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화 노을 속에서의 비밀 (2)
“자네를 공격한다고?”
젊은 황제의 동공이 살짝 수축되었다. 그리고 고하 숙조(叔祖)께서 임종 직전에 남기신 말을 다시 곱씹어 보느라 그의 낯빛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제의 존망을 왜 범한에게 의탁해야 하는 걸까? 그로서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경국 황제의 사생아가 아니었던 걸까? 설마 범한이 정말로 큰 성인(聖人)이라서?
아니지. 이 세상의 최후 성인은 경력 5년 때 눈을 감았으니, 범한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범한이 소리 내어 싸늘하게 웃었다.
“물론 고하가 계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더군요. 제 속을 제대로 틀어쥐고 있었으니까요. 하나 죽을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 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가 억측했던 길을 제가 따라서 갈지 여부입니다.”
이 말은 너무 은밀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북제 젊은 황제는 범한의 말을 더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는 어떻게든 이 모든 걸 통제할 방법을 강구해 낼 겁니다. 만약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냥 모든 걸 다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거고요.”
범한이 창밖 노을 속에서 걸어 나와 젊은 황제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간 후 살짝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는…… 제 말을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짐이 왜 자네의 말을 들어야 하느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젊은 황제는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범한이 북제 황제를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잘못을 너무 많이 저지르셨기 때문이지요. 요 몇 년 동안 북제 조정을 잘 이끌어 오시기에 역사에 다시 한 번 대단한 무주(武周: 측천무후를 이르는 말로 여황제를 뜻한다)가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 결국에는 그냥 여인이 보이더군요……. 그것도 너무 쉽게 화를 내고, 마음이 약해져서 무언가를 지탱할 수 없는 그런 여인 말이지요.”
범한의 말에 젊은 황제의 낯빛이 확 바뀌었다. 그리고 평소 때 표정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범 대인의 말이 갈수록 현묘해지는군.”
“아까 당신께서는 저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만약 사리리의 생사를 생각하지 않고 태감을 시켜 그녀를 방 밖으로 유인해 내지 않은 채 랑도에게 곧바로 공격을 하도록 하셨다면, 어쩌면 그때 저는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범한이 황제 앞에 서서 차분한 얼굴로 그의 아래턱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아녀자의 어짊을 그때 이미 유감없이 보여주셨지요. 이렇게 저를 실망시키셨는데, 제가 어찌 계속 당신과 거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황제의 눈은 갈수록 더 가늘어져 어느새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눈꺼풀 틈으로 범한을 봄으로써 그를 더 무시해주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야 자기 마음속을 차지한 무한한 공포와 갈등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와 북제 황태후가 20년 동안 힘겹게 지켜온 비밀이었다. 이 비밀을 위해 북제 조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러한 비밀을 경국 사람 하나가 지금 이 순간 담담하게 입 밖으로 내놓은 거였다.
“제가 오늘 검려로 들어온 온 목적은 사고검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 목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황제 폐하와 사적으로 대화를 좀 나눠볼까 해서였습니다.”
범한이 황제를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말해드리는데, 만약 계속 북제 황제로 남아 있고 싶으시다면, 오늘 이후부터는 몰래 저와 맞설 생각은 하지 마시고, 오히려 저와 보조를 맞추셔야 할 것입니다. 알아들으셨습니까?”
그러자 젊은 황제가 입가를 쓱 끌어 올리더니 호탕하게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역시 범한은 대단하군. 감히 짐을 위협해? 그냥 과감히 칼로 짐을 내려 치거라. 그리고 전씨 집안 자손인 짐이 눈을 찡긋하기라도 하는지 지켜 보거라.”
“폐하의 심지는 정말 탄복할 지경입니다.”
범한이 웃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매 단어를 똑똑히 말했다.
“죽이라고 말하셨다고 해서 죽일 수는 없지요. 다만 상삼호, 랑도 등 북제의 주요 중신들이 자신들이 충성을 바치고 있는 황제 폐하께서 뜻밖에도…… 여인이란 사실을 느닷없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북제는……그러니까 전씨 가문에서 딸밖에 낳지 못했으니,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요?”
젊은 황제가 범한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 그는 왜 아까 사리리가 그리 말했는지, 범한이 자신을 전혀 무서워 않는지, 또한 왜 도리어 자신이 상대방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다. 이제 보니, 상대방은 자신의 명줄을 쥐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절대적인 명줄을 말이다.
젊은 황제가 잠긴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일대 시선이다 보니, 과연 말하는 게 우둔하니 미련한 기색이 좀 있군.”
상황이 이리 되자 범한도 상대방의 냉정함과 당당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손가락을 튕겨 황제의 상투가 풀어지도록 했다. 그러자 검은 머리카락이 황제의 양 어깨 위로 폭포수처럼 흘러내렸고, 그에게서는 순간 나긋나긋한 느낌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내 조용했던 실내에서 ‘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타고 어깨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북제 황제는 자신의 부드러운 모습이 드러난 순간 조금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마치 내면 깊은 곳, 제일 밑바닥에 있던 어둠이 범한의 머리를 푸는 동작을 따라 흩어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는 자신의 마음을 콕콕 찌르며 압박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그녀는 포기했고 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이렇게 부드럽게 흩날리는 게 은근히 기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그녀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범한이어서였다. 그녀는 일찍이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사랑했고, 동시에 무척이나 미워했다. 그래서 황제는 그가 미혼향에 취해 있을 때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범한에게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었다.
