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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69화 (869/1,108)

869화 검려 안의 구덩이 (2)

사고검이 매섭게 눈을 부릅떴다. 마치 이 대담한 문제에 격노한 것처럼 천검(天劍) 같은 눈빛으로 범한의 내면 깊은 곳을 찔러버렸다.

그 순간 범한은 양 눈이 뭐에 찔린 듯 욱신거려 서둘러 눈을 감았다.

한참 후, 사고검이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기한이 대략 백일 정도 남았다.”

범한이 눈을 떴다. 그리고 기쁨 분노 등 자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대종사에게 감히 다시 다가가지 못했다.

사고검은 발 아래로 펼쳐진 깊은 구덩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구덩이 안에서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있는 검 자루들을 바라보며 검들이 부딪히며 내는 딩당 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을 살면서 겪은 무수히 많은 화려한 삶의 단편들을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수히 많이 검을 휘두르고, 무수히 많은 승리를 거둘 때 자신의 검 아래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떠올라 그의 표정이 점점 암담해지고 있는 것일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생에서 패한 건 딱 한 번이었다. 대동산에서였다. 그런데 패해도 너무 철저하게 패하고 말았다. 어느 후배 하나와 함께 이 검갱(劍坑) 옆에 서서 굴욕적인 대화나 나누게 될 정도로 말이다.

“내 일찍부터 동이성과 주변의 무수히 많은 작은 제후국들을 검으로 통제했느니라.”

사고검이 갑자기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하나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오니,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지금껏 내가 통제했던 건 이 오두막과 이 구덩이 뿐이란 걸 말이다.”

범한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예절 바르게 절했다. 상대방이 드디어 결정을 내려주어서였다.

“경국 군사와 백성 그리고 동이성 백성을 대신해 검성 대인의 자비로움에 감사 인사드립니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다.”

사고검이 갑자기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만약 경국에서 온 게 자네가 아니라면, 나 역시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이야.”

범한이 잠시 웃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북제 젊은 황제가 천리 먼 길을 마다 않고 왔는데도 안 만나 주셨습니다. 그것만 봐도 이미 다 생각이 있으셨던 건데, 무엇하러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 국면은 이미 정해진 터였다. 그러니 사고검이 동이성에게 전쟁이란 재난을 피하도록 해줄 생각이었다면, 그 방법밖에 없는 거였다.

사고검은 옆에 있는 유쾌한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녀석은 실력은 좀 떨어져도 운만큼은 확실히 좋은 것 같다고 인정했다. 뜻밖에도 최대 난제인 ‘북제의 압박’을 하룻밤 사이에 거의 대부분 해결해 버려서였다. 그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 젊은이는 내가 왜 저한테 태도를 보인 건지 아직 모르고 있군.’

사고검은 마지막에 중요 내용을 밝혔을 때 대로한 범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단지······ 그때가 되면, 어쩌면 자신은 이미 죽고 없을 수도 있었다. 살짝 암담해진 그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믿어야 한다. 자네가 아니면, 자네의 황제 아비가 직접 찾아와 무릎을 꿇고 통사정해도 경국의 조건은 절대 받아주지 않을 생각이거든.”

범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고검이 고개를 숙이고 괴이하게 웃기 시작했다.

“섭경미의 호적은 아직도 동이성에 있다. 그렇다면, 자네는 적어도 절반은 동이성 사람이란 얘기지. 그런데 이제 보니, 정작 본인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나 보구나.”

동이성으로 오기 전에 범한은 동이성에서 과거 섭가와 관련된 사람이나 일 또는 과거를 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모친 섭경미가 이 세계에 온 후 첫 번째 자리를 잡은 곳이 동이성이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16살이 되던 해 밤에 오죽은 처음으로 섭경미에 관한 모든 걸, 기억상실증 환자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걸 이야기해 주었다. 섭가의 사업은 동이성에서부터 시작되고, 천하에서 돈이 가장 많은 곳 역시 동이성이었다. 다만 무슨 생각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섭경미는 결국 그 당시에 별로 강대하지 않았던 경국을 선택했다. 어쩌면 현재 이상하리만치 강대해진 황제 폐하를 선택한 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섭경미가 동이성을 떠난 후 나중에 돌아갔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성이 어머니께 중요한 곳이란 건 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사고검이 지금 갑자기 과거의 일을 언급하며 그걸 조잡한 핑계로 댈 거라고는 생각 못한 것뿐이었다.

“그만하시지요.”

범한이 사고검을 쓱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저도 잘 압니다. 하나 그분은 그분이고 저는 저입니다.”

“정말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냐? 설마 자네 어머니가 생전에 아꼈던 동이성이 경국의 평범한 고을처럼 변하는 걸 보고 싶어 했을 것 같으냐?”

범한이 눈썹을 씰룩이더니 아예 바퀴 달린 의자 옆 바닥에 앉아버렸다. 그런 후 검총에서 두 다리를 늘어뜨리고 허공에서 흔들며 싸늘하게 웃었다.

“대동산에서의 일은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일부는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 하신 말씀을 저도 들었습니다.”

“저를 동이성 성주로 삼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범한이 고개를 틀어 사고검을 쓱 바라보고는 살짝 비꼬는 듯 물었다.

“제가 반쪽은 동이성 사람이라 그러신 거라고요? 설마 검려에 이렇게 오래 숨어 계신 이유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대응 방법을 생각해 내시기 위해서였습니까? 어찌되었든 저는 경국 사람이란 사실을 잊지 마세요. 저와 황제 폐하와의 관계는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혀 있다고요. 성주 정도의 자리를 가지고 우리 황제 폐하의 의심을 부추겨 우리 둘의 관계를 찢어 놓을 생각일랑 마시고요.”

