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화 나를 따라오는 그림자 (2)
이때 9등급 고수 셋과 8등급 제자가 거대한 새처럼 날아 협원 방향으로 쫓아갔다. 그들은 어떻게든 단 시간 안에 범한의 도주로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공중에 있던 그들은 깜짝 놀랄 장면을 보고 말았다. 지면에 있는 범한이 자신들을 지나 매포(梅圃)로 달려가고 있었다.
지극히 맹렬한 검법을 시전 하는 푸른 옷의 검객은 방금 전 광경에 대경실색해 버렸다. 이에 그가 지극히 고강한 무공 실력을 발휘해 휘익 소리가 날 정도로 공중에서 강하게 몸의 방향을 틀었다. 고수가 발로 달을 차는 듯한 동작으로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몸을 돌리더니 곧장 범한의 등으로 향했다. 하지만 범한의 등에 업혀 있는 왕 십삼랑은 찌를 수가 없어 그는 검 끝을 범한의 뒤통수로 향하게 했다.
달을 찬 후 찌르는 공격이 허공에서 나타났지만, 전혀 멋지지도 않았고 대충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협원 정문 쪽에는 다른 푸른 옷의 검객이 가 있었다. 그는 양손에 검을 쥐고, 대단히 신중한 표정으로 두 팔을 살짝 구부리고 있다가 검의 세를 이용해 범한의 얼굴을 향해 직선 공격을 펼쳤다.
푸른 옷을 입고 있는 두 명의 검객이 하나는 앞에서 하나는 뒤에서 협공을 펼친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질주하기만 했다.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는 사람과 뒤통수 쪽에서 달을 차고 다가온 검객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리고 문 앞에 있는 푸른 옷의 검객을 향해서는 눈빛으로 찔러 죽이려는 듯 사납게 노려보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갑자기 기이한 변화가 일었다.
범한이 망치질 하듯 발걸음으로 지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가 발을 옮길 때마다 주변에서는 먼지가 치솟았다. 매포 협원 전방에 먼지가 자욱하게 깔리도록 함으로써 눈 깜짝할 사이 자신의 몸과 문 앞에 있는 푸른 옷의 검객을 먼지로 감싸버린 거였다.
범한 뒤쪽에서 매섭게 날아오던 검객에게 순간 범한의 형체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범한을 향해 계속 검을 겨누었다. 그런데 불현 듯 그의 왼쪽 눈꺼풀 쪽이 대단히 무서운 기운을 감지하기라도 한 듯 기이하게 뛰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에서 그림자가 하나 보였는데, 그게 내 그림자였나?’
* * *
범한이 먼지 연기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이미 검은색의 비수가 들려 있었고, 그것은 이내 수차례 빛을 번쩍여댔다. 모두들 앞쪽만 신경 쓰며 검의를 극한까지 끌어 올려놓은 상태였다. 푸른 옷의 검객의 눈이 일순간 어지럽게 흔들렸다. 줄곧 방어를 않고 있던 왼쪽 겨드랑이에 깊은 상처가 생긴 거였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유도 모른 채 심란하기만 했고, 결국 범한만 달아나게 해주었다.
하늘에 있던 그림자가 휘리릭 날아가자 범한 뒤쪽에 있던 푸른 옷의 검객은 달을 차는 동작을 날카롭게 휘익 소리가 날 정도로 억지로 풀고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허공만 베고 말았다. 그런데 곧이어 그에게 왼쪽 가슴 쪽이 서늘해지고 정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 찾아왔다. 이후 그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 * *
흙먼지가 흩어질 무렵 검려의 9등급 고수 넷은 매포 앞에 모여 있었다. 둘은 상처를 입은 채로, 둘은 그냥 멍하니 서서 텅텅 빈 전방을 바라보기만 할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거였다. 검려에서 최고로 의기양양했던 9등급 고수 둘이 상대방의 검에 한 초식 만에 당한 거였다. 그들은 운지란 대사형이나 중독되지 않은 작은 사제가 직접 나선다고 해도 한 초식 안에 다칠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어찌된 일이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셋째 사형과 넷째 사형을 검려 9등급 고수들이 잔뜩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있는 푸른 옷의 검객들은 바로 검려에서도 실력이 가장 높은 축인 세 번째 제자와 네 번째 제자이었다. 검려에는 모두 열세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 12명이 9등급 이었다. 그중 세 번째 제자와 네 번째 제자는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려 세 번째 제자의 왼쪽 겨드랑이는 범한의 검은 비수에 당해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생명에 지장 있는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얼이 빠져버려 범한이 왕 십삼랑을 업고 도망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한편 검려 4제자는 검이 가슴을 파고들어 중상을 입은 터였다. 다행히 심장을 찔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피를 흥건히 흘리고 있어 정말 끔찍한 몰골이었다.
푸른 옷을 입은 두 검객이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들의 눈에서는 범한의 실력에 경탄하는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두려움만 남아 있었다.
“연무에 독이 있었군.”
그들은 커다란 비밀 하나는 말하지 않고 있었다. 경국 작은 범 대인은 독을 쓰는 데 대가였고 동이성 문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앞서 범한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독을 살포하는 신묘한 기술을 펼치기는 했어도 검려 세 번째 제자는 이 초식 때문에 상대방의 공격에 진 게 아니었다. 달을 찬 후 찌르기 동작으로 사고검 검법의 정화를 은연중에 깨달아 버린 네 번째 제자는 협원 문 옆에 있던 그림자 속 자객에게 습격을 당한 거였지만, 그래도 그건 이렇게 다칠 정도의 공격은 아니었다.
