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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70화 (870/1,108)

870화 늙은이

사고검의 눈빛에 화가 난 범한이 이를 악물고 찬바람이 쌩쌩 도는 소리로 말했다.

“고하든 대인이든 두 분 다 돌아가시기 전에 모든 희망을 제게 건 것만 같군요. 그런데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황당한 일 아닐까요? 그건 하늘의 뜻 따위가 아닙니다. 단지 대단한 여러분의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라고요!”

“이기적이라고?”

사고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 대머리가 죽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

그러자 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하가 제일 아끼는 둘째 제자를 경도로 보내 진평평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그걸 보면, 그는 진평평 대인이 경국의 내란 요인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사고검이 참다못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가 웃으며 욕을 날리기 시작 했다.

“그 죽일 대머리 자식. 그런 생각이었군! 그걸 보니, 그자는 경국 황제와 진평평이 한바탕 하기를 바랐던 것 같군. 자네는 중간에 껴 있으니 그들을 감당할 수 없을 테고 말이야. 그런 자네를 압박해서 미치도록 만들면······. 그래. 네 놈 판단이 나쁘지 않구나. 대머리도 나처럼 모든 희망을 자네에게 걸었어. 다만······.”

사고검이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하찮다는 듯 말했다.

“고하는 너무 멍청해. 그런 일은 그냥 대놓고 자네를 압박하면 되는 건데. 무엇하러 진평평을 거치려 한 건지 원. 경국 황제를 향한 그 늙은 검둥개의 충성심을 고하가 너무 얕보았어.”

“제발 그만 하십시오. 대인께서는 여기에 있는 저에게 대놓고 반역하라고 압박하시는데, 좀 무료하단 생각 안 드십니까?”

범한이 앞에 있는 거대한 구덩이를, 그리고 비바람을 맞아 유난히 더 낡아 보이는 검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앞에 있는 구덩이에 대해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설마 제가 저 안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범한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며 사고검이 몸을 웅크렸다.

“자네 스스로가 동이성 사람이라고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어. 나는 이 성 안에 있는 아둔한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으니까. 잊지 말거라. 영(寧) 낭자는 확실한 동이성 사람이다. 너희 1 황자는 자네처럼 자기가 어디 출신인지 인정하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는 범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황제 폐하께는 아들이 셋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중 성년인 아들 둘은 동이성과 너무 많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니 경국이 정말로 군대를 일으켜 동이성을 공격한다면, 적잖이 골치 아플 터였다.

“제일 관건이 되는 문제는 사람의 생에는 정말 많은 구덩이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자네도 알다시피, 그게 눈앞에 있으면 어쩔 수 없는 심경으로 눈을 똑바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거고.”

사고검이 합죽이 입을 하고는 남은 한 팔로 검갱 깊은 곳을 가리켰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노인의 느낌과 저항할 수 없는 압박감을 동시에 뿜어내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3년 전, 지란에게 말했었지. 눈앞에 거대한 구멍이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뛰어내릴 거라고 말이다.”

대동산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고하든 사고검이든 경국 황제를 찌르려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도 없이 계산을 해보았다. 두 사람 다 이 거대한 구덩이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은 없고, 시세의 압박을 받다 보니 두 대종사는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처참하게 추락하고 만 거였다.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일들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사절단이 도착한 후 해야 할 일은 어찌되었든 완수해야 하는 것이니, 제 일을 두고 여러분께서 조바심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여······ 이제 비교적 즐거운 일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게 어떨까요?”

* * *

“즐거운 일?”

사고검이 벌컥 화를 냈다.

“이 몸께서는 얼마 못 살고 죽을 텐데. 장장 2년 동안이나 이 낡은 오두막에 갇혀 지냈는데 어찌 즐거운 일이 있었겠느냐?”

“그렇군요, 정말 불쌍하시군요. 평생 쌓은 무공은 아직 남아 있는데, 행동이 불편해 감히 검려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시니 말입니다. 또한 큰 제자 등쌀에 몇 년 동안 이렇게 말라비틀어진 채로 앉아 계셨고요.”

범한이 비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예전에 북위 령왕(靈王)이 자기 아들에 의해 행궁에서 굶어죽었지요. 만약 운지란이 그런 방법을 쓰는 거라면, 대종사께서도 험한 몰골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나는 북위 령왕 같은 퇴물은 아니야.”

움푹 들어간 사고검의 눈에서 사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건데, 어찌 지란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햇볕이나 쬐고 있으면, 확실히 늙어 죽는 것 같은 불쌍한 느낌은 있네요. 하나 그래도 좀 익숙해지셔야지요.”

범한은 그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제 곧 죽을 대종사라지만 그가 검려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누가 감히 막으려 들고, 또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음. 일리가 있구나.”

사고검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범한을 쓱 흘겨보았다.

“오늘은 햇살이 좋구나. 자네가 의자를 밀고 밖으로 나가 산책 좀 시켜주련?”

