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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75화 (875/1,108)

875화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걸다

북제 젊은 황제가 참다못해 끼어들어 질문을 던진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북제 황제인 그녀는 천하제일 섭가에 대해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섭씨 성의 여인에 대해서는 남 몰래 감탄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훗날 친히 정사를 돌본 후부터는 경국 강남의 황실 금고와 연계하려 노력했고, 이로써 황실 금고가 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섭경미가 과거 북위 지역으로, 그러니까 현재 자신의 나라인 북제로 가지 않은 게 유감이었고, 또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만약 그녀가 북제로 왔다면 어쩌면 범한은 상경성에서 태어났을 테고, 또 어쩌면 오늘날 이렇게 힘든 나날을 지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제일 큰 가능성은 세상에 범한이란 사람이 아예 없는 거였다.

범한이 웃어넘기고는 사고검 앞이지만 설명을 해주었다.

“과거 북위는 온 대륙을 통치하고 있었으나, 봉건적으로 부패한 세력들이 가장 모여 있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혁명이란 게 원래는 가장 힘든 지역에서 일어나야 하지만 그것을 실제 실행에 옮기려면 현실적이지 못한 게 많답니다. 한편 당시 경국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서호 정벌 전쟁을 벌였습니다. 하여 나라의 세(勢)가 싹이 트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쪽에 있는 작은 나라라 사람들에게 그다지 주목은 받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경국 사람들은 성정이 개방적이면서 강직해 신선한 것들을 더 쉬이 받아들이지요. 하여 어머니께서 과거에 경국을 택하신 건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범한이 말을 마치자 북제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탐탁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생각했다.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람! 짐이 듣기로는 다 아는 글자로만 되어 있는 건데, 그 글자들을 한데 모아 놓으니 어째 무슨 말인지 도통 못 알아듣겠군!’

사고검이 범한을 쓱 바라보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가 동이성을 떠나서 경국으로 간 게······. 흥! 경국에 있는 세자 어르신이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 거라 생각했지. 경국이 천하를 통일하는 날이 그녀가 천하를 개조하는 때라며······. 한데 그 세자 어르신이 결국에는 인간계 진짜 용으로 변해 버렸으니, 어찌 다른 이가 자기 몸 위에 올라타는 걸 용납할 수 있겠느냐?”

대종사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분 좋게 한 방 먹인 거 같은 웃음 소리였다. 이에 범한은 살짝 화가 나 그런 사고검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사고검은 범한의 눈빛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냉랭하게 말을 더 보탰다.

“나는 어렸을 적 인간 세상의 무수히 많은 시고, 쓰고, 달고, 매운 맛보았고, 여러 차례 목숨도 잃을 뻔 했다. 나를 길러준 종과 유모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죽었지. 하여 대권을 잡고 검법을 완성하자마자 성주부로 들어갔다. 한데 사람들을 죽여 복수하려는데 네 어머니가 나를 막았지.”

“내가 마음 놓고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던 건, 네 어머니가 동이성을 떠나 남경으로 갔기 때문이야.”

사고검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 갔다.

“하룻밤 사이에 성주부에 있는 백 여 명을 몽땅 죽였다. 하룻밤 사이에 말이다. 그랬더니 내 숨결이 크게 혼란스러워 지면서 경지로 들어서더구나.”

“물론 그 일이 있은 후 나와 자네의 어머니는 서신 왕래조차 하지 않았다. 그걸로 각자 다른 길을 간 거였어.”

사고검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바치고 있는 손을 살며시 토닥이며 말했다. 한 없이 감개무량하게 말하는 그의 말 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원망과 날카로움도 섞여 있었다.

그러자 범한이 살짝 비웃어 주었다.

“결국에는 속된 일 때문이었다고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대인이 우리 어머니를 흠모하던 이들 중 하나 일 리 없어요!”

그러자 사고검이 비웃었다.

“그녀가 아무리 더 예쁘고 더 클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다고 쳐도, 내 눈에는 여전히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에서 만난 꼬맹이일 뿐이었다. 나는 변태 같은 일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거든.”

“내가 평생 사랑한 건 손에 쥐고 있는 검뿐이다.”

* * *

사고검이 하려던 말을 반도 내뱉지 않았지만, 범한은 그의 가슴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원망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버려진 고아의 심정이었을 수 있었다. 또 어쩌면 이 대종사가 섭경미의 가슴 아픈 결말을 정확히 예측해놓고도 바꾸지 못한 때문일 수도 있었다.

사고검은 경국 황제를 죽이기 위해 세 차례나 저 먼 경국 황궁을 찾아가 잠입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대종사급 고수 때문에 깜짝 놀라 되돌아 와야만 했다. 그의 목숨은 곧 동이성의 수많은 목숨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을 건 도박까지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경국으로 갔던 건 그 방법만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할 수 있어서였다.

