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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55화 (855/1,108)

855화 산속 거처의 여자와 황제의 마음 (1)

여인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범한은 살며시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제 보니, 그분이 리리를 정말로 총애하시나 보군. 큰일을 하러 오시는 자리에 당신을 대동하고 오시다니 말이야. 설마 리리가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 걱정하시는 건 아니겠지?”

사리리는 소매 끝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입술은 꽉 다물고 있었고, 눈에는 살짝 놀라움과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녀와 범한은 잘 아는 사이였다. 과거 북쪽으로 올 때 함께 왔었고, 감옥에서도 만났었다.

이에 그녀는 작은 범 대인이 겉으로는 온화해 보여도 실제로는 지독하게 악랄한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리리가 보는 범한은 지금 험지에 들어와 있기는 해도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즉시 과거의 정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잔인한 짓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범한이 사리리의 아래턱을 가볍게 치켜들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녀의 피부가 손에 닿자 범한은 순식간에 과거 북제로 향하던 마차 안으로 돌아가 있었다. 살짝 음탕해진 범한이 부드럽게 물었다.

“내가 당신네 인간 요괴 황제에게 바람난 아내를 갖도록 만들어 버릴까 하는데.”

그러자 놀라움과 공포감이 가신 사리리가 입을 살짝 오므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원래 경도 제일미녀였지만 지금은 북제에서 귀비가 되어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진귀한 대접을 받아 그런지 더욱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웃자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촉촉한 눈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범한도 씩 웃어버렸다.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여인과 함께 있다 보니 마음이 편해서였다.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자기 손을 잡으라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자 사리리가 씁쓸하게 웃더니 그의 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 휘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리리는 범한의 행동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봤을 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범한은 허튼 짓을 할 리 없었다. 단순히 자신의 방을 빌려 그가 만나려는 사람을 기다리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손을 따스한 범한의 손 위에 얹는 순간 그녀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치 오랜 숙원을 이룬 듯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 순간, 사리리는 잠시 후 돌아올 그 사람이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 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 *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나고 방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대단히 젊은 남자가 많은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리리가 있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는 길게 뻗은 칼 같은 눈썹과 바다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새하얀 의복에 황색 비단 허리띠를 한 남자는 호랑이와 용처럼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었고, 그 기세는 타고난 듯 했다.

“황제 폐하, 사리리 낭자는 안 계십니다. 어쩌면 정원으로 가 놀이를 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종처럼 차려입은 태감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뢰었다.

젊은 남자는 무언가 번뇌가 있는 사람처럼, 가볍게 “응.” 하고 대답한 후 의자에 앉았다. 그가 습관적으로 두 발을 들었다. 그러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태감이 그의 장화를 벗겨주었다.

장막 뒤에서 모든 걸 훔쳐보고 있던 범한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는 속으로 비웃기 시작했다.

‘못 본 지 여러 해 지났는데, 저 어린 황제는 아직도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군. 발도 엄청 크고 못생겼네. 저런 사람이 어디를 봐서 여자라고······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북제 황제가 사고검의 검려 개방 의식에 친히 참석하다니!

이번 의식은 사고검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대종사에게 존경심을 표할 필요는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검려 개방은 훗날 동이성의 귀속을 경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북제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북제 황제가 제왕의 신분으로 직접 숙이고 들어왔다는 건 누가 봐도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일찌감치 알아챈 범한은 빼고 말이다.

범한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겹겹이 둘러쳐진 얇은 사 휘장 너머에 있는 젊고 꿍꿍이가 많은 북제 황제를 지켜보았다. 범한이 보기에 북제는 사고검의 죽음을 중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특히나 경국의 세력이 더 커진 상황에서 북제가 현 국면을 뒤집으려면 반드시 효과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북제 황제가 직접 사고검을 찾아온 건 북제가 그만큼 지극한 성의를 보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황제가 나라 밖으로 나와 아무도 모르게 이 먼 타국까지 왔다는 건 정말 큰 모험을 한 것이니, 정말 대담한 행동을 한 거였다. 범한은 일찌감치 연경성에서 북제 젊은 황제가 허를 찌르는 행동을 할 거라 예측했었다. 그런데 그가 검려 근처에 나타난 걸 실제로 보게 되자 결국에는 놀라움과 경탄을 금치 못했다.

* * *

검려 산원(山院)은 수려하고 그윽한 곳이었다. 하지만 바깥에는 북제 조정의 고수와 검려 측 호위 인력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집중 호위를 받고 있는 곳에 그것도 북제인들이 가장 기피하는 인물인 경국 범한이 잠입해 그들의 황제 폐하로부터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범한 정도의 실력자가 모험을 할 생각이었다면, 방 안에 있는 북제의 젊은 황제는 그의 수중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범한이 북제 황제를 자신의 통제권 하에 둔다 해도 해결될 게 없다는 거였다. 더욱이 이 산원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고수가 잠복해 있다는 건 범한도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던 터였다. 특히나 이 수려하고 아늑한 방 밖에서는 강력한 고수가 하나가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방 밖에서 멈췄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지만, 상대방이 어떤 절주(節奏: 박자)로 호흡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러한 세세한 행동만으로도 범한은 상대가 자신과 비교해 실력이 떨어지는 고수는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특히나 내공을 통제하는 데 있어서는 본인보다 더 정통했고 자연스러웠다.

그렇다면 북제 젊은 황제의 무공 스승이자 천일도 문파의 첫 번째인 제자 랑도 대인 말고 또 누가 이 정도의 경지에 달해 있을까?

