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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64화 (864/1,108)

864화 폐하의 진정한 행복 (2)

눈 위에는 붉은 매화가 피어 있었고, 눈싸움을 하던 남녀는 모두 지쳐 있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의관이 흐트러진 채 범한의 몸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의 양손을 꽉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반쯤 드러난 채 범한의 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 상황만 보면, 마치 북제 젊은 황제가 범한을 강제로 범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황제 이마에 있던 검은 머리카락은 어느새 땀에 젖어 그녀의 눈썹 위에 뭉쳐 있었고, 이에 황제는 유난히도 청초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제왕으로 경배하고 모시느라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설령 본다 하더라도 특별한 느낌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범한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진정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범한은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자극적인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강하지만 부드러움을 겸비한 여인이, 황제 신분인 여인이, 영원히 누군가가 올라탈 수 없는 여인이 자신과 이렇게 서로 몸을 맞댄 채 친밀하다는 듯 신체 접촉을 하고 있어서였다.

범한의 몸 위에 올라타 있던 황제는 그가 느닷없이 차분해지고,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장래와 북제의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온통 절망에만 휩싸여 있는 상태였다.

그녀에게 20년 동안은 힘들고 피곤한 삶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그냥 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북제 황제라는 신분은 그녀가 침대에 누워 쉬는 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자신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눈만 깜빡였다. 눈을 깜박일 때 구슬 같은 눈물 몇 방울이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려 범한의 턱에 떨어졌다. 그러자 기름방울이 불씨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황제의 눈물방울이 범한의 마음속에 불을 지펴버렸다.

“사당에서도 이 자세였습니까?”

범한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바로 지척에 있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범한의 두 손을 잡은 채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비애와 씁쓸함, 분노만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고는 범한의 눈동자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예전에 사당에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제왕의 삶을 살다가 무언가 자신만을 위한 결정을 한 것만 같았다. 그것이 정신 나가고 황당한 일일지라도 말이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더니 얇은 입술로 범한의 입을 막고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꽃송이 같은 핏물이 서서히 두 사람을 적셨다.

북제 황제에게 문득 자신이 처음 절정을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잔뜩 방황하고, 기대하고, 두려워하고, 흥분하고…… 절망했었는데.

두 사람이 입을 맞추자 하늘에서는 우레가 울리고 땅에서는 불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초원의 야수처럼 서로를 물어뜯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따스함이라든가 아름다운 느낌은 그다지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미움 속에 섞여 있는 몇 가닥 자극뿐이었다. 특히나 입술 사이에 있던 피는 두 사람 혀끝에서 넘실거리며 조금은 짜고, 조금은 축축하고, 조금은 음탕했다.

이건 뜨겁다거나 유혹적인 게 아닌, 순수한 투쟁이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전쟁이었다. 입술과 혀는 이 전쟁에서 합종책을 펼친 책사 소진 또는 연횡책을 펼친 책사 장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입맞춤만으로도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피를 보고 있는 거였다.

이건 온화한 동풍이 차갑고 거친 서풍을 압도하는 게 아닌, 서풍이 동풍을 압도하는 거였다. 입술과 치아 사이를 감도는 부드러운 향과 형상은 흉악하면서도 향긋하고 농염한 전투가 되었다.

범한은 심지와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지만 이런 향긋하고 농염한 공격을 받자 자연스럽게 북제의 젊은 황제가 자신을 올라타도록 해버렸다.

범한은 그게 싫어서 반항하려 해봤고, 양손으로 있는 힘껏 상대방의 볼기를 때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은 평소 용포 아래에 숨어 있는 여린 부분이라 누구든 결국에는 범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게 사람을 때리는 겁니까, 아니면 여인을 희롱하는 겁니까?’

청정한 방안 밖에 있는 노을은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방안 온도는 갈수록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공기 중에는 전투와 친근함이라는 이중의 숨결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서로 섞여버린 숨결 속에는 어느새 담담한 땀 냄새도 향긋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누가 누구의 혀를 깨물었는지 모르겠지만 아픈 소리를 냈고, 누가 누구의 달을 부수어 깼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콧소리가 났다. 그리고 누가 누구의 긴 머리를 흐트러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카락은 새하얀 피부 위에 흩어져 있었다.

범한의 입가에 상처가 났다. 그는 자신의 몸 위에 엎어져 있는 젊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은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와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끄응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어 그녀를 침대로 밀친 후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사납게 노려보았다.

북제의 젊은 황제는 전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매서운 눈빛으로 되받아친 후 범한의 어깨를 깨물고, 주먹으로 그를 한 대 쳤다. 그리고 몸에 힘을 주며 일어나 주도권과 통제권을 되찾아오려 했다.

황제가 일어나려던 행동을 유난히 넋 놓고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돌연 낯빛을 바꾸었다. 그러자 검려의 나무 침대가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범한이 북제 젊은 황제의 어깨를 단단히 누르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채 계속해서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눈만 주시하며 그녀의 눈동자에서 미묘함 말고 뭔가 비교적 실질적인 걸 찾으려 했다.

