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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73화 (873/1,108)

873화 눈 깜짝할 사이 (1)

범한은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 서서 한 손을 허리에 댄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줄기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입으로는 내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눈으로는 장난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정말로 후안무치해보였다. 그의 온몸에 선을 그어 작은 격자 안에 넣고 보면, 각각의 네모 칸 안에 전부 ‘경박’이란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상스러운 느낌 그 자체였다. 경국에서 온 이 젊은이는 사고검 앞인데도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는 처음부터 경박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두 사람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사람은 너무 놀라 그걸 계속 소화시켜야만 했다. 그러다 줄곧 기회를 봐 지적해주려던 북제 젊은 황제가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범한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사람이 어찌 이 정도로 후안무치할 수 있는 겐가?!”

범한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가 천일도를 배운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패도 공결을 익힌 것도 알고 계시고요. 만약 여기에 사고검까지 배운다면, 재능이 늘어나 부담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곧 괴물이 될 수도 있고 더 심한 경우 장래의 모든 가능성까지 없애버릴 수 있을 거란 기분이 들어서 그만······. 한데 가장 중요한 건, 제가 봤을 때 이 세상에 이유 없는 사랑이나 미움은 있을 수 없거든요.”

범한이 바퀴 달린 의자에 있는 사고검을 향해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하여 속에 담아두고 계신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신 겁니다. 설마 늙은이들끼리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떻게든 우리 황제 아버지께 적수 하나를 만들어 놓으려고 작당이라도 하셨답니까?”

그러자 사고검이 잔뜩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너희 세 사람 중에서 나는 자네를 제일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나 요 2년 동안 많이 변했더구나. 내 생각과 달리 많이 발전한 것도 있고 말이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생과 사는 많이 겪을수록 그만큼 감개무량해지는 게 있는 법이지요.”

범한은 사고검이 말한 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범한, 해당타타, 왕 십삼랑으로 대종사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본 후 말을 이어 갔다.

“십삼랑은 배웠겠군요. 한데 사고검 검법 안에 든 참뜻을 그가 깨닫지 못했는데, 저라고 가능하겠습니까?!”

사고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제 젊은 황제가 씩 미소를 짓더니 범한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가 배우고 싶지 않다면, 그 기회를 나에게 양보해 다오.”

“당신께서요?”

범한이 하하하,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행동하시는 게 진정 범인(凡人)과는 완전히 다르시군요.”

그러자 젊은 황제가 입을 오므리고 웃고는 범한의 말을 받아쳤다.

“검성 대인은 사후에 경국 황제에게 골칫거리를 만들어 주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한데 자네는 그분의 사생아니, 결국에는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하겠지. 그러니 짐에게 전수해 주는 편이 더 직접적이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황제의 말에 사고검도 더는 참지 못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세상에 재밌는 사람이 이리 많아졌을 줄이야.”

“좋습니다. 다른 건 언급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범한이 진지하게 사고검 뒤에 섰다. 그런 후 양 손으로 바퀴 달린 의자 등 쪽을 떠받치며 말했다.

“가르쳐 주시려거든 서두르시지요. 한데 며칠 목욕재계라도 해야 할까요?”

사고검이 괴상한 낯빛으로 범한을 쓱 바라보았다.

“검은 살인을 위해 있는 거다. 백 번을 씻는다 해도 결국에는 피로 물들게 되는 거다. 그러니 무엇 하러 씻는다는 것이냐?”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를 가르치시기로 한 이상, 그래도 스승다운 모습은 보이셔야지요.”

“검결은 그에게서 거의 다 배웠겠구나.”

사고검이 살짝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검은 죽은 물건이다. 그것을 쥐고 있는 손이 여러 방향으로 찌르고 베며 무궁한 변화를 일으킨다지만, 그 경우의 수는 만 개까지밖에 나올 수는 없으니······. 결국에는 고 정도의 공간 안에서만 움직이게 되는 거다.”

범한은 입 다물고 진지하게 경청했다. 옆에 있는 젊은 황제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사고검의 말을 단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듣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경지로는 많은 걸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억지로라도 기억하려다 보니 그녀에게 북제 조정에 있는 수많은 천재와 절대 고수들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지금 저 멀리 초원에 가 있는 해당타타처럼 말이다.

“검을 어떻게 찔러야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이것은 검법의 문제이고, 검법에서의 변화는 결국에는 그 한계가 있는 법이다. 천만년이 내려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현인과 고수들이 그 문제 때문에 힘겹게 수련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 태양 아래에서는 새로운 일이 없다고,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고는 해도 사실은 그것도 일찌감치 누군가가 알아낸 것이다.”

“그러니 검결이란 건 제일 중요한 부분이 아니야.”

사고검이 남은 한쪽 팔을 의자를 받치고 있는 손 위에 차분하게 얹고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건 마치 고검 한 자루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자네가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야. 살인을 하는 날카로운 검에게 필요한 건 어떻게 살인할지에 대한 방법이 아니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의지이다.”

현묘한 말 같았지만 범한은 기어코 그걸 이해하고야 말았다. 오죽이 과거 범한에게 실(實)과 세(勢)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었다. 실은 수련을 통해 쌓은 체내 정기의 수준을 말했고, 세는 많은 뜻을 담고 있어서 기세라든가, 구체적인 수단 등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검법은 당연히 ‘세’의 영역에 들어가는 거였다. 그런데 사고검이 말해준 건 이미 실과 세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염원이자 의지인 거다. 자네의 실과 세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그것을 뚫고 올라가게 해주는 게 바로 염원과 의지인 거다.”