침소 휘장 뒤에 있는 범한의 눈꺼풀이 두어 번 씰룩였다. 긴장한 그가 무의식적으로 사리리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이 처한 상항이 황당하고, 또 오늘 계획을 너무 충동적으로 세웠다고 생각했다. 북제 황제가 어룡(魚龍)처럼 동이성으로 잠복해 들어왔으니, 가공할만한 실력자를 호위로 데려오는 건 당연한 거였다. 역시 세상일은 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거늘. 그런데 범한이 이런 미친 짓을 하게 된 건 어쩌면 그가 북제 황제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어서 일 수 있었다.

만약 지금 랑도가 방안으로 들어온다면 사리리의 호흡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러면 아까 태감의 추측이 잘못되었다는 게 알려질 터이고 범한의 존재가 발각될 것이었다.

이에 범한이 고개를 돌려 떠보고 물어보는 눈빛으로 사리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리리는 이 원수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알지 못해, 시선을 살짝 돌려 그윽하면서도 원망이 잔뜩 섞인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노려보았다.

이때 북제 황제는 아직도 밖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만약 자신이 총애하는 비가 열 보 떨어진 곳에서 허연 우라질 놈과 눈빛으로 뜨겁게 정을 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쩌면 화가 머리끝까지 나 피를 세 대접은 뿜고, 공개적으로 간통한 아내를 가진 서방이 되는 거였다.

범한이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소리 없이 웃음을 지으며 눈을 끔뻑였다. 영락없이 뭔가를 구걸하는 모양새였다. 사리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 남자를 바라봤지만,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긴장해 한동안 손깍지를 끼고 있던 사리리가 결국에는 마음이 약해져 범한의 구걸하는 눈빛에 살며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순간 북제 젊은 황제는 미간을 강하게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고, 랑도는 방 옆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보고하려 했다. 그리고 나머지 북제 사람들은 리 귀비가 정원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해 조용한 방 안에서 느닷없이 한숨 소리가 날 거란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눈썹 꼬리를 살짝 씰룩였다.

휘장 밖에 있던 북제 황제도 굳게 찌푸렸던 미간을 갑자기 펴고 눈을 뜨고 말없이 휘장 뒤쪽을 바라보았다.

랑도는 몸은 방 밖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어느새 문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 * *

사리리가 치마끈을 묶으며 휘장 안에서 걸어 나왔다. 구름처럼 얹어져 있던 그녀의 머리는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아름다운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한 눈동자에는 살짝 황당하다는 기색이 어려 있어, 마치 면목 없는 행동을 한 사람처럼 보였다.

북제 젊은 황제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잠시 번뜩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이곳에 있었구나. 아까 태감 말로는 정원에 있을 거라 했는데, 왜 찍소리도 내지 않은 것이냐?”

젊은 황제를 대하는 사리리의 모습에서는 아까 범한을 봤을 때와 같은 기쁘고 두려움에 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웃으며 경대 앞에 앉더니 거울을 바라보며 화장이며 머리를 고치고는 대충 얼버무려 버렸다.

“제가 언제 감히 찍소리 같은 걸 낸 적 있답니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범한의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범한은 자신이 하고 있는 모험이 과연 옳은 건지, 사리리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잘 할지 확신이 없던 터였다. 그런데 사리리가 중의적인 표현으로 톡 쏘듯 말하자 범한은 살짝 얼떨떨했다.

북제 젊은 황제가 잠시 싸늘하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리리 곁으로 걸어갔다.

“뭔가 면목 없는 짓을 해놓고는 감히 짐을 속인 건 아니고?”

황제의 말에 뒤쪽에 숨어 있던 범한이 참다못해 씁쓸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리리가 뜬금없이 고개를 돌려 황제를 향해 눈을 홉뜨더니 지극히 나긋나긋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누가 이렇게 들어오시래요. 제가 이렇게 뒤에 있으면······ 당연히 면목 없게 되는 거죠. 설마 다른 사람에게 제가 그걸 하는 걸······ ?”

사리리의 말에는 적어도 두 단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범한은 옆에 놓인 황금이 칠해진 변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과거 첩자로 활동한 여인이라 그런지 급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놀라지 않고 대처하는 능력이 과연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북제 젊은 황제가 갑자기 웃으며 사리리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음이 동해 몸을 굽혀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네 몸 위에 있는 명월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짐이 섭섭하지 않겠느냐!”

두 사람의 입맞춤은 정말로 박력이 넘쳤고, 입술과 치아가 서로 교차한 채 오랫동안 서로를 빨아들였다. 사리리의 호흡이 살짝 가빠지자 젊은 황제는 조금 아쉬워하며 그녀의 향긋한 혀를 놓아 주었다. 그런데 순간 말갛게 잘 생긴 얼굴에 느닷없이 욕정이 어리었다.

휘장 뒤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범한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괴상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정신만큼은 단단히 붙들고 있던 터라 방 밖에 있는 랑도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신의 호흡이며 심박 수는 잘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제 젊은 황제의 손이 사리리 옷섶 안으로 쑥 들어가 그녀의 부드러운 것을 움켜쥐고 쉼 없이 주무르자 범한은 결국에는 참다못해 낯빛이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화면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농도 짙은 장면이 겨우겨우 막을 내렸다. 이번 일은 범한에게는 그 안에 담긴 어떤 취향에 대해 충분히 음미해볼 기회였다.

무어라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랑도가 밖에서 몇 마디 아뢰자, 북제 젊은 황제의 얼굴에 있던 욕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사리리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이더니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엉망이 된 옷을 정리하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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