젊은 황제는 이미 머리가 멍해져 있었다. 그녀의 잠재의식이, 어쩌면 일찌감치 생각했던 것일 수 있지만, 만약 이 세상에서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아채게 된다면 그게 범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범한에게 자신의 모든 걸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때 범한은 혼미한 상태여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젊은 황제가 담담하고 우수에 찬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평소에는 보기 힘든 여인의 분위기를 풍기고, 인생에 딱 한 번 여성으로 돌아가고. 이 모든 게 범한 앞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어쩔 줄 모르겠는 환희를 이를 악 물고 강제로 참았다.
그런데 범한의 대벽관에 의해 ‘쓱-!’ 하는 소리가 울린 거였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쉽게 찢어진 젊은 황제의 옷 앞섶이 벌어지면서 그녀가 사람들에게 절대 드러내지 않던 신체의 일부가 드러나 버렸다.
이에 그녀는 순간 바보가 되어 버렸다.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고, 강한 충격과 위험한 자극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빠진 모습으로 범한의 눈을 응시한 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양 손은 분노로 인해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찌나 심하게 떨렸는지 아래에 있는 침대에서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젊은 황제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지 않았다. 봄빛이 차츰 흰 천으로 스며들고, 온 방 안에 널리 퍼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분노와 미움이 담긴 눈을 범한에게서 떼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는 범한이 자신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는 너무 혐오스럽다는 기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어 그녀는 범한에게서 발육과 관련한 권고 사항 같은 걸 듣기까지 했다.
젊은 황제는 난처했고 그로 인해 분노가 일었다.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점점 번져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 버렸다. 그러자 귀, 목 아래 쪽, 심지어는 흰 천으로 가려져 있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도 모두 유혹적인 옅은 붉은빛이 돌기 시작했다.
창밖에 노을이 짙어지고 있었지만, 젊은 황제 몸을 감싼 붉은색이 훨씬 선명하고 자극적이라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이 말 안 듣는 심부름꾼처럼 젊은 황제의 턱 아래쪽으로 불쑥 나아가더니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뗐다.
황제 목에 붙어 있던, 위장용 울대뼈가 떨어져 나왔다. 비록 가슴에 여전히 흰 천을 두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울대뼈를 떼고 나니 외모가 아까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 점차 젊은 여인의 모습을 갖춰가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그녀의 눈썹이며 눈을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황제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특이한 보석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조용히 살펴보기만 했다. 여인의 몸으로 어떻게 천하 사람들을 20년 동안 속여 왔으며, 또한 20년 동안 황제로 지내면서 어떻게 그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범한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눈썹은 거칠게 자라도록 어릴 때부터 다듬어 놓은 거였다. 그리고 눈꼬리 부분에는 눈동자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더 안정적으로 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약물을 발라 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빛 처리며 행동하는 방법은 어려서부터 황태후로부터 훈련을 받은 게 분명했다.
천하의 최대 비밀에 깜짝 놀란 범한이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간 건 연구 정신이 발휘된 때문이었다. 그래서 분노한 젊은 황제가 침대에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와중인데도 그녀의 눈에 들어차 있던 분노, 미움, 냉담함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다는 건 범한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북제 황제는 여인이었다. 범한은 이 사실을 3년 전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조용한 방 안에 함께 있지 않았다면, 범한은 평생 그 사실을 증명할 수도, 이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범한은 북제 황태후와 북제 황제 모자(?)의 최대 명줄을 쥐고 훗날 이용할 수 있게 된 건 차치하고, 이 경천동지할 비밀을 밝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사발보다 작은 주먹이 범한 눈앞에 나타났다. 주먹 쥔 손은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그런데 심지어는 은근히 푸른색 혈관까지 드러나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대단히 큰 힘이 실린 주먹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팍!’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그리고 범한의 양 콧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범한은 순간 화가 났다. 그래서 코를 움켜쥔 채 아직도 자기 앞으로 쭉 뻗어 있는 젊은 황제의 주먹을 매섭게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몸을 보고 흥분해서 코피 쏟은 건 아니잖아. 그러니 대단히 창피한 일을 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9등급 상의 실력자인 범한이 뜻밖에도 랑도로부터 어설프게 무공을 배운 여황제에게 코를 얻어맞은 건, 사실…… 충분히 창피한 일이었다.
만약 범한이 젊은 황제의 눈썹, 눈, 가슴에 대한 탐구욕을 너무 넋 놓고 또 너무 놀라워하면서 발휘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주먹에 맞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황제가 천천히 주먹을 거두어드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지금껏 살면서 짐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경멸을 당해본 적 없다. 하여 짐을 경시한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황제가 당당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그런 후 타고난 제왕의 얼굴 위에 담담한 조소를 곁들였다. 그러자 화를 내지 않는데도 위엄이 엿보여서 확실히 아까보다는 기세등등해져 보였다. 하지만 황제의 앞섶은 모두 열려 있었고, 가슴을 가린 천은 황색의 허리띠 위쪽까지 힘없이 늘어져 있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이에 황제의 몰골은 확실히 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범한은 웃기는커녕 코피를 닦아낸 후 차분하게 훈계했다.
“이 주먹은 계산에 넣지 않겠습니다. 하나 이후로는 다시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당신께서는 여인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