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화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1)
범한이 왕 십삼랑의 등을 받쳐주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거두어 들였다. 그는 체력과 정기를 너무 많이 소모한 상태라 온몸이 진득하게 땀에 절고, 얼굴에도 온통 땀투성이 되어 있었다. 그런 범한에게 긴장감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는 왕 십삼랑의 질문이 들려오자 그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십삼랑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벗어나자마자 뜻밖에도 검려 입장으로 되돌아가 그림자에게 강렬한 적의와 관심을 보여서였다.
그림자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자신의 발끝만 바라볼 뿐 왕 십삼랑의 질문에는 아예 답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흥미가 없는 것일 수도, 어쩌면 그 질문이 무료하게 다가왔을 수도, 또 어쩌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사고검의 친동생이었다. 그러니 형의 어린 제자가 자신에게 따지듯 묻자 절로 황당한 기분이 들었던 거였다. 그런데 온 천하에서 그의 진짜 신분을 아는 건 네 명이 채 안 되었다. 그리고 범한이 허락을 해주기 전까지 그림자는 자신과 검려의 관계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만 이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그가 오늘 저녁에 어쩔 수 없이 나서다 보니, 무성한 추측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거였다.
범한이 침대 뒤쪽으로 자리를 옮겨 고개를 숙이고 왕 십삼랑 옆에 앉았다. 그런데 양 어깨 사이에 고개를 푹 박고 있어서 범한은 유난히 피곤에 절은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온몸에 흐른 땀 때문에 그에게서는 고약한 냄새까지 나고 있었다.
왕 십삼랑은 범한에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호랑이처럼 그림자만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대답 해주지 않는다면, 설령 몸이 견디기 힘들 지경이라도, 또한 검려 사형들에게 독을 당해 몸이 엉망이 되었을지라도 검려의 명예를 걸고 그림자를 공격할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고개를 박고 오른 손 식지를 들어 가볍게 냄새를 맡아 보았다. 손가락 끝에는 왕 십삼랑 체내에서 배출된 땀이 묻어 있었고, 기름처럼 끈적끈적 했다. 이내 약물의 성분을 판별해 낸 범한은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강한 살기가 일었다.
“정말 엄청난 독이로군! 십삼랑, 자네 대사형은 자네를 정말로 아끼는가 보군.”
범한의 말에 왕 십삼랑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오늘밤 경국의 양대 고수가 그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범한이 돌연 손을 휘휘 내저으며 극도로 피곤한 모습으로 말했다.
“너무 대단한 독이라 내가 가지고 있는 약을 모두 사용하고, 또 정기로 독을 몰아내도 다 빼낼 수 없어. 적어도 며칠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걸세. 뭐 묻고 싶은 게 있거들랑, 일단 자고 내일 다시 물어봐주게나.”
그러자 왕 십삼랑이 마뜩치 않다는 듯 심하게 기침을 두어 번 했다. 하지만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어 침대에 몸을 눕혔다.
범한이 왕 십삼랑 목에 꽂아두었던 가느다란 침을 뽑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차 주전자를 들어 차를 절반 정도를 마셨다. 그러자 다시 온몸에서 땀이 한 차례 흘렀고, 이에 범한은 더 피곤한 상태가 되었다.
범한이 문을 열고 나가 처마 밑 그림자 속에 앉았다. 그러자 그림자도 그의 곁에 앉았다.
“아까 정말 딱 맞춰서 와주었습니다.”
한참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범한이 자그마한 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와주지 않았다면, 내가 살아서 돌아왔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검려 9등급 고수 넷이 검으로 뿜어내던 한기와 조금 전 멋져 보였지만 실은 위험했던 상황이 순간 떠오르자 범한은 이제야 두려움과 오싹함이 밀려들었다. 천하에 영웅은 많고도 많은 거였다. 자신이 제아무리 두려움을 모른다 하더라도 혼자 싸우는 상황에서 9등급 고수 여럿에게 협공을 받는 건 무서운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특히나 왕 십삼랑을 차마 버려두고 올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자가 달빛을 맞으며 튀어나와 주지 않았다면, 오늘 범한은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거였다.
범한은 꽁치를 팔던 노점 쪽에서 그림자와 헤어질 때 그에게 감찰원이 동이성에 매복시켜 놓은 첩자와 연락하라는 지령을 내려놓고는 혼자서 매포 협원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림자가 임무를 빨리 완수하는 것은 물론 자기 곁으로 달려와 목숨까지 구해준 건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6처 사무를 처리하기에 앞서 저는 그림자입니다.”
범한 옆에 있던 그림자가 냉랭하게 대답을 했다.
상대방이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알고 있던 범한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전에는 진평평의 그림자였으며, 진평평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진평평의 명으로 범한을 보호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는 범한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었다.
범한은 조금 잘난 체 하느라고 그림자에게 감찰원 사무를 맡긴 거였다. 하지만 잠시 범한 곁을 떠나 있던 그림자는 그로 인해 강한 불안감이 일어 최대한 빨리 범한을 찾는 쪽을 택한 거였다. 그림자가 하는 일이란 게 아무도 모르게 범한 뒤에 따라 붙어 시시각각 그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풍이 불어왔다. 범한은 온통 땀으로 절어 있던 터라 바람이 더 차게 느껴져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미 9등급 상의 강자라 일찌감치 추위나 더위를 타지 않는 경지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방금 전 몸을 부르르 떤 건, 그가 속으로 얼마나 오싹해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범한이 오싹했던 건 우선 검려 내부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공격을 해서였다. 운지란이 뜻밖에도 왕 십삼랑에게 손을 썼는데 방법이 잔인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검려 고수들이 그에 편에 서 있었다. 이에 범한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고검이 이미 검려의 통제권을 잃은 걸까?’라는 의문까지 들었다.
