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화 잘려나간 버드나무와 검려로 들어가기 (2)
두 사람의 대화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북제 젊은 황제도 본인의 신하들 앞에서 범한의 생각을 드러나게 할 수는 있어도 모든 상황을 바꾸기는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범한의 다음 수를 간파해내지 않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앉아 있고 싶다고? 이 위험한 국면에, 더군다나 이들 고수들의 추격을 걱정 않고 범한이 앉아 있을 수 있는 데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북제 젊은 황제가 갑자기 오두막 담벼락에 걸린 세화(歲畵: 설날 붙이는 그림)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뛰고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얇은 입술을 살짝 열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에게 더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겹겹이 둘러싼 이들이 바깥쪽으로 흩어지는 찰나를 틈타 범한은 차분한 표정으로 뱀이 길을 찾듯 왼손 손끝으로 북제 황제의 손아귀를 꽉 잡았다. 그리고 잔재주로 황제의 엄지를 비틀어 그의 오른쪽 팔에 극심한 통증이 주는 것으로 그가 더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범한이 전광석화처럼 황제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 바깥쪽에 있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줄곧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왕 십삼랑이 손바닥으로 버드나무를 한 대 쳤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그가 온몸을 극심하게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왕 십삼랑은 체내 독이 완전히 빠지지 않은 상태라 평소보다 무공 실력이 한참 떨어져 있었지만 체내 정기만큼은 여전히 충분히 흘러넘치고 있었다. 특히나 이 순간만큼은 온몸을 움직여 평소처럼 용맹한 기세를 떨친 터라 현장에서는 순식간에 일대 파동이 일었다.
왕 십삼랑은 갈수록 몸을 더 심하게 떨었고 그의 손바닥 아래에 있던 버드나무도 갈수록 심하게 떨렸다. 그가 숨을 세 번 쉬고 나자 갑자기 ‘쩍!’ 하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버드나무 밑동이 소리와 함께 잘려버린 거였다.
왕 십삼랑이 큰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버드나무를 거꾸로 들었다. 그리고 평생 쌓은 공력을 두 손에 집중시키고 나무를 검 삼아 사고검 검법에서 가장 위력적인 초식을 펼쳤다.
그러자 나무줄기는 검이 되고, 나뭇가지는 칼날이 되고, 나뭇잎은 검 끝이 되어 모두를 휩쓸어 버렸다.
* * *
끄응, 하는 소리가 수도 없이 많이 울리고, 먼지가 크게 일었다. 정확히 셀 수는 없었지만 적지 않은 고수들이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피하고, 또 어떤 이는 나무를 내리치며 하늘에서 날아온 버드나무를 향해 자신들의 절기(絶技)를 펼쳤다.
어마어마한 기세와 위력을 담고 있는 버드나무와 맞서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느새 본인에게 다가와 뼈를 부러뜨리고 근육을 산산조각 낼 수 있어서였다.
검려를 봉쇄하고 있는 포위선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허둥대지 않았다. 랑도와 운지란은 수많은 고수를 공격하고 있는 버드나무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두 고수는 범한의 일거수일투족을 싸늘하게 주시하고 있다가 별안간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되어 범한을 공격했다.
왕 십삼랑이 버드나무를 부러뜨린 찰나, 범한도 운기조식을 마치고 다시 북제 황제를 제압했다. 그리고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켜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랑도와 운지란이 범한 곁에 도착했을 때 왕 십삼랑의 버드나무는 범한의 몸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러자 범한이 허공에서 발길질을 해 정말 멋지고 묘하게 몸을 반쯤 들어 올리고는 발끝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가볍게 밟고 올라섰다.
나뭇잎들이 ‘후득!’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실처럼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리고 이어 나뭇가지 하나가 부드럽게 휘청이며 무한한 탄력과 힘을 가진 것처럼 위쪽으로 튕겨져 올라가 범한의 몸을 빛처럼 움직이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범한은······.
검려 대문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 * *
랑도가 양손을 서둘러 뻗었다. 하지만 ‘쓱!’ 하는 소리와 함께 범한의 옷자락만 잡았을 뿐이었다. 그의 양팔에 걸려 있던 곡도는 공중으로 날아가 잔인하게 상대를 베고는 모두 빈터로 추락하고 말았다.
