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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79화 (879/1,108)

879화 성인(聖人)이 아닌 자가 휘둘러서는 안 되는 것 (2)

사고검의 얼굴이 갈수록 더 창백해지고 눈도 갈수록 빛났다. 그림자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계속 창백해졌고, 입술 사이로 피를 쏟아내는 간격도 갈수록 짧아져 결국에는 피가 길을 이루는 지경이 되었다.

범한이 본 건 바로 이 장면이었다. 창백한 사람 둘이 하나는 피를 토하고, 하나는 침묵을 유지한 채 가장 광분한, 그리고 가장 냉정한 싸움을 벌이는 광경이었다. 범한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고검이 싫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림자를 도와야 했다. 만약 범한이 공격에 가담한다면, 아까 자신이 뒤에서 사고검에게 공격을 해 놓은 것도 있고 또 그가 몸이 불구인 것도 있으니, 자신과 그림자라는 두 강자가 동시에 폭발적인 공격을 펼치면 몇 할의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면 그림자도 지금처럼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선뜻 공격에 나서지 못한 채 손만 덜덜 떨며 이 광경을 냉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는 경국과 동이성 간의 협의와는 무관했으며, 사고검과 어머니, 오죽 아저씨, 비개 스승님 사이에 있던 과거 정과 의리와도 무관했다.

범한은 그림자에게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 주겠노라 약속은 했지만, 그가 직접 그림자의 복수 과정에 참여할 리는 없었다. 비록 여러 해 전에 동이성 성주부에서 발생한 처참한 멸문 사건에 대체 어떤 이야기와 비밀이 숨어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범한은 그림자의 뜻을 존중했다.

그림자는 오만한 검객이다. 그래서 적어도 오늘 만큼은 자객이 아닌 신분으로 자신의 형, 동이성의 오만함, 그림자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 잡고 있던 공포와 아픔과 마주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범한이 나서려 해도 그림자가 반대할 것이었다. 범한은 이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에 옆으로 빠져 있었고, 부들부들 떨며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 * *

덜커덩 소리가 났다. 바퀴 달린 의자가 드디어 정원 뒤쪽에 있는 다른 돌계단 아래까지 와 더는 물러날 공간이 없는 지경이 된 거였다. 그리고 고속으로 충돌한 탓에 바퀴 달린 의자는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나무 파편이 되어 버렸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는 그림자의 눈에서 광기가 크게 번뜩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드디어 앞으로 1치 더 들어간 거였다.

이 1치를 위해 그림자는 엄청난 대가를 치른 거였다.

사고검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갈라진 소리로 괴이하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돌계단 아래에 털썩 주저앉은 사고검이 손가락 두 개로 가슴에 꽂혀 있는 검을 ‘팍!’ 소리와 함께 분질러 버렸다.

그림자는 웃지 않았다. 검 끝은 사고검의 가슴에 있었고 나머지 반쪽 검은 그림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사고검의 방어는 그림자의 공격을 잠깐도 멈추지 못하게 한 것만 같았다. 반 토막 남은 검이 사고검 가슴에서 떨리고 있는 검 끝 쪽 토막을 따라 자연스럽게 안으로 파고들더니, 사고검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성주 시신 뒤에서 나타나 돌계단을 밟고 내려오고, 사고검의 가슴을 검으로 찔러 바퀴 달린 의자가 뒤로 10자 밀리고, 그런 후 잘린 검으로 마지막 공격을 하기까지, 그림자의 광풍과 번개 같은 멋진 검 공격은 실은 단 한 번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절대 중간에 끈긴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이어진 검의와 검 공격은 딱 한 번만 펼쳐진 거였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인생에서 검으로 이러한 일격을 펼칠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번뿐이기 때문이었다.

토막 난 검은 전혀 날카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절단면은 사고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뻑뻑하고 거칠게 들어가는 느낌을 주었으며, 이에 살점이 찢기고 있는 사고검은 고통이 말도 못하게 심할 것만 같았다.