그러자 사고검이 손을 휙 내젓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구나.”

“물론 저는 동이성 성주를 맡을 수 없습니다.”

* * *

사고검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리 죽는 게 두렵다니. 자네가 황제 아비에게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래서 나도 자네가 감히 동이성을 맡아줄 거란 희망은 갖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경국 사람들의 이익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네가 동이성 생각을 좀 해준다고 해서 그게 대역무도한 짓은 아니라고 안심도 시켜주고 싶었고 말이다.”

“저는 동이성 백성들을 위해 충분히 생각을 했습니다.”

범한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앞서 말씀하셨던 것대로라면, 저 말고 다른 사람은 그 많은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 여기신 것입니까? 누가 그 조건을 가지고 우리 황제 폐하의 화를 감수하면서까지 설득할 수 있을까요?”

“고작 그게 다냐?”

사고검이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어쩌면, 자네 어머니가 과거에 어찌 죽었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 * *

검려 깊은 곳에 있는 큰 구덩이에서 무수히 많은 검이 순식간에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검은 쉼 없이 흔들리며 우우 하고 구슬프게 울었고, 이제 곧 일제히 부러질 것만 같았다. 검총에서 양 다리를 늘어뜨리고 흔들고 있던 범한은 그 순간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의 미간이 점점 한데로 뭉치더니 눈동자에 무어라 말로는 표현 못할 감정이 떠올랐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사고검의 경지면 자연히 누군가 엿들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범한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점점 오그라들더니 더는 참을 수 없이 아파왔다.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비정상적으로 하얗게 변해버린 얼굴을 하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를 설득할만한 의견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없다.”

사고검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추측한 거지. 자네 어머니 같은 사람이 어찌 그리 이상하게 죽을 수 있겠느냐? 경국 황후라는 그 돼지나, 어쩌면 황태후 그 늙은 창부(娼婦)가 자네 어머니를 죽일 수 있을 게다. 자네 어머니는 그냥 단순한 어머니가 아니거든.”

“겨우 그 이유 때문입니까?”

“고하도 추측을 했었고, 진평평도 추측을 했었으니, 나라고 못할 게 뭐 있겠느냐?”

범한이 입가를 아주 살며시 떨며 조심스레 말했다.

“추측이란 건 말입니다······ 그냥 않는 게 더 좋은 것입니다. 생사람 잡을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이냐?”

사고검이 갑자기 큰 소리로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는 무궁무진한 악독함과 조소가 담겨 있었다.

“죽는 것도, 일을 이루는 것도 두려워하다니. 자네 같은 사람은 정말 보기 드문데 말이다.”

범한은 상대방이 자신의 무엇을 얕본 건지 알고 있던 터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

“자기 가족 모두를 홀가분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원래는 보기 드물죠.”

그러자 사고검의 낯빛이 돌변하고 눈동자가 포악하게 변해 언제든 범한을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검의가 다시 천지간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 범한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하찮다는 듯 그를 쓱 바라보고는 받아쳤다.

“하면 하는 거지요! 설마 못할까 봐서요?”

“그리고 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 일 때문에 대인께서 염려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범한이 이맛살을 강하게 찌푸리고는 살짝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어떤 때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같은 큰 인물이자 늙은 괴물인 분들께서는 대체 어찌 생각하시는 건지 말입니다. 왜 꼭 저를 우리 황제 폐하와 대립시키려 하십니까? 설마 저에게 그분과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제일 관건은 말이죠, 설마 여러분께는 제가 정말로······ 그분께 반항하고 싶어 하는 걸로 보시는 건가요?”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은 사고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 말씀하시든, 그분은 제 아버님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생각을 저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라고?”

사고검이 바퀴 달린 의자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그는 마치 검집으로 들어간 검처럼 그 어떤 광채도 나지 않았다.

“진짜 긴급한 상황이 펼쳐지면 말이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다 죽일 수 있는 거란다.”

심장이 오싹해진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리고 이 엄청난 백치와 인정이니 윤리에 대해 논하는 건 그야말로 헛짓거리라고 생각했다.

섭경미가 사망한 진짜 원인은 경도 반란군이 제일 중요한 때에, 그리고 장 공주기 죽기 전에 범한에게 살짝 언급해준 바 있었다. 더군다나 진평평도 부지불식간에 그 점을 증명해 주었었다. 다만 진평평은 그걸 명확히 말한 바 없었고, 그건 범 상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과거에 직접 그 일을 겪은 옛 두 전우는 여러 해 동안 서로를 의심하다가 드디어 한 사람을 주목하게 된 거였다.

그들은 범한에게 그 일에 대해 명확히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무서울 것 없는 사고검이란 자만 빼면, 그러니까 줄곧 경국에서 큰 일이 터지기만을 바라던 늙은 괴물만 빼면 겨우 추측만 가지고 범한을 돌아갈 수 없는 길 위로 끌어들이려는 사람은 없었다.

“곧 돌아가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경국에서 혼란이 이는 걸 보고 싶으신 거라면 생각 접으시지요.”

범한이 살짝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사고검을 설득하고 또 자기 자신도 설득하려는 듯한 행동처럼 보였다.

“제 성의를 받아들이시고, 그런 후 편안히 임종이나 기다리시지요. 동이성의 모든 백성은 제가 대인 대신 잘 돌보겠습니다.”

사고검이 범한을 싸늘하게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가 한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믿거라. 자네는 언젠가는 저 빌어먹을 하늘이 정한 길을 걷게 될 거니까.”

“저는······ 하늘의 뜻을 거스를 겁니다!”

범한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웃을 때 기침이 나는 바람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버려 너무나도 낭패였다.

하지만 사고검은 그런 범한을 신경 쓰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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