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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56화 (856/1,108)

856화 산속 거처의 여자와 황제의 마음 (2)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범한이 그제야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사리리의 농염하게 상기된 아름다운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가 입가에 잠시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사리리가 언짢은 기색으로 범한을 쓱 보고는 물었다.

“웃기는 뭘 웃으십니까!”

“살아 움직이는 춘화를 봤는데, 잠시 웃는 것도 안 되는 건가요?”

범한이 그녀 옆에 앉았다.

“작은 범 대인, 대체 여기까지 찾아와 뭐 하시는 겁니까?”

사리리가 범한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나와 황제 폐하가 서로 애정 표현하는 거 보러 온 건 아니겠지요?”

이유는 모르겠으나 말을 마친 북제 귀비의 얼굴에 별안간 부끄러움이 비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 범한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범한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원래는 당신과 황제 폐하께서 사사로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데 랑도 대인이 제 자리에 꼼짝하지도 않고 서서 나처럼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훔쳐 듣는 취미가 있지 뭡니까. 하여 폐하와 사적으로 대화를 좀 나누려면, 이제 보니, 저녁때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 같군요.”

“저녁때까지요?”

사리리가 대경실색해 말을 이어 갔다.

“설마 이 방에서 저녁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범한이 미간 쪽을 씰룩였다.

“왜, 안 되겠소이까? 이리 재밌는 애정 표현 장면은 내 처음 보는데. 하여 경국으로 돌아가면 조설근이란 필명으로 북제 황제의 규중밀사(閨中密事)라는 제목의 글을 쓸까 합니다. 분명 석두기 보다 잘 팔릴 것이고, 담박서국으로 은전이 밀려들 것입니다.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 대가로 내 그대에게 수입의 2할을 줄까 하는데, 어떻소?”

사리리가 싸늘하게 웃었다.

“설마 대인과 군주 마마는 그러한 애정 표현을 한 적이 없으시답니까?”

범한은 드디어 참다못해 웃기 시작했다. 범한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문제는 레즈비언 유는 오늘 처음 봤다는 겁니다.”

“레즈비언이 뭡니까?”

사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해 하며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음기를 거두고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말해주었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여인네 둘이서······ 그런 일을 어찌 하는지 말입니다! 황제 폐하의 아까 표정을 보니, 그대 몸에 확실히 흥미를 갖고 계시더군요. 설마 황제 폐하께서는 태생적으로 취향이 그쪽이신 겁니까?”

드디어 범한의 말뜻을 알아들은 사리리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건 북제 황족 사이에서 근 20년 동안 감춰온 거대 비밀이었다. 고하 대사가 임종한 후에는 천하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사람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느닷없이 범한의 입에서 듣게 되다니. 사리리는 순간 참담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범한이 코를 잠시 훌쩍였다. 방 안에서 연한 금목서 향이 나서였다. 이에 그가 사리리를 바라보며 자그마한 소리로 물었다.

“특히 당신네 세 사람은 나를 혼내준 적이 있었지요. 설마 내가 그 비밀을 알아차리고 당신네들을 협박할 거란 걱정은 안 했던 겁니까?”

사리리는 놀란 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뿐 그가 하고 있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사리리가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에 범한이 온화한 음성으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게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기라도 한 건가요? 그리 무서워할 필요가······. 왜 아까 랑도가 방 밖에 있는데도 내가 방 안에 있다는 걸 밝히지 않은 겁니까? 나는 그냥 이게 궁금했을 뿐입니다.”

사리리는 한동안 침묵하며 천천히 놀란 마음을 삭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황제 폐하와 나는 모두 방 안에 있었어요. 그리고 나는 대인의 수법을 잘 알고요. 랑도 대인께서 제때 방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대인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일 수 있어서 그랬어요.”

범한이 사리리를 응시하며 고개를 가로로 내젓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원인이 아니란 건 리리 자신이 잘 거예요. 하나 어찌 되었든 당신에게 고마워해야겠군요.”