그림자는 상대방의 고통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몸이 아팠고, 그로 인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림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소리 않고 찌르고 가르기나 했다.

그가 잘라내고 있는 건 20년 전의 과거였다. 그 순간 그림자는 수많은 걸 본 것만 같았다. 일단 여러 해 전에 백치 형이 성 외곽 황무지에 몰래 오두막을 지은 후 “여기는 나중에 천하 무도의 성지가 될 거야!”라고 득의양양하게 말하는 장면을 본 것만 같았다.

그때 아직 아이였던 자신은 옆에서 그 허름한 오두막을 무시하는 투로 보고 있었다. 맹인과 여자가 가끔 오두막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린 아이가 검에 흥미를 보이자 백치 큰형이 진지하게 말했다.

“배우고 싶니? 배우고 싶은 거면, 내가 가르쳐 줄게!”

검 쓰는 법을 배우는 건 힘들고 무미건조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두막을 드나드는 그들은 어느새 사람들에게 바보 형제가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성주부께서 백치 자식을 둘이나 둔 걸 보면 신묘에 죄를 지었기 때문일 거라며 수근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주부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이 두 백치를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그때 무서운 일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때는 고작 어린 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 그날 밤, 모두가 죽게 되었다. 어린 아이는 사람들이 죽은 게 싫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고, 키우던 고양이와 개도 죽었고. 형제자매, 숙부님, 백부님도 죽었고······ 자신을 사랑해주던 부모님마저 죽어버렸다!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성주부 장막 뒤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만 빼고 말이다. 그는 눈동자에 아무런 표정도 없는 백치 큰형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있는 걸 보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백치 큰형은 분명 자신을 죽일 거라 확신했다.

그때는 어쩌면 사고검 입장에서는 진정한 대종사로 거듭나는 밤이었다. 그리고 성주부에 있던 막내아우가 도망친 밤이기도 했다. 그날 밤 이후, 도망친 아우는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영원히 어둠 속에서만 생활하며 햇빛을 보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분노와 원망 어린 독기, 그리고 두려움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밤만 되면 잠에 들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 표정 없는 눈동자가 보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 그림자는 갈수록 창백하게 변해간 거였다. 그림자는 그 자를 죽이지 못한다면, 한평생을 어둠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가 검성이 되고, 동이성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림자는 자신이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바들바들 떨며 입도 뻥끗 못 하는 아이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20년의 원망과 독기 어린 복수심, 공포감으로 점철된 검이 드디어 그 사람의 몸을 찔러버렸다. 이에 검은 20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무엇보다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드디어 그 사람으로부터 피의 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림자는 완전히 해탈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의 몸에도 피가 많이 묻어 있어서였다.

그리고 사고검이 아직 죽지 않아서였다.

* * *

사고검 몸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다만 어디에 묻은 피가 자신의 피 인지, 아우의 피 인지 알지는 못했다. 형제간에는 서로 피를 교환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그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방식의 교환은 아닐 것이다.

이 시각 성주부에는 검의 기운이 사방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검의 기운 때문에 무수한 조각으로 찢어져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을 정도로 몸에 붙어만 있는 지경이었다. 사고검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처럼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의 작고 마른 몸이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어 사고검의 두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토막 난 칼끝이 전광석화처럼 뽑혀 나와 그림자의 목을 그어 버렸다.

그림자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끝이 박혀 구멍이 난 자리에 왼손 손가락을 검처럼 찔러 넣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대응해야 하고, 죽지 않으면 쉴 수도 없는 거였다.

낮게 퍽, 하는 소리가 울리면서 두 사람이 갑자기 떨어졌다. 충격을 받아 뒤로 밀린 그림자는 먼지를 일으키며 아까 자신의 피가 만든 길을 빠르게 쓸며 되짚어갔다. 그리고 돌계단에 무겁게 부딪힌 후 계속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였다.

