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화 산속 거처의 여자와 황제의 마음 (3)
“사고검의 태도가 너무 애매해요. 짐도 그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을 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북제 황제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자 그의 눈에서 싸늘한 기운이 쌩쌩 불었다.
“우리 조정과 경국은 필시 큰 전쟁을 치러야 해요. 범한이 죽으면 경국 황제는 분명 대로해 출병할 겁니다. 그렇다면 동이성은 도리어 우리 조정에 기울 수밖에 없어요.”
“전쟁이 일면 어찌 수습하시려고요?”
랑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 갔다.
“범한이 동이성에서 죽으면, 경국 황제는 분명 우리에게 그 대가를 받아내려 할 것입니다.”
“한데 범한이 죽지 않는다면 어쩐다?”
북제 젊은 황제의 눈빛이 갑자기 갈피를 잡지 못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자가 전쟁이 일어날 걸 막을 수 있을까? 짐의 위대한 북제는 아직 준비를 마치지 않았으니, 경국을 도발하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짐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동이성은 분명 경국에게 먹힐 것이고. 그때가 되면 짐의 제국은 기세 면에서 더 쇠락하게 될 터이고, 더는 정세를 뒤바꿀 수 없게 되겠지.”
북제 황제는 아직 나이는 젊었지만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잘 짰다. 그런 북제 황제가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짐은 범한에게 기대를 걸었었지요. 하나 훗날 꼼꼼히 따져보니, 우리와는 동류가 아니니 필시 다른 생각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어요. 또한 그는 경국 황제의 사생아가 아닙니까. 하여 그가 어찌 우리 북제를 생각해줄 리 있겠습니까? 특히나 최근 몇 년 동안 짐이 그를 세세히 지켜본 바, 정주를 소홀히 한 때문에 그자의 생각을 적어도 하나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지금의 그는 경국 황제의 적수가 되기에는 한참 모자라더군요. 더군다나 경국 황제의 야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없고 말이에요.”
랑도가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천일도의 윗자리에 있는 그로서는 정주와 청주에서의 일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고, 적지 않은 청산 제자들이 범한의 감찰원에게 죽임을 당한 터였다. 한참 후 랑도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타타가 어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황제의 눈에 망연자실함이 스쳤다.
“작은 사고가 만약 짐과 함께 하는 중이라면, 어쩌면 범한을 죽였겠지요.”
바로 이때, 살짝 날카로운 소리를 지닌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소리를 낮추어 보고를 올렸다.
“리 귀비에게 황명을 전했나이다. 화원으로 오라는 명을 전하였으니 방 안은 비어 있습니다.”
“하도인과 검려 쪽 고수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몸을 숨겼으니, 언제든 공격할 수 있습니다.”
태감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아까 방으로 들어가 사리리에게 명을 전할 때 적잖이 놀란 게 분명했다.
랑도는 그런 태감의 모습을 못 봐준 척 했다. 그리고 반짝이던 눈빛을 바로 거두어들이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신이 가보겠나이다.”
북제 젊은 황제가 살짝 턱을 당겼다. 방 안에 정말로 범한이 있는데 랑도가 직접 출격하지 않는다면, 하도인과 검려 고수들이 나선다 할지라도 범한을 잡는 데는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랑도가 방으로 향했다. 북제 젊은 황제는 산속 거처 문 옆에 서서 오두막이나 바라보았다.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랗게 뜬 그의 눈에서는 복잡한 감정들이 수도 없이 스치고 있었다. 제왕의 위치에 있다 보니, 그는 언제든 어쩔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설령 잔인하다 할지라도, 잔인한 일을 당하는 첫 번째 대상은 거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이었다.
사리리가 태감의 인도를 받으며 황제 곁으로 왔다. 그리고 살짝 이상하다는 듯 황제의 뒷모습을 쓱 바라보았다.
북제 황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미소 지은 얼굴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여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까 리리의 향긋한 혀에서 살짝 씁쓸한 맛이 돌았어. 또 조용한 방 안인데도 뜻밖에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리리의 부끄러운 기색을 봤고. 만약 그런 게 아니었다면, 고 녀석이 함부로 산속 거처까지 잠입한 걸 몰랐을 거야.’