범한은 북제 황제의 눈에서 많은 걸 보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원한, 원망, 절망, 해탈 등등, 진득한 정욕과 옅게 깔린 혼란 같은 것뿐이다. 하지만 계산이나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전쟁은 종종 이런 양상으로 벌어진다. 그래서 상대방이 빠져든 거 같다 싶으면 자신도 상대방을 따라 함께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범한은 몸 아래에 있는 가냘픈 몸과 곡선이 필사적으로 쉼 없이 움직이고 또 계속해서 위아래로 들썩이는 걸 느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의 살갗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서 살짝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특히나 밀착을 통해 느껴지는 형체와 탱탱한 부드러움 때문에 차분했던 범한의 눈동자는 잠시 후 가벼운 연기처럼 변해 버렸다.

북제 젊은 황제가 그의 귓가에서 힘겨워하며 가벼운 콧소리를 냈다. 그러자 범한은 이내 구천(九天)으로 날아 올라가 더는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범한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그녀를 가볍게 안고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황제의 입술이 범한의 귓가를 타고 어깨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그를 사납게 물어버렸다.

순간 고통스러웠던 범한은 힘을 주었고, 그러자 통증을 느낀 황제가 견디기 힘들고 이상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무의식적으로 범한의 몸을 끌어안았다.

힘겹게 상반신을 세우고 있던 그녀는 그렇게 범한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심장박동과 자신의 무기력한 심장박동, 그리고 생소하고 복잡한 자극을 느꼈다.

조용한 방 안. 다른 소리는 없고 오로지 심장이 뛰고, 숨이 헐떡이고, 서로의 옷이 마찰하는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 간혹 주먹 날리는 소리와 두어 번의 고통스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동작은 갈수록 커졌고, 나무 침대는 더는 버티기 힘든 지경이 되었는지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갈수록 커지더니 이제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침대가 궁금해 했다.

‘아까 그 남녀는 대체 무엇 때문에 고민했던 거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보라고! 사람은 오래 살아야 고작 70살까지 산다던데, 이 짧은 시간 동안 싸울 필요가 뭐 있겠어?!’

이 남녀는 지금 이 짧은 시간과 싸우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 사랑하고 음란한 짓을 하면서 서로 소원했던 거리를 좁히고, 뜨거워 죽을 것만 같은 상대의 체온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두려워지면 갑자기 떨어졌다가 다시 서로에게 미련을 보였다.

땀방울이 얇은 이불 위로 떨어지며 옅게 두 사람을 감쌌다. 그래서 실내의 찌는 듯한 뜨거운 분위기 때문에 땀방울이 엷은 안개로 변해 방 안에서 서로 뒤엉켜 있는 남녀를 감싸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레 일어난 전투는 제일 중요한 순간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색정 가득한 풍경 속에서 옷은 눈처럼 일찌감치 녹아내리고 없었다.

두 사람은 야만스러웠던 시대로 돌아간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꼭 붙은 채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는 북제 젊은 황제가 몸을 뒤집어 주인이 되었다. 범한의 하복부 쪽에 올라탄 것이었다. 그녀가 양 손가락으로 탄탄하고 균형 잡힌 범한의 가슴을 누르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 가슴을 반쯤 가렸다.

황제가 고르지 못한 호흡과 아직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위에 있을 것이니라.”

두 사람은 온통 진창이 되어버렸다. 땀이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범한의 가슴 위로, 황제의 손 위로 떨어졌다. 자기 몸 위에 있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에게 아래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에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정신 줄을 꽉 잡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젊은 황제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인이 아닌 사내로 지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색정 가득한 순간에도 그녀는 위에 서기를 바랐다. 제왕의 몸으로 그녀는 영원히 위에 오르는 주체가 되어야지 올라타는 대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든 위에 있으려 했다.

범한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현대인이었고, 작용력과 반작용력, 상대론을 알고 있어서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올라타든, 자신이 올라타든 사실 그에게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범한에게는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반드시 상대방의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만 있을 뿐이었다.

범한에게 자신과 한 몸이 된 사람은 단순한 여황제가 아닌 분명 이름이 있는 여인이자, 자신의 여인이었다. 왜냐하면 황제란 단순한 별명에 불과한 것이고, 이름이야말로 더 많은 걸 대표하고 있어서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덧 원망과 절망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눈에서 보이는 건 승부욕 및 낯선 사물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그리고 제왕의 버릇과도 같은 명령 같은 태도였다.

* * *

어두운 방안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 얼마나 오랫동안 부대꼈는지, 상처를 주었는지, 가까워졌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입을 열고 첫 대화는 나누었다. 서로 한 차례씩 말을 건넨 거였지만 분위기는 아주 미묘하게 변한 것만 같았다.

특히나 범한이 이름을 물었을 때 젊은 황제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훑고 지나가도록 했다. 그런 후 손가락을 뻗어 어쩔 줄 몰라 하며 범한의 그림 같은 눈썹을 쓱 문지르고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지금은 짐을 두두라고 불러도 되느니라.”

“전두두?”

범한은 짧게 반문할 정신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의 하복부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 바람에 그로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산길은 비좁았다. 비록 질척하게 진창이 깔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갈 길은 험난해 보였다. 그리고 황하로 가려 했지만 얼음이 강을 막고 있어 산을 오르고 눈밭이 깔린 산을 올라가야만 했다.

범한은 한가롭게 푸른 시냇물에 낚시를 드리웠다가 돌연 배에 올라타 태양 근처를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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