한편 운지란은 공중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공중제비를 돌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물이 흐르듯 부드럽게 날아가도록 했다. 그러자 검은 가까스로 범한의 오른쪽 어깨를 찢었고, 범한에게서는 핏방울이 떨어졌다.
왕 십삼랑이 안고 있는 버드나무는 길기도 길고 크기도 굉장했다. 그리고 나뭇가지는 너무 빠르게 움직여 범한을 쳐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참다가 급습에 나선 랑도와 운지란이라는 양대 고수는 빠르게 지나쳐갔다.
‘팍!’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검려의 문이 범한과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북제 젊은 황제를 꽉 잡고 바람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랑도와 운지란이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 올렸다. 결국 두 사람은 푸른색의 빛처럼 번쩍이며 검려 안으로 들어갔고, 범한의 등에 찰싹 들러붙듯이 해 전력으로 공격을 펼쳤다.
왕 십삼랑이 버드나무를 손바닥으로 부러뜨리고, 범한이 나비가 되어 버드나무 가지 위로 올라섰을 때, 랑도와 운지란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도 함께 공격에 나선이가 후회하고 두려워 한다는 걸 고스란히 느꼈다.
이제야 범한이 산원에서 발각되고도 퇴각하지 않고 왜 도리어 검려로 도망 왔는지, 그리고 왜 우연히 북제 황제를 제압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어서였다. 이제 보니, 범한의 목표는 처음부터 검려였다. 검려로 들어가 사고검을 만나기 위해 오늘 이곳에 나타난 거였다.
공중에 있는 랑도에게서 살벌하게 휘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의 팔목에 있던 금속 사슬이 땡그랑 소리를 냈고, 곡도 두 자루가 두 송이의 황금색 꽃처럼 범한 등으로 내리 꽂혔다.
랑도는 범한에게 잡혀 있는 황제 폐하를 믿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비록 나이가 어리기는 했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범인의 수준을 뛰어 넘는 안목과 지혜를 지녔음을 증명해 온 터였다. 이에 범한이 황제 폐하를 다치게 할 리 없다고 판단한 랑도는 도박하듯 이번 공격을 감행했다. 범한이 어쩔 수 없이 황제 폐하의 손을 놓도록 말이다.
황금색의 빛 두 개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범한을 향해 내리 꽂혔다. 한편 운지란 손에 들린 장검은 움직임이 수려하기 그지없었다. 두 개의 황금색 빛 사이를 평온하게 파고들더니 어느새 범한의 뒷목으로 향했다. 운지란의 검이 폭발하듯 빛을 냈다. 그러자 은색의 뱀이 혀를 날름거리듯 검이 맹렬하게 살의를 뿜어냈다.
방금 전 운지란이 보여준 검의는 사실 바로 전 왕 십삼랑이 버드나무를 가로로 휘두를 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한 거였다. 이는 사고검 검법의 정수가 응축된 것으로, 오로지 앞만 보고 전진하는 공격 방식이었다.
그런데 운지란이 이번에 공격을 감행한 건 랑도와는 정 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북제 황제의 생사를 신경 쓰고 있었고, 북제 황제의 판단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범한을 검려로 들일 수 없는 제일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스승님께서 검려 안에 계시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그래도 9등급 상의 강자 두 사람은 서로 같은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모두 평소에는 꽁꽁 숨겨 두었던 절정의 초식을 동시에 사용했다. 그들은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북제 황제가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지금 활짝 열려 있는 범한의 등을 공격한 것이었다.
네 사람이 돌을 깔아 평평한 검려 앞마당에서 하늘에 떠 있는 새처럼 춤을 추었다. 그리고 시간은 마치 정지 된 것만 같았다.
범한은 왼손으로 북제 황제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 손으로는 검은색 비수를 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뒤쪽에서 훅 들어오는 살벌한 기운을 저지할 수 없었다.
범한 뒤쪽에서 운지란과 랑도가 날아왔다. 칼과 검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기운이 서로 충돌해 누가 들어도 무서울 정도로 지지직, 하는 싸늘한 소리가 났다.