사리리는 황제의 싸늘하게 비웃는 눈빛 속에서 많은 걸 알아차려버렸다. 마음 한편이 서늘해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리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북제 젊은 황제는 이유 없이 화가 불쑥 치솟았다. 이에 잇새에서 한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그런 식으로 짐에게 보고하는 건가?”
마지막 세 단어는 어조가 고조되어 있었다. 이때 내관들은 정원 밖을 에워싸고 있었고, 검려와 북제 고수들은 그 방을 단단히 포위한 상태였다. 그래서 북제의 젊은 황제는 범한이 자신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사리리가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리리는 황제 폐하께 면목 없는 짓을 한 바가 없습니다.”
북제 젊은 황제의 낯빛이 점점 싸늘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해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하는 게 짐에게 면목 없는 짓을 한 거란 말이냐? 설마 그자가 짐을 죽이면, 그때는 면목이 서는 짓을 한 것이더냐?”
사리리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말했다.
“하나 안타깝게도 그자는 이제 곧 죽을 것이니라.”
황제가 이 말을 할 때 사리리는 조금 전의 놀라 경황이 없던 상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범한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던 터였다. 이에 설령 랑도 대인이 검려 고수들을 데리고 들어가 범한을 제압해도, 범한은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사리리가 안타깝다는 모습으로 북제 젊은 황제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황제 폐하, 만약 제가 폐하라면 범한을 놓아줄 것입니다. 그를 정말로 잡으려 하신다거나 죽이려 하신다면, 그가 죽기 직전에 경천동지할 일을 폭로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사리리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살짝 어리둥절했다. 바로 이때 산원의 정원에서 느닷없이 광풍이 불었다. 흙바람이 크게 인 가운데 검은색과 붉은색 중간 즈음으로 보이는 형체 하나가 보였다. 바람 속에서 튼튼한 바위를 뚫고 나온 것 같은 형체가 젊은 황제의 마르고 약한 몸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젊은 황제의 눈동자가 순간 수축되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안에 그 형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똑똑히 확인하고는 속으로 깜짝 대경실색해버렸다.
‘내가 교묘하게 계획을 짜서 랑도 스승님과 하도인, 검려 고수들에게 한꺼번에 공격하도록 했는데. 설마 저자 하나 못 막은 거야?’
말로 해결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상대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빨랐다. 하지만 그는 제왕이라 그런지 위험이 닥쳤는데도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 그 형체에게 휘둘렀다.
‘땅!’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검과 칼이 서로 부딪혔는데, 검은색의 비수가 북제 황제의 검을 가볍게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사람 형체는 북제 황제의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숲으로 들어가듯 사람 형상이 황제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건 맑고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넣은 것과 같은 일이었다.
깜짝 놀란 황제에게서 나무 사이에서 나는 파도 소리가 나고, 맑은 파도가 겹겹이 일기 시작했다.
* * *
범한이 입으로 피를 뿜어 젊은 황제의 온몸을 피로 적셨다. 검은색 비수는 천자가 지니고 있던 검을 가볍게 부수어 버렸지만, 그 가벼운 부딪침이 있을 때 범한은 자신을 겨누고 있던 강력한 쇠뇌의 화살에 맞아 심맥을 크게 다쳐 피를 한 가득 뿜고 말았다.
고수 다섯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도 범한이 도망칠 수 있었던 건 그의 능력이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태감이 사리리에게 황명을 전하러 방으로 왔을 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때문이었다.
북제 황제가 방 안에 누군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는 범한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깊이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사리리가 산속 거처에서 두어 발자국 떠나는 순간 범한은 하도인의 음험한 공격을 맹렬한 기세로 막고, 검려 제자들의 서늘한 검의를 피하며 포위를 뚫었다.