사고검이 냉랭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 후 고개를 들어 머리 위에 있는 커다란 푸른 나무를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 양 눈동자에서 검의가 번뜩이고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그러자 거대한 나무에 잇던 새며 벌레들이 천지간에 가득 찬 살의를 느꼈는지 다급히 도망갔다. 그리고 동시에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너무나도 처참하게 울려 퍼졌다. 새들은 이내 무수히 많은 검은 점이 되었다. 나뭇잎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던 새들이 일제히 하늘 위 구름이 있는 곳으로 날아올라 가급적 멀리 도망가려 해서였다.

사고검이 갈수록 낮아지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다.

“사람은 신이 아니다. 사람의 육신은 용기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정기를 수련해서 ‘실’의 경지를 높이다 보면 언젠가는 육신의 경맥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단계가 온다. 그러면 수련은 멈추게 되는 것이지.”

“만약 그때 억지로 수련을 감행해 단계를 높이려 한다면, 경맥이 모두 끊어져 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창해의 물 높이를 한 척 더 높이려 하는 게, 이미 9등급 상의 경지에서 단계를 더 올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당사자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는 거다.”

사고검의 눈은 여전히 푸른색의 나뭇잎들을 차분히 바라보고 있고, 범한과 젊은 황제는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고 있어 분위기가 조금 괴이했다. 젊은 황제는 무공이 고강하지 않아 사고검의 말 중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포착해 냈다. 랑도, 운지란, 그리고 본인은 모두 9등급 상의 경지에 들어와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경지를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체는 이미 극한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게 더 수련을 한다고 하더라도 현 경지에 머물 수밖에 없는 거였다.

“실(實)은 항아리 속의 물이고, 세는 물을 뿌리는 방식이다.”

사고검이 은은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한 동이의 물로는 영원히 만 경에 달하는 밭을 축일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극한이란 거다. 그러니 자네가 세의 범주를 돌파하지 못한다면, 큰 강이 제방을 터뜨릴 때의 느낌을 당연히 체험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그래서 관건은 여전히 체내 정기로군요.’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속으로 사고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 후 황제 폐하 체내에 있는 바다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왕도의 정기를 떠올렸다.

“경지 사이에서는 늘 평형과 상호 제약이 유지되고 있고······ 실(實)이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네가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체내의 실을 밖으로 방출시켜도 범속 수준의 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큰 강처럼 제방을 무너뜨린다고 해도 자네가 그 강물의 흐름을 통제하지 못하면, 현묘한 하늘께서는 자네에게는 큰 강을 내려주시지 않아.”

사고검이 잠시 비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왜냐하면 하늘은 살아 있는 것은 함부로 살생하지 않는 덕을 지니고 계셔서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생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으시거든.”

“지금 말씀은 너무 유심론적이군요. 더군다나 문득 발견하게 된 건데, 대인께서 천하에서 가장 많은 강자를 길러 내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수준만 놓고 보면 사실은 오죽 아저씨와 크게 차이가 없으십니다.”

범한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사고검의 말은 모두 일리가 있어도 단지 헛소리일 뿐이야. 체내 정기를 제어하는 법문이 없으면, 체내의 자기 제한 때문에 정기의 무한 팽창은 당연히 있을 수 없어. 하나 정기를 더 위로 끌어 올려서 임계점을 넘지 못한다면, 그 현묘한 법문도 갖지 못하게 되는 거야.’

정말로 헛소리였고, 더군다나 논리적으로도 말도 안 되는 명제였다.

“왜냐하면 체내 정기가 이미 체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건 이미 인간 세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그에 상응해 그런 정기를 조절하는 법문 역시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고검이 눈빛을 거둬들이고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도리이니라.”

“하면 그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까?”

“하여 자네는 우선 인간 세상에 속하지 않은 법문부터 찾아내야 하는 거다.”

사고검이 눈빛을 거둬들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커다란 푸른 나무 위에서는 바람이 멈추었는데도 나뭇잎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제때 나무에서 도망가지 못한 어린 새들과 벌레들은 죽은 듯이 있으며 죽음에서 빠져나온 걸 기뻐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앞서 말한 염원과 의지다.”

사고검이 범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 젊은이가 얼마나 체득했는지 알지는 못한 채 그저 조금 알아들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범인을 넘어선 탈속한 경지의 실력은 평범함과 탈속함을 넘어선 방식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나타난다. 그러니 이미 배운 모든 것을 잊어야 한다. 잔재주니, 대벽관, 사고검 검법, 패도의 공결, 천일도의 심법 같은······ 무공의 흔적들은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

“흔적이 있기에 필시 따르게 되어 있는 법. 하여 대종사 경지의 실과 세는 따르는 도리란 게 없느니라.”

사고검이 점점 수축되는 동공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사람이란 사실조차 잊어야 한다! 자신에게 손과 발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야 하고, 몸에 털이 나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야 한다. 뼈가 시큰거리고 아파도 몸을 통제할 수 있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체내 정기를 달래서는 안 돼.”

“오로지 염원과 의지만으로 육신의 제한을 풀어버려야 한다.”

사고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종소리가 범한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옷을 벗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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