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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71화 (871/1,108)

871화 엄청나게 큰 나무 (1)

동이성에는 봄이 무르익어 있었다. 그래서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활짝 펴고, 푸른색 잎을 토해내고 있었다. 동이성은 인근 해변에서 습윤한 해풍이 밤낮없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그래서 여기는 다른 곳보다 봄이 빨리 찾아와 훨씬 무르익어 있었다.

성 외곽에는 대체 수령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무줄기는 곧게 뻗어 있었지만 하늘을 찌를 듯 마냥 위로 자라기만 한 게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가지와 푸르른 잎을 우산처럼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유난히 아름답고 자비로워 보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막아 넓은 그림자를 만들어 줌으로써 성에서 들고나는 사람의 모습을 가려주고 있었다.

이 나무는 정말로 거대했다. 그림자가 미치는 범위만 해도 몇 무(畝)에 달할 정도라, 많은 행인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쉴 수 있었다. 나무 아래쪽에는 구불구불한 뿌리가 흙 위로 돌출되어 있었고, 그것은 굵은 용처럼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고검, 범한, 젊은 황제 이 세 사람은 이 나무뿌리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 기괴한 조합은 행인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아마도 동이성에 기이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범한은 나무뿌리 위에 앉아 엉덩이 아래쪽으로 느껴지는 서늘함을 즐겼다. 그는 자신이 등지고 있는 이 거대한 나무가 어떤 종류인지 알지 못했지만 굳이 물어봐서 알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고개를 숙이고 나무뿌리 안에서 개미를 찾거나 똥을 굴리고 있는 쇠똥구리를 찾으려 해봤지만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때 그분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대여섯 살 정도? 일고여덟 살이었나?”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참 동안 생각을 해보았다. 이미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그의 기억이 모호해진 것만 같았다. 그가 땅을 향해 가래를 뱉었다.

“그냥 어린 낭자였지.”

“그때 대인께서는 나이가 어찌 되셨습니까?”

“열 몇 살 정도였을 걸?”

사고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 갔다.

“내 머리가 원래 나쁘다는 걸 알고 있을 게다. 그래서 이런 복잡한 문제 같은 건 기억을 잘 못해.”

“자기 나이 하나 기억하는 게 복잡한 문제라고는 보이지 않는데요.”

“천재는 어떤 면에서는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거든.”

사고검은 범한의 비웃음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재의 다른 얼굴은 백치이지요.”

범한이 나른한 표정으로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물론 대인께서 어린 시절에 백치였다는 건 온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사고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범한의 눈빛이 머문 곳인 나무뿌리 옆쪽 틈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찾는 중인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젊은 황제인 전두두는 싸늘한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가 바보짓 하는 걸 지켜보며 속으로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사람은 줄곧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속의 도리를 놓고 따진다면, 젊은 황제는 자연스레 제일 존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보기에는 사고검도 범한도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처럼 보였다.

사고검과 범한은 개미를 찾느라 신이 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계속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 머물며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젊은 황제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검려 밖에 있는 신하들이 자기를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고, 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 두 사람이 자신의 생사를 외부에 알려줄지 명확하지 않자 황제는 살짝 걱정이 들어 조심스레 말을 건네 보았다.

“섭씨 여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그러니 여기에서 삼 년을 더 기다린다고 해도 그녀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없소.”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지만 실은 그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젊은 황제의 지모(智謀)와 반응 속도가 이 순간 충분히 발휘된 거였다. 검려에서 사고검은 자신이 범한에게 모반을 꾀하라고 권했던 사실을 살짝 언급만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말에서 숨은 뜻을 알아챈 황제가 지금 은근슬쩍 운을 떠 본 것이었다.

황제의 말에 사고검과 범한 모두 고개를 들더니 황당하다는 생각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개미를 보는 게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재밌습니다.”

그러자 사고검이 범한을 바라보며 찬탄을 했다.

“과거 자네 어머니가 나와 함께 개미를 찾았었지. 그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똑같이 물었는데, 자네 어머니도 그렇게 대답을 하더구나.”

사고검이 유쾌하게 받아치자 범한도 따라 웃었다. 눈앞에 수년 전 그 장면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만 같아서였다.

코찔찔이 백치가 이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개미가 이사하고, 싸우는 걸 보고 있었다. 어쩌면 허리띠를 풀고 개미집 위에 오줌을 퍼붓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 근처에서는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동이성 주민으로 이 다 큰 백치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치 곁을 지나갈 때면 불쌍하고 역겹다는 표정만 지을 뿐 직접 상대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먼 곳에서 동이성으로 온 맹인 소년이 소녀의 손을 잡고 지나가다가 이 큰 나무 밑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옆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개미에 몰두해 있는······ 백치를 발견했다.

피부가 하얗고 옥처럼 고운 소녀가 호기심에 백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니?”

백치가 귀찮다는 듯 그녀를 보고 대답했다.

“개미 보고 있어.”

소녀가 ‘아!’ 라고 소리를 내고는 그와 함께 개미를 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보니, 누군가가 옆에서 봐주기 딱했는지 소년인 종에게 일러주었다. 저 백치는 이 성의 어느 대단한 집안의 도련님인데 바보라고. 그러니 너희 아가씨가 저 백치와 함께 이상한 짓 하는 걸 말리라고 말이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소녀는 일어나지도 않고 제 자리에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어떤 때는 개미가 사람보다 훨씬 재밌어서 그래요.”