사고검은 반대편 돌계단 아래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가슴에는 토막 난 검이 꽂혀 있었고, 토막 난 검 끝은 여전히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사고검은 반대편 계단에 있는 그림자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의 입가에서는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주부 정원이 공포와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범한과 젊은 황제는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아래에서 형제상잔의 광경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보고 있었다. 황제는 검은색 옷을 입은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상대방이 극한의 실력을 지닌 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고검과 이리 오랫동안 맞붙을 수 없어서였다.

범한은 알 수 있었다. 결국에는 그림자가 진 거였다. 사고검이 이미 기름이 다 떨어진 등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종사는 역시 대종사였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무공의 최고봉(最高峰)에서 오만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였다. 비록 그 봉우리에서는 산바람이 거세기 불어 언제든 세속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기는 해도 결국에는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거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림자는 자랑스러워해야 했다. 그래서 범한의 두 눈은 살짝 젖어 있었고, 그런 그림자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9등급 상의 강자여서 강력한 건 있었지만, 그래도 일대일 정면 대결에서 대종사를 이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건 분명 수준 이상의 실력을 발휘한 거였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사고검은 대종사의 경지와 강력한 의자를 이용해 국면을 통제해 버렸다. 그렇다면 분명 그림자를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왜 살려둔 거지? 형제라 봐준 거였나? 범한은 피를 갈구하고 살인을 좋아하는 대종사가 그런 따뜻한 감정을 지니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조용했던 성주부 정원 안에서 사고검이 갈라진 목소리로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진지하게 따져본다면, 네가 검려의 첫 번째 제자일걸?”

피가 흥건한 바닥에 누워 있는 그림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사고검을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러자 사고검이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다시 말을 건넸다.

“오늘 검으로 이정도의 공격을 펼쳤으니, 충분히 자랑스럽겠구나.”

한참 후 그림자가 느닷없이 입을 뗐다.

“왜······ 지?”

왜 그때 사고검이 갑자기 발광해 여기저기에서 살인을 하고, 친족을 도륙하고, 심지어 자신의 친부모까지 죽이고, 자신의 어린 동생까지 살려두지 않으려 했는지 물은 거였다. 그림자는 그동안 마음속에서 맴돌던 궁금증을 이제야 물은 거였다.

사고검은 그림자가 무엇에 대해 물은 건지 알고 있었고, 범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고검은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생각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싸늘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내 앞을 막는 사람은 모두 죽어야 한다······. 너는 우리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모든 걸 봤지. 그리고 검으로 그 정도의 공격을 펼쳤으니, 뭔가 이해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유치한 질문이나 던지다니······.”

“아우야, 너에게 정말로 실망했구나.”

사고검의 대답에 범한은 속으로 대경실색했다. 이제 보니, 사고검은 그림자가 따라붙은 걸 진즉에 알고 있었다. 사고검은 하루 종일 범한을 교육했다. 그런데 그게 범한뿐만 아니라 몰래 지켜보고 있는 그림자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주려고 한 행동이었던 거였다.

그림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평범했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돌계단 아래에 있는 사고검을 야수처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과거의 참극과 오늘 들은 말을 두고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판별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자신이 무엇을 믿는가만 확인하면 되는 거였다.

범한은 그림자의 눈빛을 따라가 보았다. 그곳에는 사고검 가슴팍에 난 무시무시한 상처가 있었다. 피가 뒤섞인 살점 위로 푸른색 빛이 은은히 반짝이고 있었다. 독소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기묘하게도 원래 썩고 문드러져야 하는 장기를 마지막까지 살아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건 대동산에서 경국 황제가 사고검에게 날린 공격 자국이었다. 사고검은 분명 오래 전에 죽어야 했지만, 그런데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데에는 분명 숨은 사정이 있는 거였다. 특히 가슴에 있는 무시무시한 상처는 더더욱 그랬다.

사고검이 남은 옷으로 가슴팍의 상처를 냉랭하게 가리며 그림자와 범한을 번갈아 보고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검은 흉기다. 그러니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휘둘러서는 안 된다.”

범한은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내 안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검은 흉기다. 그러니 성인이 아닌 자는 휘둘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인은······ 원래 무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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