푸른 옷의 검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일단 놀란 마음부터 진정시켰다. 그리고 이번 일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라 스승 대인께 반드시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선 초식에서 자신이 패한 건, 사실 실력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 검 공격 때문에, 그러니까 그림자가 그들에게 심리적인 동요를 일으킨 공격을 펼친 때문에 진 거였다.
경국의 범한은 사고검 검법의 약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객은 정통 사고검 검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검의가 자신들보다 더 사나웠을 뿐만 아니라 더 강하게 피를 갈구하고 있던 거였다.
* * *
무수히 많은 건축물의 괴이한 그림자가 겹겹이 들어선 동이성, 그곳을 맑은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달빛은 그다지 밝은 편은 아니었다. 이곳에 성 밖 항구에서 짭조름한 해풍이 불어와 공기 중에 매혹적인 향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맑은 오량액 술 안에 바짝 마른 절인 매실을 넣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푸르스름한 색이 깔린 가운데 맑은 향 안에 톡 쏘는 살의가 음험하게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1처가 있는 2층 민가 후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겹쳐져 있는 두 개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안으로 들어오자 문 뒤에 있던 사람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러자 동시에 민가 밖에서 안전하고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리는 암호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이곳은 경국 감찰원 4처의 주동이성(駐東夷城) 비밀 거점이었다. 거점 책임자인 서화점(書畵店) 주인은 오늘밤 이곳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친 사람이 올 거란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문을 열어준 후에는 긴장한 듯 들고 있던 비수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후문 뒤쪽에 꼼짝 않고 앉아 거점 주변의 동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터진다면 그가 가장 먼저 경보를 보내줄 것이었다.
정원에 흩뿌려지고 있는 달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서화점 주인장이 긴장한 모습으로 눈을 들어 살펴보았지만 그 어떤 이상 징후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림자가 민가 2층 나무문 틈을 따라 휘리릭 들어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집안으로 들어온 범한이 왕 십삼랑을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새파랗게 변한 얼굴을 한동안 자세히 관찰한 후 그의 입을 비틀어 열어 설태를 살폈다. 그런 후 다시 맥박 소리와 폐의 숨 소리를 들어보고는 미간을 천천히 찌푸리기 시작했다.
십삼랑의 몸에 있는 강한 진기를 모두 흩어버리고 온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니. 정말 무시무시한 독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단시간 안에 살펴본 터라 범한은 검려 첫 번째 제자인 운지란이 왕 십삼랑에게 어떤 약을 준 건지까지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관련 약물의 대체적인 성분과 작용에 대해 범한은 대략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범한이 한참을 생각해보더니 늘 지니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서 갈색의 약을 꺼냈다. 그런 후 손가락 두 개로 ‘팍!’ 소리와 함께 으깬 후 왕 십삼랑의 입술 안으로 밀어 넣고는 탁자 위에서 찬물을 가져와 먹였다.
찬물이 왕 십삼랑의 옷과 옷깃을 적셨다. 하지만 서호 좌현왕을 죽이고도 왕장에서 빠져나온 용감한 강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혼미한 상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범한의 눈동자에 한 줄기 싸늘한 빛이 흘렀다. 그가 마른 입술을 잠시 오므리더니, 이내 한쪽 손바닥을 왕 십삼랑의 가슴에 대고 누르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범한은 왕 십삼랑이 물과 약을 삼킬 수 있도록 손바닥으로 정기를 조금씩 주입하는 한편 물결이 일 듯 그의 가슴을 아래쪽으로 쓸어내려 주었다.
모든 걸 마친 범한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조용히 왕 십삼랑 옆에 앉아 약효가 돌기만을 기다렸다. 범한은 방 한쪽에 와 있는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기는 했지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런 범한의 모습은 마치 매우 중요한 다른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약물이 점점 약효를 발휘하자 왕 십삼랑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때가 왔음을 알아차린 범한이 침대 위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체내에 있는 자연스럽고도 순한 천일도 정기를 이용해 왕 십삼랑의 독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강남에서 지낼 때 범한은 갈가리 찢긴 경맥을 해당타타가 알려준 천일도 무상 심법으로 치료했다. 현재 왕 십삼랑의 경맥은 독이 경맥을 침범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경맥에 구멍이 수도 없이 많이 뚫려 있었다. 그래도 과거 범한과 비교하면 치료하기 훨씬 수월한 상태였다.
약물만으로는 왕 십삼랑 체내에 있는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범한의 정기를 이용한 치료를 더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었다. 비개는 떠나고, 소은은 죽고, 동이성의 독 대사는 어디에 있는지 종적을 감춘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에서 왕 십삼랑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범한뿐이었다. 운지란이 대단히 강한 약물을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범한이 해결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림자는 방안 한쪽에서 치료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도는 왕 십삼랑을 냉랭한 표정을 보고만 있어서 그가 대체 무슨 생각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무렵, 왕 십삼랑이 드디어 눈을 뜨고 깨어났다. 하지만 깨어난 찰나 그가 바라본 건 자신을 힘들게 구해준 범한이 아닌, 두 가닥의 오싹한 날카로운 빛을 뿜으며 곧장 문 옆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중년의 남자였다.
왕 십삼랑은 저 중년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상대방이 대략 40대이며, 청주성에서 정말 우연히 한 번 본 적 있어 그가 범한의 측근이란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왕 십삼랑은 그의 지위를 알지 못해 그냥 감찰원 밀정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범한 등에서 혼절하기 직전에 저 중년의 남자가 달빛 아래에서 넷째 사형에게 펼친 공격은 똑똑히 보았다.
사고검 검법! 외부에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검려의 비학(秘學)이자, 검려에서도 13명의 제자만 익힐 수 있었던 그 사고검 검법이었다!
“대체 누구십니까?”
왕 십삼랑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잔뜩 경계하면서도 복잡한 눈빛으로 그림자를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