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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61화 (861/1,108)

861화 노을 속에서의 비밀 (1)

범한의 말에 북제 젊은 황제는 소문으로만 듣던 눈먼 대사를 연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도 최근 2년 간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국의 강한 압박 때문에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른 터였다. 북제 황제가 놀란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마나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점점 노기가 차오르고 깊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참을 수 없었는지 결국 그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포효했다.

“네 녀석이······ 감히 짐을 치다니!”

범한은 당연히 감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황제를 인질로 잡기까지 했으니, 몇 대 때린 것쯤이야. 젊은 황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단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범한이 손가락으로 자신에게 딱밤을 먹이다니. 이건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전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북제 황제 입장에서는 분명 굴욕적인 타격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황제가 화내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맛살이나 찌푸렸다.

“요 몇 년 동안 당신과 저는 비교적 죽이 잘 맞는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범한은 당신의 북제에 적지 않은 이득을 주었는지 자문까지 해보았습니다. 한데 당신께서는 매번 절 죽일 생각 뿐이셨지요. 정말 너무한다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젊은 황제는 여전히 이마가 아프고 굴욕적이라고만 느낄 뿐이라 범한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쳐다보기만 할뿐이었다. 마치 저 놈은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왔기에 황제를 향한 경외심이 저리도 하나도 없을까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어린 사자처럼 이를 악 물고 있는 황제의 모습에 범한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그냥 당신께서 저지른 큰 잘못을 짚어주려 했던 것뿐입니다!”

범한이 갑자기 눈을 감더니 한동안 생각을 해본 후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제가 당신께 받은 인상은 심계가 깊은 군주란 점이었습니다. 하나 최근 2년 간 있었던 일을 통해서는 너무 이익추구에만 급급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세상이란 게 참 묘한 곳인데 당신께서는 그렇게 욱해서 행동하시니.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북제 젊은 황제는 형세가 사람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상대방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은, 더군다나 검려에서 줄곧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 대종사며, 신하들은 자신을 구하러 검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을 고려해 어떻게든 마음속 노기를 억눌러야 했다. 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짐이 하는 일인데, 어찌하여 자네에게 해명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 누구에게도 해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 저에게만큼은 해명을 하셔야 합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잠시 싸늘한 빛이 번쩍였다.

“저는 폐하께 이익을 많이 가져다 드렸지요. 그러니 이걸 투자로 보고, 당신께서는 저라는 돈줄을 죽일 생각을 하시기보다는 보고를 하셨어야 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담판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북제 젊은 황제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천천히 대꾸했다.

“요 몇 년 동안 자네 도움이 컸다는 건 짐도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하나······.”

“하나, 뭡니까?”

“하나 자네는 어찌되었든 경국 황제의 사생아이지 않더냐.”

젊은 황제가 자조적으로 잠시 웃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손을 허리 뒤쪽으로 보내 뒷짐을 졌다. 이 동작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행해졌다면 분명 멋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는 혼란스러운 일을 당해 어질어질한 상태였고, 복사뼈까지 다친 후였다. 그러니 어찌 안정적인 자세로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황제는 “아야!”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져 버렸다.

범한이 손을 뻗어 그를 침상으로 끌어올려준 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젊은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네는 경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경국 황제의 사생아지. 그러니 자네가 과거 협의를 이행할 성의를 지녔는지에 대해 짐이 믿든 말든 그건 상관이 없다. 모후와 조정 대신들에게는 그 뜬구름 같은 희망을 경국의 권신에게 맡긴다는 게 불가능 한 일이니 말이다.”

황제가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나와 같은 북제 사람이 아니니라. 하여 고하 국사 사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대(大)북제의 백성이 어떤 시절을 지냈는지 모를 것이다. 경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쳐들어 올 테고, 언제든 출병해 침입을 해올 것이지 않더냐. 짐이 비록 오랫동안 계획을 짰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하여 우리의 국력으로는 수년 간 이어지는 큰 전쟁을 버티기 힘들지······. 이런 상황에서 과거의 정분이니 약속이니 하는 건 모두 허망한 것에 불과해. 하여 짐은 내 백성들에게, 심지어는 동이성에게는 희망을 걸지언정 자네에게는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느니라.”

차분하게 듣고만 있던 범한은 실은 무지 간단한 이유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북제 젊은 황제가 해당타타라고 해도, 심지어는 진평평과 부친 대인이라 해도, 범한이 북제를 도와 경국에 대항해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거였다.