이 말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자그마한 체구에 비해 정신 연령은 훨씬 성숙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무 아래에 있는 행인들은 그 점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어느 집 아가씨인지 모르는 아이가, 그것도 너무 예쁘고 맑아 그림에서 튀어나온 선녀 같은 아이가 성에서 제일 유명한 백치와 함께 쭈그리고 않아 있어주는 게 정말 못 봐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후 이 작은 아가씨는 손을 흔들어 얼음처럼 싸늘한 맹인인 소년을 불러 그들 옆에 함께 쭈그리고 앉도록 했다. 맹인 소년은 그들처럼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쭈그리고 앉는 거나 서 있는 거나 매한가지일뿐더러, 소녀가 자신이 쭈그리고 앉기를 바라니 그냥 따라주자고 생각해버렸다.

* * *

“그때 우리도 세 사람이었는데.”

사고검이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살짝 간지러운 얼굴을 긁으며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루 종일 개미가 싸우는 걸 보고난 후 내가 그들을 우리 집으로 초대했어.”

“댁으로요?”

“뒈질 우리 아버지는 예전에 동이성 성주셨지. 몰랐느냐?”

“아. 들은 적 있습니다. 하나 아주 여러 해 전 일이지요. 대인의 뒈질 아버지께서는 일찌감치 대인의 검에 돌아가셨고요. 잠시 생각이 안 났던 것뿐입니다.”

“성주부는 정말 크고 화려했어.”

사고검이 느닷없이 입을 활짝 벌리고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은 개 구덩이였어. 왜냐하면 내가 백치라서 뒈질 아버지가 나를 제일 미워했거든. 더군다나 우리 어머니는 그 집 여종이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었겠지?”

“음, 그런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소설을 많이 읽어보기는 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이성 안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사고검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찰원이 그쪽으로 전혀 조사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사고검의 신분에 대해 일찌감치 명확히 알고 있었다. 과거 그 백치가 성주부 안에서 얼마나 무시당하고 능욕의 나날을 지냈는지 범한은 알고 있었다. 단지 사고검의 친모가 여종이었다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안 사실이었다. 아마 그 여종은 여러 해 전에 죽었을 테지만 말이다.

“자네 어머니와 오죽은 내 평생 처음 사귄 친구였다.”

사고검이 느닷없이 엄숙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엉망이라서 차조차 대접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를 무시하지 않고 우리 집으로 함께 가주었다.”

“어쩌면 내가 그때 백치였기 때문에 그리 하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 수 있어. 하나 성주부에 있는 많은 이들은 그게 잘못된 거고, 내력이 불분명한 사람 둘을 성주부 안으로 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백치 도련님과 함께 지내는 건 더욱 안 된다고 본 거야. 그래서 며칠 후 섭씨 아이와 오죽이 성주부를 떠났다. 일이 그리 되기는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어찌되었든 낮에는 문밖으로 나가 개미를 지켜봤으니까. 그리고 가는 길에 두 사람이 빌린 집으로 가서 함께 놀았거든.”

“대인께서 제 어머니, 오죽 아저씨와 왕래 하시는 사이였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사고검이 미간을 한데로 모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설마 오죽이 과거 동이성에서 있었던 일을 자네에게 단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던 게야?”

“없습니다.”

나무뿌리 위에 앉아 있는 범한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는 무의식적으로 땅바닥에 장난을 치며 대꾸했다.

“아저씨께서 나중에 많은 걸 기억 못하게 되셨거든요.”

“아, 오죽 고놈이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던 거였어?”

사고검이 느닷없이 큰 소리로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예전에 백치였던 나와 거의 비슷해진 거 아니냐!”

범한이 사고검에게 잠시 눈을 부라렸다. 그런 후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내젓고는 물었다.

“제 어머니와 오죽 아저씨가······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건 범한을 십여 년 동안 괴롭혀온 질문이었다. 은연중에 한 가지 정도는 추측해내기는 했고, 더 나아가 상경성 밖 서산 절벽에서 소은이 임종 직전에 일부 말해준 건 있었다. 하지만 노인 소은이 죽기 전 해준 이야기에는 어머니의 내력에 관한 것만 있었을 뿐, 오죽 아저씨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소은이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과거 소은과 고하 두 사람은 천리를 힘겹게 견딘 끝에 신묘 외곽까지는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 그곳에서 섭경미를 보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섭경미를 신묘에서 구출해 나왔지만 도중에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때 섭경미의 나이는 고작 네 살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동이성과의 거리를 생각했을 때, 사고검이 그녀를 만났을 때는 2년 내지는 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동안 섭경미는 무엇을 했을까? 오죽 아저씨는 어떻게 어머니 곁으로 온 거지?

소은의 기억 속에서 섭경미는 신묘에 있는 누군가에 대해 깊이 걱정하는 것만 같다고 했었다. 계속 그 누군가를 생각하느라 결연히 자신들을 떠났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오죽 아저씨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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