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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67화 (867/1,108)

867화 머리 빗기 (3)

어느덧 황제와 범한은 평등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서로의 인생에 대해 깊이 검토했고, 각자 한 일 중 어떤 게 타당하지 않았는지 봐주었으며, 상대방의 지혜를 속에서 자신이 보완할 점을 찾았다.

하룻밤이 지났다.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한 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사귄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함께 했음에도 서로 편안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남녀 간의 신체적인 접촉 외에도 정신적인 소통과 위안이 있었다. 그리고 함께 있을 때면 짜릿한 도전 정신에 마음이 요동쳤다.

젊은 황제가 이불을 끌어다가 자기 가슴에 찾아온 춘색(春色)을 가렸다. 그리고 범한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소리를 죽이고 크게 화를 냈다.

“사고검이 알면 어쩌지? 짐이······ 짐이······ 그대에게······ 그대에게······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살살 좀 하라고!”

이제 막 대야를 내려놓고 차로 목을 축이던 범한이 황제의 말에 하마터면 차를 뿜을 뻔했다. 그가 침대로 걸어가 황제의 아래턱을 살며시 잡고 어루만지며 온화하게 말했다.

“늙은이는 곧 죽을 몸인데, 알아차렸다 해도 우리가 끝까지 발뺌하면 그만입니다. 뭘 그리 무서워하십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반응이라, 황제가 싸늘하게 범한의 손바닥을 쳐냈다.

“만약 짐의 진짜 신분이 폭로되면, 그대도 알다시피, 정말 큰 화가 일 것이다.”

범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북제 황제가 여인이란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에 분명 큰 혼란이 일 것임을 범한은 알고 있었다. 그러면 경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명 출병을 할 것이었다.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 저를 믿으시고, 협력해주십시오. 그리고 향후 일은 모두 제게 맡기시고요.”

황제의 어깨 위에 범한이 양손을 얹고는 살짝 아래로 힘을 주면서 진심이 담긴, 그리고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어투로 말했다.

* * *

검려 밖에 있는 고수들은 이미 하룻밤을 지센 상태였고, 횃불도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랑도 등 북제 고수들은 검려 문을 싸늘하게 주시했다. 안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는 대체 어쩌고 계시는지, 다치지는 않으셨는지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범한이나 사고검이 미쳐 날뛰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랑도는 지금처럼 마냥 밖에서 기다리기보다는 일찌감치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한편 검려 제자들은 사고검이 자신의 태도를 보인 이상, 감히 안으로 밀고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 있기는 했다. 길고 긴 밤이 지나는 동안 검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인내심도 갈수록 바닥이 났다. 운지란은 조용히 랑도의 눈빛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검려에서 다른 명이 나오지 않는다면 랑도는 다시 검려로 쳐들어갈 것이고, 며칠 후 어쩌면 북제 대군이 동이로 쳐들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승님께서 태도를 표명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황제 폐하께서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셨을 터이니······ 범한과 함께 있다 한들 뭐에 걱정이겠습니까? 경국 사람이 황제 폐하께 아무리 불경한 짓을 하고 싶어도 스승님께서는 자기 눈 아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운지란이 차분하게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랑도는 마음이 좀 놓였다. 사고검이 지닌 종사의 지위로 따져보나, 동이성의 국면으로 따져보나, 그는 황제 페하께서 누군가에게 굴욕적인 일을 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번 검려 개방 의식의 초대장은 사고검이 자발적으로 보낸 거였다.

* * *

랑도는 더는 황제 폐하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황제 폐하께서 이미 누군가에게······ 여인이라고 무시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사고검 이 늙은 괴물은 당연히 범한이 북제 작은 황제를 죽이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 만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북제 젊은 황제와 범한이 서로 자발적으로 싸우고 한바탕 한다면, 대종사도 달리 막을 방법은 없는 거였다.

그런데 달리 막을 방법이 없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범한이 새벽빛을 받으며 검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대종사를 보는 순간, 그의 눈에서 놀라움과 괴이함이 담긴 웃을 보고 말았다.

괴이한 웃음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경악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이치를 따져본다면, 대종사는 평생 경천동지할 큰일을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었을 테니, 대동산이 눈앞에서 무너진다 해도 그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경악했다는 건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범한은 사고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이 대단한 인물의 속마음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사고검은 속으로 씁쓸하게 웃고 있는 것도 모자라 살짝 득의양양해 하며 그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계속 사고검의 눈만 보고 있었던 건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봤지만 눈을 두고 있을만한 곳이 없어서였다.

이 키 작은 노인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왼쪽 얼굴 절반은 뼈가 모두 으스러져서 움푹 함몰되어 있었고, 왼쪽 팔도 잘려나가고 없어 텅 빈 소매는 바람을 따라 가볍게 나부끼고 있었다. 비록 풍덩한 베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어 보이지 않는 곳은 얼마나 다쳤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래도 분명 기겁할 만큼 끔찍할 것이었다.

범한은 이번 생에 처음으로 사고검과 만나는 거였다. 천하에서 제일 사나운 사람,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동이성을 수호해 온 검성 대인을 만난 것이었다.

