분위기 때문에 정작 당사자는 젊은 황제의 판단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검을 든 9등급 고수 일곱 명의 공격과 맞서게 되자 범한은 호흡 곤란이 왔다. 그래서 조금 전 말라붙었던 식은땀이 다시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 범한은 절로 엄숙해졌다. 검려란 곳은 확실히 너무 이상한데다가 9등급 고수도 꽤나 많았다. 그러니 만약 경국이 동이성과 협의를 맺지 못하고 정말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온다면, 군을 이끌고 온 장수들은 영원히 어둠속에서 습격을 받게 될 것이었다.
살벌한 기운이 잠깐 사이 주변으로 확 퍼져나갔다. 범한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정말로 공격이 시작되면 자신은 더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입꼬리를 느닷없이 씩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젖혀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빛으로는 강철처럼 단단한 운지란의 양 어깨를 쓱 훑어보았다. 그런 후 범한이 다시 돌계단 아래에 있는 사고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집안일인데 굳이 외부인이 끼어들어야 할까요?”
범한의 말은 각기 다른 사람들의 귓속으로 들어가 각기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운지란은 범한이 북제 사람을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해 냉랭하게 받아쳤다.
“검려 제자는 충분하오. 그러니 북쪽 친구의 도움은 필요 없소.”
그러자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 있던 랑도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작은 범 대인, 만약 살아난다면 내 직접 대인에게 도전하겠소.”
하지만 범한은 두 고수의 대답은 모두 무시하고 돌계단 아래에 있는 사고검만 빤히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사고검만 자신이 한 말의 진짜 뜻을 알고 있어서였다. 이는 형제간의 전쟁이었다. 그러니 설마 외부인이 끼어들어도 되느냐고 물은 거였다. 앞서 그림자가 광풍과 번개 같은 검 공격을 시작하자 바퀴 달린 의자 뒤에 서 있던 범한은 젊은 황제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기만 할뿐, 그림자의 공격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범한도 끼어들지 않았는데, 설마 당신네 검려 제자들이 형제간의 은원을 둘러싼 싸움에 끼어들어도 되겠느냐고 물은 거였다. 범한은 사고검의 오만함과 야성(野性)에 도박을 건 거였다. 그리고 아까 사고검이 그림자의 생명을 살려주었으므로 분명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사고검이 어찌 자신의 제자들이 복수를 위해 대의를 그르치는 걸 멀뚱멀뚱 보고만 있겠는가?
* * *
사고검이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씩 웃고는 조금 유감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범한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다는 생각에 범한의 진짜 수준을 볼 수 없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대종사가 자기 옆에 꿇어 앉아 있는 제자들을 꼴 보기 싫다는 듯 쓱 바라보고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몸께서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곡소리를 내는 게냐!?”
이상한 말이지만, 사고검은 싫은 소리를 한 건데 옆에 있는 제자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사고검이 왼팔과 왼손을 들고 왕 십삼랑을 잠시 바라보았다. 왕 십삼랑에게는 익숙한 동작이었다. 대동산을 내려올 때 스승님이 자신에게 업힐 때 한 동작이었다. 동이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스승님은 왕 십삼랑 등에 업힐 때면 이 동작을 했다. 그래서 왕 십삼랑이 아주 자연스럽게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사고검이 나이 어린 제자의 넓고 튼실한 등에 기댔다. 그리고 편안하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검려로 돌아가자꾸나.”
왕 십삼랑이 끄응 소리와 함께 마르고 작은 스승님을 등에 업고 자리에서 일어나 검려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이미 충분히 엉망이어서 옆에 있던 몇몇 사형들이 서둘러 그를 부축해 함께 자리를 떠났다.
사고검은 그냥 이렇게 떠나버렸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오로지 경악한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범한이 가까이 있는 운지란을 향해 말했다.
“운 대인, 검성 대인의 뜻을 이미 여러 차례 거역하셨군요. 설마 한 번 더 거역할 생각이십니까?”
운지란이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돌계단 아래에 있는 그림자를 쓱 바라보았다.
“사실은 나도 스승님을 업어드리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습니다. 다만 내가 업어야 있는 것들이 좀 너무 많아서요.”
“어떤 일들은 굳이 대인이 업을 필요가 없습니다.”
범한이 입으로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왜냐하면 대인은 업으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업고 일어나는 순간 무게 때문에 무너지는 것은 물론이고, 원래 업으려고 했던 것까지 떨어뜨려서 산산조각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면 비통한 일 아니겠습니까!?”
운지란이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후 다시 성주부 안의 핏자국과 시체들을, 특히 돌계단 옆에 있는 성주 대인의 시체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한참 후 차분해진 낯빛의 그는 자신의 생각이 모두 허사가 되었음을 인지했다. 그리고 경국의 작은 범 대인이 대체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스승님께서 성주부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리고 심지어는 다치신 후에도 경국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안 하시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건 검려의 수제자가 사고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 세상에서 사고검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권유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대종사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은 그의 생각이었던 거다.
* * *
검려 문하생들이 모두 성주부에서 철수했다. 이에 현장에는 북제 사람들, 범한과 그림자만 남았다. 랑도가 뒷짐을 지고 푸른 나무 아래에서 걸어 나와 범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작은 범 대인 과연 수단이 좋군요. 짧게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검려에서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압박하다니요. 하나 나는 동이성 사람이 아니고, 오늘 같은 기휘는 쉬이 오는 게 아니니, 서로 무공 연구나 해볼까요?”
“사람은 그 정도로 후안무치하면 안 되는 겁니다.”
범한은 이제 막 검으로 공격당할 뻔한 위험에서 벗어난 거여서 몸에 힘이 빠져 피로가 밀려왔다. 이에 범한이 그림자 옆으로 있는 돌계단에 앉아 고개도 들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이 말은 댁의 황제 폐하께서 오늘 제게 해주신 말인데, 대인에게 돌려드리지요.”
“작은 범 대인, 이 세상에서 누가 더 후안무치한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랑도가 뒤쪽으로 차고 있던 곡도 사슬이 바람에 흔들리며 작게 찰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는 랑도의 차분한 음성과 어우러져 미묘한 느낌을 냈다.
“대인의 누이는 우리 천일도의 제자입니다. 더욱이 돌아가신 스승님의 유지를 받아 청산에서 일하고 있지요. 범 사매는 비록 경국 사람이기는 하나 필경 본 사문의 전통을 이어 받은 사람입니다. 하여 대인은 옛정은 그렇다 쳐도, 사문에 대한 의리는 생각해줬어야 하지요. 한데 작년 가을, 우리 청산 제자가 서량로에서 처참하게 죽었으니, 설마 우리가 그냥 넘어갈 것 같습니까?”
“대인께서도 서량로에서의 죽음을 알고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