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화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2)
범한의 말대로 이번 일은 경국까지 흘러들어갈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범한은 조심스레 준비를 했다. 이번에 동이성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범한은 신경 써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풀릴 수도 있어서였다.
“우리가 친구 사이인가?”
미음을 마시고 있던 범한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왕 십삼랑에게 물었다. 왕 십삼랑은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얼굴이 창백했다.
그러자 왕 십삼랑이 한참 동안 생각을 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미음을 내려놓고 지극히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친구인 나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어제 저녁에 있었던 모든 일은 오늘 이후로는 절대 발설하지도 묻지도 말아주게나.”
왕 십삼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은 그에게는 묻지 못하도록 해놓고는 어제 있었던 일과 더 며칠 전 동이성에서 발생했던 일에 관해 왕 십삼랑에게 명확히 물어보려 했다. 그가 손끝으로 탁자를 가리키며 왕 십삼랑에게 죽을 먹도록 권하고는 한참동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가 어제 매포 협원으로 자네를 찾아간 건 운지란이 사람을 시켜 그곳을 감시할 걸 몰라서가 아니었네. 내가 감찰원 관원을 파견해 줄곧 자네의 거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자네도 분명 알고 있었을 거야.”
“하여 제일 큰 문제는 이거였지. 나는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검려에서 참담한 일이 발생해도 내 부하들에게 그걸 알리거나, 또는 내게 어떤 기미를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 했네.”
범한이 왕 십삼랑의 눈을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어제 하마터면 포위당해 죽을 뻔 했어. 이는 자네가 초래한 것이긴 하지만, 자네가 왜 집 안에 감금되어 있었으며, 또 왜 이리 형편없이 당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범한의 말을 듣는 왕 십삼랑의 눈에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보니, 사형들이 자신에게 몰래 손을 쓴 것 때문에 심성 착한 젊은 고수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 온 것만 같았다.
한참 후 왕 십삼랑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3일 전, 대사형께서 제게 함께 술을 마시자 청하셨지요. 동이성의 장래에 관해 이야기 나누자며 말입니다. 술자리에서 대사형께서는 감정이 격해져 계셨지만,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 다 옳기에 저는 도무지 그분을 대할 면목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한 행동은 모두 사고검의 안배를 따른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 입장에서는 저항할 수도 없었고 말일세.”
범한이 왕 십삼랑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왕 십삼랑이 한동안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스승님께서 명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저는 검을 들고 경국 대군에게 저항했겠지요. 지금처럼 사형들에게 미움을 사는 역할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간(漢奸: 매국노)이 되어 정말 기분이 안 좋군 그래!”
범한이 입가를 살짝 올리며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왕 십삼랑은 한간이란 말뜻을 정확히 알지 못해 머리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동이성의 장래와 모든 백성들을 생각해 그리 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더군다나 스승님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왕 십삼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 갔다.
“술자리에는 저와 대사형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대인도 아시다시피, 저는 출관(出關) 전에는 대사형을 만나 뵌 적 없습니다. 하나 최근 2년 동안은 사형제들끼리 정말 좋은 감정으로 잘 지냈지요. 그래서 저는 그분을 친형처럼 생각했습니다.”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운지란이 자네에게 독주를 준 거군. 자네는 그걸 한 입에 톡 털어 넣었고.”
왕 십삼랑의 눈에 한줄기 고통스런 기색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형은 그런 간사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서 제게 독을 쓴 건 동이성을 위해서입니다. 경국 사람들이 저를 통해 스승님을 만나 뵙는 걸 원치 않으셔서 그런 겁니다.”
“자네는······ 너무 천진난만하군.”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세상 이치란 건 말이지, 자네가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자네를 죽이게 되어 있어. 그러니 자네 같은 성격으로 검려를 물려받고 싶어 한다면, 그건 바보가 꿈 얘기하는 것처럼 황당무계한 일이네.”
“대사형께서는 저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대인을 죽여서 어떤 가능한 협의를 깨고 싶어 하시는 것뿐입니다!”
왕 십삼랑이 불쑥 화를 내며 범한을 노려보았다.
흠칫 놀란 범한은 돌연 마음이 약해져 온화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점은 믿고 있다네. 그리고 그 독에 대해 조사를 해봤는데, 자네 몸이 다치기는 했어도 정기를 함부로 쓰지 않으면 치명적이지는 않더군. 운지란과 검려의 자네 사형들이 그나마 호의를 베푼 거였어.”
범한의 말은 왕 십삼랑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다.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순수한 젊은 고수가 그런 더러운 일 때문에 마음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한 행동일 수도 있었다.
“운지란이 자네를 곤경에 빠뜨린 건 경국에서 와 있는 연락책을 유인해 죽이기 위한 것이네. 더군다나 앞서 받은 밀정 보고서에서는 검려 사방에 방위가 삼엄해 외부인의 출입이 엄히 통제되고 있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건 북제 사람들이 자네 스승 대인을 설득하기 위해 이미 검려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범한이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북제에서 온 대단한 인물이 대체 누구냐는 것이네.”
