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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76화 (876/1,108)

876화 검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마음만 아득하여라 (1)

바퀴 달린 의자가 성주부로 들어갔는데도 바깥쪽 대로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히 있었다. 동이성 백성들은 일어서서 자리를 떠나지도,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대신 두렵고 불안에 휩싸인 눈빛과 불안한 기색으로 성주부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검성 대인이 왜 또 검을 가지고 성주부로 들어갔는지는 궁금해 했다.

그런데 그건 살인 때문이었다.

대종사 사고검의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마당에 동이성을 누구네 집 마차에 묶을지, 그런 후 어느 나라에서 깐 길을 밟을지, 그게 남인지, 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모두 사고검이 결정에 달려 있어서였다. 그러므로 온 동이성은, 심지어는 주변 작은 제후국도 모두 사고검의 뜻에 따라야 했다.

이 대종사는 곧 죽을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의 영역 안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다른 마음을 품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히 검려 제자와 결탁해 자기 대신 동이성의 방향과 무수한 백성의 생사를 결정하는 오망방자 한 짓을 하는 것도 윤허하지 않았다.

이는 신의 결정 영역이기 때문에 범인(凡人)은 그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검려 첫 번째 제자도, 동이성에서 평소 질서를 유지하던 성주부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고검이 과거 피로 가족들을 쓸어버린 바람에 그가 성주부의 성주로 앉혀 놓은 자가 외딴 오지에서 찾아 온 먼 친척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해도 사고검은 자신을 거스르는 자는 여지없이 죽여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소위 종사의 의지였다. 이는 특별히 강조할 필요도 없는 자연스러운 최대 한계 원칙이었다. 다만 사고검이 범한을 성주부까지 데려온 건 그걸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것뿐이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성주부로 들어온 후 백짓장처럼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떨칠 수 없는 실망감과 놀라움이 들어서 있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려서였다.

북제에게 동이성내 최대 조력자는 운지란을 빼면 모두 성주부 사람들이었다. 이에 젊은 황제는 검려와 성주부 세력이 자기 대신 사고검을 설득해 동이성이 경국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사고검이 지금 피로 성주부를 씻어낼 생각이라면, 이는 자연스레 그의 태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에 의자 뒤에 서 있던 젊은 황제는 순간 현기증이 나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조용히 버티기만 했다.

범한이 그런 그녀를 잠시 조용히 바라봐 주었다. 그녀가 얼굴이 창백해져 있고 살짝 떨고 있자, 범한은 안심하라는 의미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 * *

성주부로 들어서자 사고검의 눈동자는 감정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감정을 찾아볼 수 없이 변해버렸다. 심지어는 냉담한 기색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몇몇 사람들이 성주부 두 번째 문에 있는 돌계단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잔뜩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검성 대인을 맞아주며 고개를 숙여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조아린 머리가 가을날 잘 익은 과실이 가지에서 똑 떨어지듯 떨어져 나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들의 목은 매끄럽고 깔끔하게 잘려져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에 잘려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은 손에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 * *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자 북제 황제의 얼굴은 갈수록 새하얗게 변했다. 꽉 오므린 입술도 점점 창백하게 변했다.

범한의 손이 살짝 힘을 주어 의자를 받쳤다. 그러자 그의 팔에 파랗게 핏줄이 드러나고 그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범한은 사고검이 살인을 하러 온 것임을, 자신에게 살인을 가르쳐 주러 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 가지고 저들 목숨을 이 세상에서 앗아가 버린 건 범한으로서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머리통이 한쪽으로 구르며 피로 무지개를 그리더니 이끼 낀 담벼락에 부딪혀 멈추었다. 범한은 입술이 말랐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사고검의 다음 행동을 막기 위해 손바닥에 힘을 주어 바퀴 달린 의자를 돌계단 아래쪽에 세워 두려 했다.

성주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도륙되면, 경국과 동이성 간 협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제거되는 거였다. 그리고 검려에서 사고검의 뜻에 찬성하지 않는 제자들도 이곳에 뿌려진 핏물을 통해 검성 스승님의 무정함과 강력함을 재차 깨닫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런 수단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감정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당초 성주부는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사고검이 수락만 해준다면 이곳이 처한 곤경을 해결할 방법은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고검이 이렇게나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폭력적인 해결책을 쓴 건 범한으로서는 의외의 일이었다.

하지만 바퀴 달린 의자는 어느새 돌계단 위로 올라가 성주부 제일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범한과 젊은 황제의 손은 여전히 의자 위에 놓여 있었고, 그들의 손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얼굴도 점점 더 창백해져만 갔다. 의자 양측으로 엎어지는 시신의 수가 갈수록 많아져 그들이 봐야 하는 피의 양도 많아진 탓이었다.

누군가가 드디어 용기를 내 검을 빼들었다. 하지만 검은 바로 두 동강이 났고, 사람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그는 허리 부분에서 몸이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의자에 앉아 이동하는 살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들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 도무지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여러 해 전 떠돌았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대종사가 그날 밤 검을 들고 성주부로 들어갔는데, 다음 날 성주부에서는 산 사람을 단 명도 찾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고 사고검이 또 성주부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손에 검이 들려 있지 않았지만 성주부에 있는 이들은 슬프게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진한 피비린내를 뒤집어써야만 했다.