그러자 범한은 제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검려 밖에서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사고검이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해도 동이성을 함께 산책한다니! 그건 난이도가 좀 높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북제의 황제 폐하께서 아직 검려 안에 계십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 사람은 자네 여인이지 않더냐! 그냥 모두 함께 산책하자꾸나.”

사고검이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동자를 불러 방에 가서 북제 젊은 황제를 데려오도록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젊은 황제가 검총 맞은편에서 나타나 천천히 걸어 왔다. 그녀 눈에 저 멀리에서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과 무례하게 검총 옆에 앉아 있는 범한이 들어왔다.

어젯밤에 옷이 일찌감치 찢겨 있어서 그런지 검려에서는 준비를 잘 해준 편이었다. 젊은 황제 전두두는 오늘 담청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느낌은 전혀 없었고, 유약한 서생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편이었다.

두 사람 곁으로 온 젊은 황제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깔고 말을 건넸다.

“검성 대인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군요.”

그러자 대단히 무례하게도 사고검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눕힌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손을 휘 내저어 동자를 저 멀리 보낸 게 전부였다. 한참 후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북제 황제를 바라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네, 검성 대인.”

젊은 황제는 옆에 앉아 있는 범한에게는 눈빛도 주지 않았다. 품위를 지키는 일에서 그녀는 확실히 세상에서 최고였다.

하지만 황제가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어도 사고검은 그녀의 속내를 단번에 간파해 버렸다. 대종사가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북제 황제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저 같은 늙은 괴물은 만날 게 못 됩니다. 다만 여황제는 천년 만에 처음이라, 직접 만나 뵙게 되니 저로서는 참으로 기쁩니다.”

사고검의 말에 북제 젊은 황제의 낯빛이 일시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화나고 찬바람이 쌩쌩 도는 눈으로 범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범한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고검이 젊은 황제를 향해 웃었다.

“첫째, 황제 폐하께서 여인이란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둘째, 저는 곧 죽을 몸이지요. 하여 사방에 알리고 다닐 리 없습니다. 저는 사탕을 함 안에 숨겨 두고 남들과 나눠먹지 않는 괴상한 사람이거든요.”

젊은 황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지만 사고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려던 말이나 계속 했다.

“셋째, 저는 곧 죽을 몸이니, 우리끼리 좀 대놓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저는 범한에게 반역을 저지르라고 권했었지요. 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이 제안에 흥미가 있으신지 알고 싶군요.”

젊은 황제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살짝 인 마음속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억지로 억누르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짐은 그 제안에 많이 구미가 당기는군요. 만약 작은 범 대인이 모반에 실패한다면, 우리 북제로 와서 지내도 괜찮소.”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성주가 되든 남자 황후가 되든, 경국 황제의 노비로 있는 것보다는 훨씬 편안할 테지요······. 하나 그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나 봅니다.”

검총 구덩이 옆에 앉아 있던 범한이 끼어들었다.

“서생이 반역을 꽤한다 해도, 십 년이 걸려도 이루지 못할 일입니다. 설마 두 분 다 제가 천하에서 제일 유명한 서생인 걸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렇구나.”

사고검이 괴이하게 웃으며 젊은 황제 바라보았다.

“하여 더는 이 문제를 논하지 않고 성 내 해변으로 가서 산책이나 할까 하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흥미가 있으신지요?”

“싫다고 해도 되는 것이오?”

젊은 황제가 살짝 화가 난 상태에서 대답했다.

그러자 바닥에 앉아 있던 범한이 한마디 했다.

“당연히 안 되옵니다!”

* * *

사고검은 동이성의 신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항상 거리 유지는 필요하다. 그래서 이미 여러 해 동안 마음대로 거리에 나와 거닐어 본 적이 없어 그런지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대종사는 눈에 띄게 들떠 있었다.

범한과 젊은 황제는 바퀴 달린 의자 뒤에서 함께 천천히 걸었다. 가끔씩 서로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말은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세 사람이 함께, 이렇게나 쉽게, 그리고 검려와 북제 고수들에게 종적을 남기지 않고 검려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있었다.

아무리 사고검이라도 이런 것까지 할 수 있자 범한은 정말 깜짝 놀라버렸다. 동이성 거리에서 걸어 다니는데 범한은 자신들을 따라붙은 사람이 없다는 걸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사고검의 경지라면 누구든 따라오는 즉시 곧장 바퀴 의자에서 나오는 무한한 검의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살덩어리로 잘려나갔을 것이다.

세 사람은 성 외곽의 어느 큰 나무 아래로 왔다. 나무는 푸르른 잎이 달린 가지를 옆으로 넓게 뻗고 있었다. 이에 세 사람은 이곳에서 쉬며 작열하는 태양을 피했다.

사고검이 고개를 숙이고 바퀴 달린 의자 옆의 황토바닥과 나무뿌리 사이의 갈라진 틈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말을 건넸다.

“몇 십 년 전, 이 나무 아래에서 처음으로 자네 어머니와 오죽이란 그 죽일 맹인 녀석을 만났어. 한데 그때 내가 개미가 이사하는 걸 보고 있었는지,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고 있는 걸 보고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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