“그건 모릅니다.”
왕 십삼랑이 짧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 일은 처음부터 대사형께서 책임지셨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중독되어서 최근 며칠 동안은 협원에만 있었지요.”
“사고검을 만나 뵙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없을까?”
범한이 왕 십삼랑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적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왕 십삼랑이 대답했다.
“저도 열흘 동안 스승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몸 상태가 어떠신 지, 아직 견디실 수 있는 상태인지 알지 못합니다.”
왕 십삼랑이 동문서답을 하자 범한은 열불이 치솟았다. 이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범한이 냉소를 날렸다.
“북제의 대단한 인물이라······. 내가 정말로 알아채지 못한 줄 아나보지? 검려 방어가 아무리 엄해도 운지란도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어. 그러니 자네가 떳떳하게 검려로 들어가려 한다면, 계속 중립을 지키던 자네 둘째 사형이 나설 것이네. 검려 앞에서 자네가 살해당할 수도 있는데 그가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까?”
그러자 왕 십삼랑이 귀신을 보듯 범한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대인은 어제 저녁에 하마터면 사형들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또 설마 죽으러 가겠다는 것입니까?”
범한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든 북제가 사고검을 설득하기 전에 그 성격 포악한 대종사를 만나야 했다. 더군다나 이번 일은 자신이 가장 관심 갖고 있는 한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범한은 관련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목숨 걸고 검려로 가야 했다.
“자네는 검려 13번째 제자일세. 그러니 동이성 안에서는 어떻게든 방법이 있지 않은가. 내가 감찰원 사람을 파견해 다시 자네를 돕도록 하겠네. 만약 오늘 안에 내가 검려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무튼 나는 어떻게 해서든 북제에서 온 대단한 인물을 꼭 봐야겠네.”
범한의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채가 번뜩였다. 마치 북제에서 온 그 대단한 인물에게 어떻게 대응할 건지 이미 계산이 다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
창백한 낯빛의 젊은이가 대단히 곤란한 기색으로 마차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동자로 저 멀리 줄지어 서 있는 검려의 초가집들을 바라본 후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검려를 향해 걸어갔다.
길마다 방위를 책임지고 서 있던 검려 제자들은 젊은이의 표정과 행동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보내 검 자루를 쥐었지만, 감히 공격에 나서지는 못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가 살짝 메마른 음성으로 그 자를 불렀다.
“작은 사숙님, 조사(祖師)님께서 지금 폐관 수련중이시니 방해하지 말라는 사부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왕 십삼랑 주변으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버렸다. 검려 제자들은 사문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고 있는 운지란 대가와 조사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작은 사숙 사이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작은 사숙을 누군가가 구출해 갔는데, 검려 사람들은 그게 경국 고수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사숙이 이 벌건 대낮에 검려 문 앞에 떡하니 나타난 건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의외였다.
이에 모두들 긴장해 버렸다. 그리고 지금 당장 공격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왕 십삼랑이 심호흡을 한 차례 했다. 그리고 평온하지만 무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검려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러다 정말로 보고 싶었던 누군가가 나타나자 허리를 숙여 예를 차려 인사했다.
“둘째 사형, 사부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검려의 두 번째 제자는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그가 안 됐다는 표정으로 왕 십삼랑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사제, 돌아가거라.”
* * *
검려 앞쪽에서 일대 소란이 일고 있는 동안 검려 후방에 있는 조용하고 자그마한 집 밖에서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게 산 그림자를 타고 집 안으로 흘러들었다. 검려 제자들은 모두 용감하게 나타난 왕 십삼랑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터라 후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조용하고 작은 집에는 검려를 찾은 가장 존귀한 사람이 머물고 있었다. 한데 그 귀한 손님은 지금 검려 안에 있던 터라 작은 집 쪽은 경비가 소홀했고, 이에 사람 형체는 손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북제에서 온 고수들을 피해 범한은 살쾡이처럼 후원 쪽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그윽한 향냄새를 맡으며 어느 방 쪽으로 몸을 날려 다가갔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이마에 노란 장식품을 붙이며 궁녀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범한은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범한이 그 여인의 뒤로 걸어갔다. 그런 후 몸을 굽히고 그녀의 귓가에 가볍게 바람을 불며 경박하기 짝이 없게 말했다.
“리리, 사내가 그리운 거였소?”
여인이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너무 아름다워 한스러운 자신의 얼굴과 그 옆으로 보이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자신과 견주어도 전혀 빠질 것 없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이에 너무 놀란 사리리는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작은 범 대인!’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이가 어떻게 귀신도 모르게 동이성에, 그것도 검려 옆에, 더군다나 자기 곁에 나타난 것일까!
사리리가 몸을 획 돌려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놀라움과 공포가 가득 담긴 눈으로 귀신처럼 자기 곁에 나타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리고 부드러웠던 눈동자에는 놀라움만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