그러니 이 순간 범한은 황제를 버리고 몸을 돌려 방어를 하지 않는다면 죽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범한이 살기 위해 몸을 돌린다면 그는 크게 다치게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북제 황제는 분명 그의 통제 범위에서 벗어나게 될 터였다.
그래서 범한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았다. 원래 날아가던 궤적을 따라 오두막의 두 번째 문을 향해 돌진만 할뿐, 뒤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곡도와 검은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경도를 떠나 동이로 오고, 또 산속 거처로 들어갔다가 검려까지 쳐들어 온 건 모두 어떤 판단과 의욕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그동안 상대방이 여러 차례 성의를 보였으니 지금 이 상황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라 믿었다.
* * *
이번 일은 이미 운과는 무관했다. 온전히 범한의 천하 국면에 대한 판단과 사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그 늙은 괴물을 향한 믿음과 연계된 거였다.
일은 범한이 바라는 대로 흘러갔다. 곡도와 검이 그의 등에서 반자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을 때, 앞쪽 세 자 떨어진 곳에 있는 여닫이문이 찌그덕 소리와 함께 열렸다. 검려의 두 번째 문이 도망 중인 범한에게 열리며 그를 맞아준 것이었다.
범한이 북제 황제를 데리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자 여닫이문이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혀버렸다. 랑도와 운지란을 바깥에 내버려 둔 채, 그리고 곡도와 장검도 바깥에 묶어둔 채 닫혀버렸다.
오두막의 문은 대개는 상징적 의의의 분리대일 뿐이었다. 건초와 나무 막대로 만들어진 대단히 연약 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문이 중요한 순간에 뒤쪽에 있는 두 고수를 막아 범한을 도와준 거였다.
그런데 이런 문이 어떻게 눈이 벌겋게 되어 달려드는 랑도와 운지란을 막아줄 수 있는 거지?!
* * *
한편 검려 밖에서는 일대 혼란 인 상태였고, 십여 개의 빛이 여기저기에서 번쩍이며 버드나무 기둥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 왕 십삼랑이 버드나무를 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긴장한 모습으로 검려 대문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랑도와 운지란이라는 두 강자가 범한을 잡기 위해 오두막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여서였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모두를 깜짝 놀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만드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두어 차례 끄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람 형체 두 개가 처참하기 짝이 없게 날아서 돌아왔다. 그 형체는 바로 랑도와 운지란이었다. 검려로 들어갈 때 두 사람의 기세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정말 낭패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보이는 건 랑도가 공중에서 몇 차례 몸을 회전시키는 모습뿐이었다. 하지만 온몸의 공력은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고, 그의 곡도들은 빗물처럼 그의 온몸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하고 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황금색 빛이 그의 몸 앞에서 번쩍였다.
운지란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공격을 멈추었다. 그런 후 한쪽 무릎은 살짝 들고 다른 쪽 다리는 뒤쪽으로 길게 뻗은 후 검을 미간 앞에 수평으로 가져다 대는 지극히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이후 그는 감히 기를 이용한 공격은 하지 못하고 오로지 체내의 순수한 정기만 가지고 가까스로 저항하며 빠르게 후퇴했다. 잠깐이라도 감히 그 자리에 머물지 않은 거였다.
랑도의 공중회전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고, 두 개의 곡도는 갈수록 바삐 움직여 결국에는 두 줄기 빛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이내 크게 한 차례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곡도들이 아래쪽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풉!’ 하며 숨이 막히는 소리가 들린 후 랑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나뭇가지 하나가 랑도의 곡도에 두 동강이 나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편 랑도는 발 한 쪽을 뒤로 빼서 몸을 지탱했고, 양쪽 눈썹을 씰룩이며 뒤로 밀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했고, 결국에는 그 나뭇가지에 담겨 있던 무한하고 살벌한 살기에 심맥을 다쳐 피를 뿜고 말았다.
한편 운지란은 랑도보다 훨씬 빨리, 더 철저하게, 더 공손한 태도로 후퇴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검으로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15장 정도의 거리를 후퇴했고, 마지막에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양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검을 들고 있었다.
그의 검에는 파릇파릇한 나뭇잎이 곧 떨어질 것처럼 잔뜩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