매국노가 된다 해도, 어찌되었든 무언가 이득이 되는 게 있어야 했다. 그런데 현재 범한은 경국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경국의 이익을 팔아먹는다면, 북제 황제에게 용좌를 내놓으라는 요구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범한이 잠시 자조적으로 웃으며 세상 사람들도 그건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물며 북제의 군민(君民)입장에서는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 거였다. 다만 범한 역시 경국의 이익을 팔아 북제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단지 가능한 전쟁이 일고 피가 강을 이루게 될 상황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 온 힘을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물론 이홍성이 정주 대장군부에서 했던 비난처럼 이는 너무나도 유치하고 황당한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어떻게 보면 기본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북제가 범한이라는 경국 권신을 죽이고, 더 나아가 동이성을 자기네 전씨 가문 수레에 꽁꽁 묶으려 하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그렇다면 말로만 듣던 맹인 대사에 대해서는? 북제 젊은 황제는 그 사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단지 맹인 대사의 행적이 너무 신묘해 그가 아무리 범한 뒤에서 버티고 있는 대종사라 할지라도 경국 황제와 경국 황제의 군대가 북제에 미치는 위협보다 덜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생각에 빠져 있자 북제 황제는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뿐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도 눈을 감고 자신의 처지 및 이어 발생할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북쪽의 제왕과 남쪽의 신하가 이렇듯 조용한 방안에서 마주 앉아 각기 다른 생각이나 했다. 그러다 부지불식간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검려 밖에 핏빛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노을은 검 구덩이인 검갱 위와 그 안에 있는 오래된 검의 잔해를 비추었다. 그러자 모든 검이 천추(千秋)의 혈에 물이 든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해풍이 불고 비가 오랫동안 내려도 깨끗이 씻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였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말없이 큰 구덩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구덩이 안에 있는 수많은 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고검이 세간에서 경외 받고 있는 검법과 실력이었다. 그리고 천하 만민의 마음속에서 검려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였으며, 무수한 검객의 죽음과 누가 들어도 피를 들끓게 하는 전기(傳奇)였다.

무엇이든 명성이나 지위를 안정적으로 존속시키려면, 검과 피의 세례가 필요한 거였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후세에게 더 좋은 장래를 물려 줄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남에서 북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걸까?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범한에게는 아직 판별하거나 판단한 능력이 없었다. 설사 언빙운과도 토론도 해봤고, 이 문제를 두고 이홍성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범한은 여전히 판단할 수 없었다.

천하의 분리와 통합 중 어떤 게 더 좋은 걸까? 가늘고 길게 아픈 게 나을까? 아니면 짧고 굵게 아픈 게 나을까? 고맙게도 그건 사학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였고, 현 세상을 살고 있는 생물들이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생물들 입장에서는 지금 사는 순간만 좋으면 그만 아니던가. 이건 생물이면 지니는 이기적인 본능이고 말이다.

하지만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범한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 사후에 홍수가 세상을 덮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때가 가장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와 닮아 있어서였다. 꽃, 나무, 풀, 곤충, 새, 사람, 시, 그림, 술 황금이 있었고 아프지도 않고, 재난도 없고, 피 흘리는 일이 없고······.

지금의 범한은 자신을 경국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며, 예전처럼 국제주의를 표방하던 전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평화주의자로 자라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스파이더맨이 계속 흥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감찰원으로부터 교육받고, 또 여러 해 동안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다 보니 범한은 평화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얼핏 보면 황당해 보이는 일이고 불가사의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병상에 누워 죽을 때만 기다리다가 생긴 집념이 그의 전생, 심지어는 두 번째 생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알기에 생명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것도 아는 것이었다.

* * *

“당신께서 계속 잘못을 저지르시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우리 위대한 경국이 당신에게 너무 큰 압박감을 주기 때문이지요.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요 몇 년 간 정복군을 크게 일으키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 한 발짝씩 전진하고 계시기는 하지요. 모두 훗날 큰 전쟁을 치르기 위한 준비 작업입니다. 그분께서는 정정당당한 길을 가고 계시는 겁니다. 자신께서 이미 대종사란 존재를 제거하셨으니, 자연스레 그분께서 지닌 대종사의 실력으로 천하를 어지럽힐 이유가 없으신 거죠.”

“그분은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당신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다.”

범한은 창밖에서 들어오는 노을이 갑자기 눈을 찌르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았다.

“사실 저는 우리 황제 폐하를 이해합니다. 20여 년 전에 북벌을 완결 짓지 못한 건, 그분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좌절이었어요. 그분께 대종사란 괴물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설령 그분께서 직접 대종사가 되시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분은 머리도 좋으시고 책략도 세우실 줄 아세요. 그러니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모든 걸 정복할 수 있으십니다. 그분은 개인이 지닌 무력을 진심으로 경시하고 가치가 없는 거라 생각하고 계세요······. 하나 우선 대종사부터 깨끗이 처리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그런 가치 없는 힘이 극한까지 방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잠시 자조적으로 웃었다.

“고하는 죽기 직전에 우리 황제 아버지의 집념을 제대로 봤을 것입니다. 하여 서량과 우리 조정에 차근차근 바둑돌을 놓아가며 우리 황제 폐하와 마지막으로 큰 판으로 겨루려 한 것이겠지요······. 하나 그도 잊은 게 있더군요. 이미 죽은 몸이니, 사후 발생할 세세한 일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그가 희망을 걸었던 해당타타와 당신께서는 모두 용서를 빌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질렀지요.”

잠자코 범한의 분석을 듣고만 있던 북제의 젊은 황제가 여기까지 듣고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잘못 말인가?”

“두 사람은 저의 분노를 얕봤습니다.”

범한이 뒤로 돌아 젊은 황제를 바라보며 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감히 확신하건데, 고하가 죽기 전에 둔 그 두 개의 바둑돌은 모두 마지막에 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두 번씩이나 저를 죽이려 시도하셨고요. 성공을 하셨든 아니든, 고하가 당신께서 한 행동을 알았다면 분명 무덤 속에서도 화가 나 한 차례 더 죽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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