사리리가 고개를 홱 치켜들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건 제 쪽인 걸요. 옛날에 북제로 올 때 대인께서 내 목숨을 살려주셨잖아요. 나중에는 내 아우의 목숨도 구해주셨고요. 북제 황실에 있는 나를 몇 년 동안 통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셨지요. 하여 내 입장에서는 어찌되었든 대인께서 살해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거지만······.”

사리리가 훨씬 더 무거워진 어투로 말을 이어 갔다.

“대인이 황제 폐하를 다치게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 말했군요.”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그대는 단순히 귀비 마마일 뿐이에요. 그러니 내가 정말로 당신의 황제 폐하를 해할 생각이었다면, 당신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요.”

범한이 갑자기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순식간에 네다섯 해가 지났군요. 당신이 상경성에서 어찌 지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범한과 사리리라는 이 두 남녀의 관계는 실로 복잡하기 짝이 없었으며, 몇 마디 짧은 말로는 설명 불가능 했다. 그런데 앞서 사리리의 말대로 범한과 그녀는 암암리에 협의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녀의 입궁을 도와 놓고는 그 협의를 가지고 그녀를 통제하려 든 적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대인과 나 사이의 협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대인께서 나 대신 복수를 해주셨으니, 나도 당연히 온 힘을 다해 대인을 도울 것입니다.”

사리리가 순간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범한을 향해 예를 갖추어 천천히 절을 했다.

범한은 이번 생에서 각기 다른 여인들과 끊임없이 각양각색의 협의를 맺어왔다. 이걸 두고 언빙운은 범한이 여인을 정복해 세상을 정복한다고 평했었다. 그런데 이건 비웃는 것이 아닌 사실을 말한 거였다.

과거 색정으로 가득 찬 마차가 북쪽으로 이동할 때, 범한은 사리리 몸에 진평평이 독을 썼다는 사실을 알아챘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훗날 기회가 되면, 그녀의 가족들을 위해 복수해 주겠노라 약속도 했었다. 그 대가로 사리리는 북제 황궁 내 간자가 되어주겠노라 약조한 터였다.

사리리는 과거 경국 황족의 후예였다. 한데 그녀의 조부는 황위 쟁탈전 중 처참히 살해되었고, 부모님은 훗날 경국 조정의 추격을 받다가 사망했다. 이에 그녀는 북제 상경성에서 자리게 된 거였다.

그리고 과거 사리리의 조부를 배신하고 현 경국 황제가 등극할 수 있도록 도운 군 측 중신은 바로 2년 전 범한의 손에 죽은 진씨 영감님이었다.

* * *

어떻게 해서 시작된 일인지를 떠나, 어찌되었든 범한은 사리리 대신 복수해주겠다던 과거의 약속을 이행한 거였다. 다만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고, 사리리는 저 멀리 북제 황궁 깊은 곳에서 지내 감찰원은 그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범한도 이 여인이 과거 협의를 아직 기억하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던 거였다.

다행히 앞서 장면을 통해 증명되었듯이 사리리에게는 범한을 도울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북제 젊은 황제는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사리리가 아까 범한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건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은혜와 복수를 해준 의리를 가슴에 새기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말로는 설명 못할 감정 때문이었다. 이 여인은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 경도에서는 경도 제일 기녀로 신분을 위장해 북제를 위해 간자 노릇을 했었다. 하지만 진정 그녀와 살을 맞대본 사람은, 더 나아가 마음이 서로 맞았던 이는 범한이란 남자밖에 없었다.

특히 달이 밝았던 그날 밤, 낡은 사당 내 금목서 향이 은은하게 나는 커다란 침대에서 남녀 간의 복잡한 관계처럼 육체가 복잡하게 뒤엉켰으니,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여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려면 함께 잠자리를 해야 한다고? 이건 대체 누가 한 말이지?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일리는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지금 만큼은 범한을 바라보는 사리리의 눈빛이 너무 복잡해 머리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이니 말이다.