범한이 오싹했던 두 번째 이유는 아까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의 온몸에서 땀이 났던 건 왕 십삼랑의 몸에서 독을 몰아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공할만한 네 개의 검 때문에 범한이 너무 놀라 혼이 쏙 빠져버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범한을 두려움에 떨게 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것에 압도당한 범한은 몸과 마음이 공포에 점령당해 버렸고, 이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그림자는 범한이 지금 무엇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지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엄숙한 표정으로 단 한마디도 않은 채 범한 옆에 앉아 있는 거였다.
지금 이 상황은 범한에게 여러 해 전 처음 강남으로 내려갔을 때 사주 객잔 밖 처마 아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그때 범한은 이 천하제일 자객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유쾌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좋은 점은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운 상태였다.
“왜 아까 검려 고수를 죽이지 않은 것입니까?”
범한의 목은 이미 긴장감 때문에 메말라 있었다.
“그들은 9등급 고수에 모두 넷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외성을 노리고 딱 한 초식만 펼쳤건 것입니다. 검의로 상대방에게 겁을 주고 정신을 흔들어 놓은 것이지요.”
그림자가 눈을 감고 침묵을 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 상황에서 제가 중상을 입힐 수 있는 건 딱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대인께서 셋째에게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게 아니다 보니······. 그래도 상대방이 정신을 차린다 해도 우리 둘이 도망갈 수는 있었던 거지요. 하나 그들 모두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백치 형이 제자들을 천하제일로 가르쳐놨다는 걸 저로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림자가 한 말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다. 대종사 중 섭류운만 제자를 거두지 않았고, 경국 황제에게는 괴상한 방식으로 생긴 범한이란 제자가 있었다.
한편 고하의 천일도에서도 제자를 많이 양성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수히 많은 절정의 고수를 배출해 낸 건 사고검이었다. 검려 문하생 중에는 12명의 9등급 고수가 있었고, 이는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만한 숫자였다.
한동안 조용히 아무런 말도 않고 있던 범한이 느닷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요 3년 동안 저는 정말 조심하며 지냈습니다. 일단 사고검 검법을 쓰게 되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게 되니까요. 그래서 제가 사고검 검법을 시전 하는 걸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제 검도 누군가를 살려준 적이 없습니다.”
그림자가 싸늘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이 천하제일 자객은 일단 검을 뽑은 이상에는 살려둔 사람이 없었다.
“운지란은요?”
범한이 이름 하나를 말했다. 3년 전 강남에서 그림자가 6처 검객을 데리고 천하를 떠돌며 운지란 및 그와 함께 온 검려 제자들을 쫓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동이성에서 온 어둠의 세력들을 소주와 항주에서 몰아내 범한이 강남 질서를 잡는 데 있어 큰 공을 세웠었다.
“제가 운지란을 공격했을 때는 원래의 검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림자가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내뱉은 대답이었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항주 건물 밖 서호에 떠 있는 어선에서 그림자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급습했을 때 그는 상대방에게 중상만 입혔을 뿐이었다. 이제 보니, 그림자는 운지란을 죽이지 못할 걸 염려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후수를 남겨둔 것이었다.
“그러니까, 천하에서 오늘 저녁에 만난 그 다섯만, 아니 여섯이군요······ 십삼랑을 더하면, 일곱 명이군요. 일곱만 그 비밀을 아는 것이군요.”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어 갔다.
“문제는 우리가 그들을 입막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여 당신이 그 불행에서 운 좋게 살아난 아우란 걸 사고검이 언제 즈음 알아차리게 될 것 같습니까?”
그러자 그림자가 아주 오랫동안 침묵한 후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감찰원의 그림자가 저란 사실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림자의 대답에 범한은 무기력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신이 제일 두려워하고 있던 일이 어쩌면 이번에 동이성에 온 것 때문에 사실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고향 생각을 하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사고검이 우리 비밀을 지켜주면 정말 좋겠는데.”
그림자가 범한을 쓱 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농담 속에 담긴 의미는 그도 알아차렸다.
범한이 느닷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은 얼굴로 물었다.
“예전에 현공 사당에서 황제 폐하를 공격할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림자가 한참 동안 생각을 해본 후 대답했다.
“기분 좋았습니다.”
그러자 범한이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현공사당에서 자객이 나타났을 때 황제 폐하는 단번에 자객의 신분을 알아차려 버렸다. 바로 어릴 때 동이성을 떠난 사고검의 아우라고 말이다.
이제 경국 황제가 대종사라는 사실을 만민이 알고 있으니, 그의 안목은 틀릴 리 없는 거였다. 만약 사고검이 오늘 저녁에 제자들로부터 보고를 받는다면, 그림자가 자신의 아우란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면 그 소식은 경국까지 퍼질 테고······.
감찰원 6처 수뇌인 그림자가 경국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니! 그러고도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에 무사히 앉아 있을 수 있을까?
범한과 그림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 두 사람은 외톨이 절름발이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경애했다.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앞서 매포 협원에서 자신들이 한 짓을, 틈을 보인 것을, 감찰원의 최대 비밀이 드러나도록 한 걸 후회했다.
“어쩌면 우리 생각만큼 상황이 엿 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범한이 갑자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내일 어떻게든 사고검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그와 함께 거래에 대해 말하면서 이 일도 함께 거론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