사고검은 왜 경국 황제를 죽이려 했을까? 예전에 사람들은 경국의 위협 때문에 동이성은 비바람 속 새둥지처럼 언제든 멸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검의 대종사가 자산의 강력한 무력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 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섭경미가 동이성에 남긴 여러 흔적들을 보며 범한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북제 황제가 섭경미를 보호해 주지 못한 데 대해 사고검이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 *

세 사람은 또 점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범한은 사고검이 황제 아버지를 죽이려던 일을 가지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젊은 황제도 자기 생각만 해 ‘짐이 오늘 즐겁게 놀러 다녔구나!’라고 말할 수 없었다. 사고검의 표정 역시 기쁨과 노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위엄 있게 변해있었다. 이에 범한과 황제는 더는 감히 사고검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바퀴 달린 의자가 동이성 거리를 찌그덕찌그덕 하는 소리를 내며 이동했다. 의자는 쭉 뻗은 길을 따라 거리 끝에 있는 항구까지, 심지어는 배 위로 올라가 낯선 세계까지 갈 것만 같았다.

범한이 느닷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두 눈에서 푸른빛을 살짝 번뜩이며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를 놀라게 한 건 아래쪽에서 명확하게 들려오는 찌그덕 거리는 소리였다. 지금은 대낮이었다. 앞서 이틀 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지금은 동이성이 가장 시끌벅적한 때였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멀리서 온 여행객들, 구경하는 손님들이 몰려들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이 시간대에 주변이 이렇게나 조용한 거지? 바퀴 달린 의자 찌그덕 거리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질 정도로 말이지.

범한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그의 낯빛은 살짝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깜짝 놀라 있었다. 옆에서 함께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있는 북제 황제의 낯빛도 살짝 변해 있었다. 살면서 이와 비슷한 무수히 많은 광경을 봐왔지만, 오늘 마주친 광경은 그야말로 너무나도 갑작스러워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리는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종잇조각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있는 거라곤 멀리까지 이어져 있는 푸른 바닥석 뿐이었다.

상인과 여행객은 모두 거리 양측 처마 밑으로 몰려가 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 중앙을 향해 꼼짝 않고 엎드려 절하는 자세로 있었다.

젊은 황제는 이국 백성들이 절을 올리는 상대가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대상은 바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대종사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사고검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이성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사고검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황제보다 훨씬 높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군이 나서서 강제로 제압한 것도, 일부러 길을 트도록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을 향해 자발적으로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 마음속의 신이 천천히 거리 끝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천하 사람들은 이 대종사가 얼마 못 가 죽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이성 사람들은 대종사의 진면목을 본 이는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2년 동안 불안해했다.

특히나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대종사의 모습은 동이성 백성들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했다. 이 몸이 성치 않게 된 이 사람이 손에 검을 들고 그동안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지켜주고, 자신들의 가정이 수십 년 동안 평안할 수 있도록 지켜주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심지어는 부끄러운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검성 대인의 비호 아래 살아온 게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 거였다. 검성대인도 늙어가고 또 피곤하셨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점점 늙는다는 건 결국에는 죽게 되어 있는 거였다. 거리 맞은편에 떠 있는 태양처럼 언젠가는 끝없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였다.

* * *

이제 보니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에서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결국 온 동이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거였다. 검성 대인이 드디어 검려에서 나와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왔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이 가슴 아파하며 땅 바닥에 엎드려 마지막 고별인사를 올리고, 품고 있던 고마움을 표현한 거였다.

이 광경을 본 범한은 살짝 궁금증이 일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사고검이라는 걸 이들은 어떻게 안 걸까? 그런데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범한은 사고검의 마른 몸 안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사나운 기운을 느꼈다. 사람을 천 리 밖까지 떼어버리고 싶어 하는 기운이자, 절대적으로 냉혹한 기운이었다.

길게 뻗은 거리 양쪽에서 슬픈 모습으로 엎드려 절하는 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었다.

범한은 침묵했다. 이 대종사가 두 번째 수업에 들어갔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사고검은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 먼 곳까지 늘어선 놀라울 정도로 슬픈 광경을 통해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서려면 옷을 벗어버리는 것은 물론 감정까지 버려야 한다는 걸 자신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였다.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건 아니다. 이 거대한 성을 향한 그의 감정은 이미 충분히 깊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그가 냉랭하고 무정한 모습을 드러낸 건 세속의 사람들이 보내는 정과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감정은 귀한 것이다. 하나 대단히 값싼 것이기도 해.”

사고검이 거리에서 한 첫 번째 말이었다.

“어떤 것에 감정을 품는다면, 정이란 것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자네 어머니에게는 제일 큰 단점이었어.”

그의 말에 범한과 북제 황제는 생각에 잠겼고,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만민의 숭배하는 눈빛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의자에서 나는 찌그덕 거리는 소리는 갈수록 더 귀에 거슬리기만 했다.

대단히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 앞에서 의자가 멈추었다. 바로 어제 범한이 와 보았던 성주부였다.

“우리가 왜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

범한이 공손하게 물었다.

사고검이 잠신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자네에게 마지막 수업을 하려 한다. 바로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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