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화 검려 안의 구덩이 (1)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고검의 말뜻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오늘 검려 깊은 곳까지 들어온 건 동이성과 천하 장래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지, 사고검과 회포나 풀러 들어온 건 아니었다.
천하에 대해 논할 자격을 지닌 인물은 이미 많이 사라지고 없었다. 고하는 죽었고, 섭류운은 사라져 버렸다. 대동산 일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다. 오늘 검려 안에는 북제 황제와 범한, 사고검이 있었고, 이들은 천하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제가 왕 십삼랑에게 들려 보낸 계획서를 이미 보셨을 거라 사료됩니다.”
계획서란 말은 새로운 단어였다. 경력 4년 때, 범한은 범사철에게 계획서를 쓰도록 했고, 그것으로 담박서국을 열었다. 그 후로는 올해 처음 그것을 한 부 써서 사고검에게 보낸 거였다. 이 성정 괴팍하고 흉포한 대종사가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안 봤다.”
사고검이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다.
사고검의 대답에 범한은 심장을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범한은 자신이 힘겹게 써내려간 계획이니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은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터였다. 하지만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다니. 대체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걸까?
“남경의 사절단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는데, 자네는 뭘 그리 급하게 온 것인가?”
사고검이 범한을 바라보며 비웃어주었다.
범한은 대꾸도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입을 뗐다.
“작년 서한에서 제게 북제를 통제할 방법이 있다고 대인께 말씀드렸었지요. 만약 대인께서 저를 믿어주신다면, 저도 동이성의 독립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해드릴 수 있습니다.”
사고검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틀리고 함몰된 끔찍한 뺨 때문에 차분한 눈동자가 유난히 더 두드러지고 맑고 그윽해 보였다. 하지만 그 맑은 그윽함 속에는 살 떨리는 광기가 섞여 있었다.
“고 녀석은 뜻밖에도 여자더군.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보니, 자네에게 우선 탄복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 그걸로 일을 해결하려 하는 거라면, 일단 내가 자네부터 설득해야겠구나. 모든 국면을 통제하기에는 너의 능력이 살짝 모자라다.”
경국 황제의 요구 사항은 당연히 동이성을 경국 영토로 병합시키는 거였다. 사고검 역시 자신이 죽으면 동이성과 주변 작은 제후국은 자력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언제든 집어 삼켜질 운명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북제에서 갑자기 끼어든 이상 동이성에 속해 있는 제후국들은 당연히 몸값을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자신들을 최대한 존속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건 애당초 방향이 완전히 다른 거였다. 다시 말해, 황제 아버지도 만족시켜야 했고, 사고검도 만족시켜야 하는 거였다. 그러니 범한 입장에서는 거의 완성하기 힘든 임무였다. 그야말로, 오빠 편을 들자니 올케 언니에게 죄 짓는 것이고, 기생이 모두에게 환심을 사려다가 제대로 놀지 못하는 경우였다,
그래도 지금 제일 중요한 사람은 사고검이다. 그가 승낙만 해준다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순조로워져서였다. 범한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자연스럽게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검총(劍冢: 검의 무덤) 주변의 황톳길을 걸으며 중상을 입은 사고검이 햇볕을 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고검이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감싼 햇살을 즐기다가 갑자기 말을 건넸다.
“바퀴 달린 의자를 정말 잘 모는구나. 우리 동자들 보다 잘 하는데, 여기 남아서 몇 달 동안 나를 좀 돌봐주지 않겠느냐?”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대답했다.
“몇 달 동안 돌봐드리는 것도 괜찮지요. 하나 그 계획서들은 꼭 봐주셔야 합니다. 동이성의 천만 백성이 모두 대인만 바라보고,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여 무엇이든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바퀴 의자의 경우는 제가 경도에서 많이 밀어봤습니다.”
“그랬었지. 생각났어. 그 늙은 검둥개가 일찌감치 다리가 부러져 못 쓰고 있었지.”
사고검이 느닷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20년 동안, 내가 저지른 제일 큰 잘못은 말이다, 실은 목표를 잘못 세운 거였어. 그동안 너희 황제를 최대 목표로 삼았거든. 한데 애당초 진평평을 죽였더라면, 어쩌면 너희 황제는 지금 오만방자하게 굴지 못했을 거다.”
담담하게 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강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 가공할만한 감찰원 원장을 사고검 자신이 죽이려 들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검총 주변의 해풍이 살짝 머뭇거렸다. 그리고 사고검의 말 속에 담긴 검의(劍意) 때문에 엉겨 붙어 움직이지 않다가 순간 범한의 심장을 잔인하게 찔렀다. 범한은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고, 그제야 대종사의 진짜 경지를 실감했다. 생각만으로 움직이게 하다니. 주변 환경이 대종사의 생각에 따라 감응했고, 이로써 살의(殺意)가 크게 일자 범한은 견디기 힘들었다.
범한은 바퀴 달린 의자의 등 쪽을 양손으로 있는 힘껏 누르고 억지로 버텼다. 그리고 대단히 곤란해 하며 말했다.
“대인의 경지로 진지하게 진 원장님을 제거하려 하셨다면, 그분도 오래 살지 못하셨을 겁니다. 하나 문제는 대인께서 그분을 죽이면, 섭류운이 동이성 사람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범한이 힘겹게 숨을 쉬며 한참 후 천천히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댁의 집안사람들은 모두 죽었어도, 그래도 대인께는 제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동이성에는 성주부도 있고······. 검성 대인, 황제 폐하께서는 대종사란 괴물은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인께서도 세상에 나오신 후로는 맘껏 공격도 하지 못하시고 균형이나 유지하는 사물(死物)만 되지 않으셨습니까.”