범한의 낯빛은 갈수록 하얗게 질렸다. 체내 패도의 정기도 이미 극한까지 올라가 있었지만 몸 밖으로 내보내는 찰나, 밖에 만연한 살기에 눌려 잘게 찢어지고 조각나 곧바로 흩어지기만 할뿐 뭉쳐지지가 않았다.

젊은 황제는 몸을 부들부들 떠느라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의자에 손을 얹어 놓고 있어 억지로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거였다. 그녀가 아무리 강력한 여황제라고는 해도 살기의 습격으로 머리가 잘려나가고 토막 난 시신이 하늘을 나는 상황은 견딜 수 없는 거였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피는 계속 날기만 할뿐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사고검의 얼굴은 두 젊은이보다 더 하얗게 변해 있었고, 절대 평범하지 않은 흰색이었다. 마치 몸에 있는 모든 혈액이 어느 한 곳으로 몰려가 땅과 하늘을 찌르는 검의 기운과 천지를 멸해버릴 살기로 변한 후 끊임없이 발사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범한과 북제 황제의 몸은 이미 본인들의 심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만 같았다. 이들은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따라 지극히 수동적으로 성주부 안으로 걸어가고 가고 있었다. 사고검이 강력한 기세를 내뿜어 주변의 모든 미세한 동작들까지 완전히 통제하고 있어서였다.

젊은 황제는 저항할 힘이 없어 반응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범한은 어떻게든 정신을 강하게 다잡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심지어는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이 냉랭한 살의에 저항했다. 하지만 무거운 망치에 계속해서 얻어맞아 머리가 울리는 듯한 기분만 들뿐이었다.

범한의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고 눈에서는 무력한 슬픔이 스쳤다. 이후 범한은 아예 눈꺼풀을 아래로 늘어뜨려 성주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외면했다. 사고검이 발산하는 살인의 염원을 저지하는 걸 포기했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실력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성주부의 불쌍하고 무고한 아랫것들을 살리자고 발광하는 대종사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려 스스로를 한없는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아서였다.

범한은 눈꺼풀을 아래로 깔고 주변 상황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까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은 사고검이 자신에게 해주는 마지막 수업이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더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시는 성주부에 가득한 검의에 정면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현장 내 모든 미약한 기운의 변화까지 또렷이 느낄 수 있게 되었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대종사에게서 방출되는 기운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기운 때문에 범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혐오스럽게 다가와서였다. 피비린내가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제일 중요한 건, 아무런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오로지 무관심뿐이었다. 높은 곳에서 모든 걸 깔보는 듯한, 또한 생물을 무생물로 보는 듯한 그러한 무관심이었다.

사고검의 눈앞에서는, 그리고 염원 앞에서는 세상 그 어떤 것도 귀중한 게 없고, 사람도 모두 개나 돼지로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대종사는 동이성을 향한 감정이 깊었다. 그래서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곧이어 범한에게 다른 경지를 대표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건 바로 의지였다.

사고검의 의지는 의자 주변의 모든 걸 통제하고 있었다. 이에 강함, 결단력, 결사의 태도, 모든 윤리와 도덕, 준칙, 천지간의 비애, 그리고 뒤에 있는 젊은이의 염원은 이 강하고 절대적인 의지 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범한이 고개를 홱 치켜들고는 기운의 위압에 못 이겨 비틀거리며 쓰러지기 직전인 북제 황제를 손으로 잡아주었다. 그런 후 사고검의 눈빛을 따라 조용히 성주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고검의 경지를 체감한 범한은 본능적으로 그 경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 * *

세상에는 원래 대종사란 게 없었다. 그런데도 네 괴물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천지간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게 된 건, 그들 자체적으로 천지에 대해 깨달은 때문이었다. 즉 자신만의 경험을 토대로 대종사 네 사람은 완전히 다른 각자의 길을 뚫은 것이었다.

경국의 황제 폐하가 대종사의 경지로 들어설 수 있었던 건 분명 현실을 뛰어 넘은 길을 걸어서였다. 다시 말해, 체내의 경맥이 끊어진 폐인이 오히려 불행 끝에서 경지에 도달하게 된 거였다. 경맥이라는 제한이 없어지자 체내에서 제한 없는 상승세를 타는 게 가능해졌고,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하늘이 인간 육체에 만들어 놓은 제한을 돌파해 버린 거였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용맹한 방법이었다. 범한으로서는 감히 배울 수도 없고, 또 배울 곳도 없는 것이었다.

한편 사고검의 길은 달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울한 게 쌓이고 쌓여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압박을 받아온 터라 살인을 하려는 충동도 강했다. 그래서 그는 하룻밤 사이에 온 가족을 몰살해 버린 거였다. 그는 피비린내 속에서 정신을 강하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을 없애버리는 순간 외부 사물에 휘둘리지 않는 의지에 대해 깨달았다. 그 후로 그는 살의와 냉담함으로 창공에 있는 그 선을 싸늘하게 주시하며 쉬이 찢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성주부에 있는 마지막 돌계단에 사람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화려한 부족 복장을 입고 있는 동이성 성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일렬로 서서 검성 대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곳에는 성주가 데리고 있는 사람 중 제일 강한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하지만 대종사의 살인을 막을 수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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