한데 반 발자국 빨리 움직인 덕분에 범한은 제일 위험한 순간도 잠깐만 맞게 되었다. 도망치는 도중에 랑도와 마주치긴 한 거였다. 그런데 만약 방 안에서 랑도의 공격을 받았다면 그는 아마 도망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랑도와 손바닥을 한 차례 맞부딪힌 후 범한의 몸은 사선으로 날기 시작했다. 랑도 역시 정기에 영향을 받아 두 다리가 아래로 내려앉으면서 잠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때 범한 앞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산으로 올라가는 것, 다른 하나는 오두막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두 번째 길을 선택하는 건 의심할 여지없이 위험한 행동이었다. 운지란과 검려의 두 번째 제자가 산 아래에서 지키고 있어서였다. 만약 빠져나갈 수 없는 지경이 된다면, 범한에게 제아무리 하늘로 솟아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살아남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북제와 검려 고수들의 예상을 깨고 범한은 공중에서 매처럼 매섭게 호선을 그리며 몸을 돌리더니 곧장 산속 거처의 깎아지는 듯한 절벽을 향해 돌진했다. 그런데 그 절벽 아래에는 무도 성지 중 한 곳인······ 검려가 있었다.
범한이 이와 같은 모험을 선택한 건 직성이 풀리지 않아서였다. 이리 큰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사고검을 만나지 못하고, 북제 젊은 황제 쪽과도 마주치지 못해서였다.
그런데 하늘은 확실히 범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가 도망칠 때 작은 정원 쪽으로 가게 했고, 산속 거처 문 옆에서 평범한 공자처럼 변장하고 서 있는 북제 젊은 황제도 발견하게 한 거였다.
* * *
선혈이 북제 황제 얼굴에 가득 뿌려졌다. 범한은 그에게 바짝 다가가게 되었지만 자신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억지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중에 랑도와 손바닥을 한 차례 마주쳤는데 그것 때문에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서였다. 그래서 발을 거둬들이고 싶어도 불가능한 거였다.
사리리의 공포에 질린 눈 속에서 범한은 북제의 젊은 황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서로 이루지 못할 사랑을 나누는 남남(男男) 연인처럼 결연하고 의연하게 절대 후퇴하지 않을 듯한 기세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 ‘슉슉’ 하는 소리를 내며 싸늘한 빛이 공중을 갈랐다. 랑도를 위시한 수 명의 고수들이 사리리 옆을 스쳐지나간 거였다. 그런 후 이들은 범한이 황제를 끌어안은 채 죽을 각오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모두들 잔뜩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들도 이것저것 재지 않고 바로 따라서 뛰어내렸다.
범한은 자살하려는 게 당연히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걸 놀이로 삼는 이는 오죽 아저씨를 빼면 범한밖에 없었다. 범한은 비록 조금 심하게 다치기는 했지만 품에 중요 인물을 안고 있어서 착지할 지점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확히 찾으며 내려갔다. 그건 불룩 튀어나온 바위나 폭 들어간 풀숲 구덩이 같은 곳이었다. 범한은 용수철을 장착한 나무인형처럼 험준한 절벽에서 한 줄기 먼지를 일으키며 한 발 한 발 발을 디디며 하강해 순식간에 절벽 아래쪽에 있는 평지로 착지했다.
추락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반동도 굉장했다. 이에 범한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렸고 범한에게 강제로 통제를 받고 있던 젊은 황제는 진동 때문에 심장의 피가 요동쳐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 황제 폐하의 눈동자에서는 공포란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범한의 눈을 냉랭하게 주시하고 있었고,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만 내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범한이 뛰어내린 것도 모자라 황제 자신까지 제어 할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절벽 아래 평지는 바로 검려 앞이었다. 순식간에 이변이 발생하자 왕 십삼랑을 검려로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 강제로 막고 있던 이들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검으로 진을 치고 범한을 포위해 버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 그리고 항시 어둠에 싸여 있는 곳에서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운지란이 드디어 걸어 나왔다. 검을 들고 있는 그가 하늘을 찌를 듯한 검의를 뿜어내며 범한에게 돌진했다.
절벽에서 수 개의 회색 형체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랑도를 위시한 몇몇 고수가 돌을 밟으며 범한보다 조금 늦게 아래로 내려온 거였다.
현장에 순식간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