범한은 결국 사리리의 그윽한 눈빛에 패하고 말았다. 그가 어찌 수년 전 유정강 꽃배에서, 북해 근처 마차에서, 낡은 사당에서, 이별하던 정자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 여인은, 단지 범한 생각에 따르면, 이 여인은 세상 여자들과는 달랐다. 자신의 장래를 위해 지극히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와 거리를 두었던 거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윽한 눈빛 때문에 범한은 드디어 깨닫게 된 게 있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여인이란 점이다.

북제 황궁에서······ 제대로 된 남자는 없었다. 그와 같은 적막 속에서 사리리가 어찌 참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 여인은 범한의 혼을 쏙 빼놓는 손길이며,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얼굴을 수도 없이 많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수년 동안 멍하니 생각하다 보니 결국에는 그것이 삶의 걸림돌이 될 정도였다.

범한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사리리의 손을 이끌고, 또 무언가 말하는 듯한 눈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사리리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정말로 잘 해주시는데. 그런데도 당신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네요.”

“그분은 나를 죽이려 하셨어요. 그것도 여러 번이나요.”

범한이 사리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원수는 꼭 갚는 사람이에요. 특히나 이번에 큰일을 도모하러 그분이 직접 오셨으니,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배웅해 드릴 수는 없어요. 경국 황족이 과거에 리리 가족에게 어떻게 했든, 결국 당신은 경국 사람입니다. 그러니 동이성과 북제가 연합해 우리 대경국을 압박하는 걸 멍하니 지켜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나를 경국 사람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사리리가 범한 손에서 자신의 손을 천천히 뺀 후 말을 이어 갔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도 가련한 아낙일 뿐이라고요.”

범한이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리리 말도 맞는군요. 이번 일을 두고 당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정으로 보나 이치로 보나 확실히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나는 단지 사고검과 황제가 검려 안에서 이틀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는데, 그게 어찌 되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자 사리리가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기 시작했다.

“말해도 안 믿을 거면서. 사고검이 얼마나 오만하냐면요, 황제 폐하께서 먼저 굽히고 나오셨고, 또 이틀 연거푸 검려에 들어가셨지만 대종사는 만나지 못하셨어요.”

범한이 눈썹을 씰룩였다. 속으로 크게 놀라서였다. 그가 속으로 ‘사고검이 대체 왜 그러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북제의 황제께서 친히 왕림하셨는데도 만나주지 않았다니. 사고검이 십삼랑을 이용해 본인의 태도 일부를 전달했다지만, 북제 황제가 직접 온 이상 사고검은 그것을 이용해 가격 흥정을 할 수도 있는 거였다.

* * *

산원 한 귀퉁이에는 북제와 검려 고수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랑도에 의해 밖으로 나온 북제 젊은 황제는 꽃밭에서 산문(山門) 아래쪽에 있는 오두막을 무뚝뚝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눈을 살짝 찡끗했다. 자신의 만남 요청을 거절하고 있는 사고검에게 한없이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 십삼랑이 검려 안으로 쳐들어오려 하고 있습니다. 분명 경국 범한 대신 사고검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것이겠지요.”

황제 옆에 있는 랑도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운지란의 사람들이 그를 밖에 잡아두고 있습니다. 문제는 검려 제자들이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고는 해도 벌건 대낮에 왕 십삼랑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짐이 보기엔······ 그 자가 범한이에요.”

북제 황제가 눈을 감고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랑도의 미간이 살짝 수축했다. 경국 범한은 건드리기 힘든 자란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니 그가 봤을 때, 금의위 지휘사 위화가 남경 사절단을 제대로 붙잡아두지 못한다면, 범한은 혼자서라도 동이성에 올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들의 황제 폐하가 세운 계획이 깨질 수도 있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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