“음. 일리가 있군.”
사고검이 고개를 숙이고 대꾸했다.
범한은 계속 힘겹게 웃고 있었다.
“어떤 때는 천하 백성들 대신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고하 대사든, 사고검 대인이든 항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셔서요. 예를 들어 북제라든가 동이성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대인께서 정말로 제멋대로인 백치에 대종사의 능력까지 있다고 한다면, 어쩌면 온 천하는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물론······.”
범한이 아까보다 더 힘주어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저 역시 대인을 설득하려는 망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고검이 한참동안 아무런 대꾸도 않다가 갑자기 말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자네는 나를 정말 많이 놀라게 했어. 자네가 말하는 비장의 패라는 건 바로 저 젊은 황제에게 있는 거였지. 자네가 나와 담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다. 내가 확실히 동이성의 장래를 신경 쓴다는 것 역시 인정하고······. 이거는 어쩌면 일종의 습관 같은 거야. 죽는 게 두려워서 땅 속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려는 습관 같은 거 말이다. 나는 이 성의 백성을 지키는 게 습관으로 굳어진 거고.”
사고검이 고개를 돌려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자네가 나를 만족시킨다면, 나도 자네를 만족시켜줄 것이야.”
“명의상 귀순하고, 군을 주둔하게 하면, 50년 동안 지금 살던 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범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사고검의 눈을 바라보며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그 말들을 내뱉어 버렸다. 이는 청주에 있을 때 이미 왕 십삼랑에게 말한 내용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사고검 앞에서 같은 내용을 반복한 것뿐이었다.
“군을 주둔한다고?”
사고검이 하하,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유난히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범한의 양 눈을 찔러 그에게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정기로 몸을 보호하려 해봤지만 막을 수 없었다.
범한의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끄응 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저를 죽일 것도 아니시면서, 왜 이런 식으로 괴롭히시는 겁니까?”
사고검이 범한의 말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버릇처럼 두어 번 웃었을 뿐인데, 그게 괴롭히는 것과 무슨 상관이냐?”
* * *
“북제 황제가 뜻밖에도 여인이라니. 쯧쯧.”
사고검은 범한의 제안 따위는 아예 귓등으로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그 일을 생각 중인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이 죽기 전에 드디어 어떤 비밀을 알게 되어 대단히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써 범한은 이 대종사가 성정이 괴팍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순간 아직 방에서 잠을 벌충 중인 전두두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어젯밤 이 대종사가 밤새 엿듣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낯빛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범한이 본능적으로 사고검의 눈 아래쪽을 바라보며 그곳에 넓게 검은빛이 도는지 살폈다. 바로 이때, 사고검 역시 범한을 쳐다보았다. 그는 범한의 눈 아래쪽이 검게 변해 있는 걸 보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황제라 하더라도 몇 년에 한 번만 안고, 조심해서 적당히 하거라. 그렇게 육욕에 빠져 죽어버리면, 내가 대답해주고 싶어도 못할 거 아니냐.”
사고검의 말은 범한 입장에서는 들어주기 난감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말 만큼은 순간 범한의 귀에 쏙 들어와 박혔다. 이에 범한은 어떻게든 말을 받아치고 있었지만 입만 바들바들 떨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벽빛이 점점 더 밝아오자, 바퀴 달린 의자의 그림자가 검총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바퀴 달린 의자는 무수히 많은 검에 찔린 것처럼 너무 불쌍해 보였다. 조용히 검총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있던 범한에게 문득 검려로 들어올 때 랑도와 운지란에게 쫓겼던 일, 그리고 두 번째 문으로 들어온 후 본 익숙한 사람의 형체가 생각났다.
그때 범한은 그 형체를 그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검총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보니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문에서 나타난 사람은 사고검 본인인 거였다. 단지 그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느낌이 진평평과 너무나도 비슷해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범한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다는 듯 사고검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네를 건드릴 수 없어.”
하지만 안전하다는 기분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범한은 조용히 사고검을 주시한 채 빠르게 분석을 해나갔다. 그리고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할 수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감히 하지 않는 사람까지 없는 건 아닙니다. 운지란은 감히 십삼랑을 연금했고, 또 감히 북제 사람과 사적으로 거래했습니다. 또한 대인 면전에서 저를 죽이려고 뒤쫓기도 했고······.”
범한은 이미 많이 놀라 있었다. 비록 사고검이 운지란과 랑도를 얼렁뚱땅 검려에서 쫓아내 현장을 깜짝 놀라게 했어도, 그래도 대종사의 경지에 있는 사고검이 두 번째 문 뒤에 나타날 필요가 없는 거였다. 그러니 그때 사고검이 나서준 건 그의 실력이 전성기만 못하다는 걸 증명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 검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 누구도 감히 나를 밀고 갈 수 없기 때문이지.”
사고검의 눈빛이 살짝 괴이하게 변했다. 그리고 다시 한 차례 범한의 속마음을 맞추었다.
“자네 아버지와 섭류운이 나에게 너무 심한 상처를 입혔다. 하여 일찌감치 죽었어야 했는데,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서 이 바퀴 달린 의자에만 앉아 있는 중이지. 이제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도 뛸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으니······. 내 손에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사람도 나에게서 조금만 떨어져 있으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대종사가 이 지경이 되는 바람에 스스로를 검려에 가둬버리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되다니. 범한의 마음속에 순간 어둠이 스쳤다.
“물론 감히 나에게 다가와 시험해 보는 사람도 없구나.”
사고검이 눈을 감고 말을 이어 갔다.
“하여 내 곁에 있는 이상 자네는 안전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