범한의 상상 속에서 검에 통달한 종사급 인물은 신선만큼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탈속한 느낌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눈앞에 나타난 사고검이 이런 몰골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처참하고, 가련했다. 오로지 두 눈만 타고난 괴팍함과 포악하고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검의(劍意)를 한껏 담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그의 눈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게 실례를 범하는 것만 같았다.

방안 분위기는 정말 미묘했다. 신화 속 인물과 마주하고 있으니 범한은 조금 더 흥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흥분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상대방이 며칠 후면 사망할 것임을 알고 있어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가 어려서부터 오죽 아저씨와 생활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의 부모님이 대종사라는 초특급 고집불통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 분들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검동이 바퀴달린 의자를 새벽빛이 드는 곳까지 밀고 왔다. 은은한 새벽빛이 사고검을 비추자 그의 끔찍한 상처가 명확히 드러났다. 검동은 자기가 할 일을 마치자 자리를 비켜주었다.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사고검이었다. 그는 범한을 한동안 주시하고 있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탄식했다.

"탄복했네. 탄복했어."

이 대종사는 어려서부터 백치로 유명했다. 하지만 검도를 크게 이룬 후에는 천하에서 거침없이 행동하며 그 누구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다. 대동산에서 경국 황제와 섭류운의 연합 공격에 처참하게 다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거칠고 사나웠으며,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했고,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는 천하에서 최고로 강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 누군가에게 탄복했다는 말이 나오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사고검이 범한을 향해 연달아 탄복했다고 말하자 범한은 민망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너무 몸 둘 바를 몰랐다.

범한은 탄복했다는 말 안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았다. 경국 황제나 섭류운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탄복했다고 말한 건, 당연히 어젯밤에 들린 그 소리 때문일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범한이 헛기침을 했다. 심지어 민망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몸을 반쯤 돌리기까지 했다.

새벽빛이 비추어 늙은이와 젊은이 두 사람을 그 빛 안에 가두었다. 범한은 습관으로 굳어진 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바퀴달린 의자 옆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보일 듯 말 듯 이맛살을 찌푸리고 지금 이 상황을 음미해 보았다. 마음속에서는 이상한 기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 마르고 왜소한 불쌍한 부상자가 살인을 밥 먹듯 하고 패도무쌍(覇道無雙)한 사고검이라고?

햇빛이 사고검의 눈썹을 비추자 새하얀 빛이 영롱하게 흩어졌다. 눈썹이 순간 백발로 변한 것만 같았다. 범한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아직 멀쩡한 나머지 반쪽 얼굴 바라보았다. 이 대종사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만큼 늙고 나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3년 전, 범한이 대동산에서 도망갈 때 섭류운만 배에 타고 있었다. 그래서 고하며 사고검과는 마주치지 못했다. 물론 만약 그때 사고검과 마주쳤더라면 경도로 도망쳐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그때 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울러 사고검이 검을 휘둘러 싸늘한 빛을 내며 산봉우리에 오르고, 호위들을 베어버려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피가 낭자하게 깔리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범한이 사고검을 은근히 두려워하는 데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대종사 역시 어느 정도는 미치광이고, 호위 백 명 정도는 거뜬히 죽일 수 있으니, 자신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다.

범한은 지금껏 사고검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대종사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경도로 들어간 후 감찰원, 장 공주, 심지어는 경국 조정과 황제 폐하까지, 걸핏하면 동이성 검려에 누명을 씌워댔다. 그래서 이 대종사는 검려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도 경국의 후안무치한 사람들에게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쓴 상태였다.

범한이 이끄는 감찰원은 장 공주 때문에 동이성 검려와 그동안 목숨을 건 싸움을 벌여왔다. 외양간 길 사건을 시작으로 양측은 서로를 적으로 간주했고, 서로 여러 방법을 동원해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남에서 맞붙었을 때, 범한은 그림자를 동원해 운지란 일행을 경국에서 쫓아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고검이 자신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임을 범한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사고검이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면, 어쩌면 범한은 여러 해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운지란을 강남에서 내쫓은 후 범한은 성공적으로 황실 금고를 계승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사고검은 초강력 무력을 지닌 백치가 아닌 대단히 성숙한 정치가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고검이 과거의 은원을 내려놓고 가장 아끼는 마지막 제자 왕 십삼랑을 범한에게 파견해 자신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래서 범한은 사고검이 잘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가 사고검을 익숙하게 느낀 건 어쩌면 그가 여전히 낯선 사람이고, 깊이를 알 수 없으며, 진짜 성정을 알 수 없는 두려울 정도로 낯선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검려 안에는 무형의 압박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부상자가 발산하는 것으로, 범한은 숨 쉬기가 살짝 곤란할 정도였다.

“예전에 자네를 죽이지 않은 건, 무시해서가 아니야.”

사고검이 쉰 목소리로 갑자기 비웃었다.

“자네를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어. 단지 자네 자신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지.”

사고검이 말하기 시작하자 정원을 감싸고 있던 압박감이 살짝 해소되었다. 이에 마음이 홀가분해진 범한이 서둘러 한마디 던졌다.

“가르쳐 주시지요.”

“자네 어머니 성이 섭씨지 않은가. 그렇다면 원인은 명확한 것 아니냐?”

사고검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범한이 이렇게나 멍청할 줄 몰랐다는 듯 살짝 화를 내며 비난하듯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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