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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51화 (851/1,108)

851화 나를 따라오는 그림자 (1)

그래서 범한이 두 눈을 감을 때 오른쪽 공중에서 검의 기운 하나가 담담하게 움직이더니, 검 끝이 차가운 빛을 번쩍이며 범한의 얇은 눈꺼풀을 향해 들어왔다.

그래서 범한이 탁한 숨을 검의 기운 위에 내뱉은 것이었다. 그러자 검의 기운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검은 멈출 기미가 없었고 범한의 취약한 목덜미를 향해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때 검의 세(勢)는 갈까 말까 했어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는데, 이것이 바로 사고검의 정수인 검의(劍意)였다!

범한은 몸을 극심히 떨며 연기처럼 변해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는 검의를 강하고 빠른 속도에 의지해 있는 힘껏 벗어났다. 하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범한이 후퇴하는 길목에서 평범한 강철 검이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후퇴하는 범한은 너무나도 빨라 검려 고수는 직접 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검은 가능했다. 평범한 강철검이 고수의 손에서 빠져나와 번개처럼 후퇴하고 있는 범한의 몸 아래쪽으로 날아들더니, 이내 그의 왼쪽 종아리를 그어 버렸다.

* * *

범한은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일단 조금이라도 속도를 줄였다가는 이들 9등급 고수 넷에게 포위될 테고, 그러면 한 사람씩 상대하며 포위를 뚫고 나갈 기회는 사라지는 거였다.

동이성 검려 제자들의 검술은 과연 신묘했다. 범한이 고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상황인데도 고수 손에서 빠져나온 검은 정확했고, 인정사정없이 범한의 종아리를 그어 버렸다. 그런데 그 광경은 얼핏 보면 범한이 멍청하게 자기 종아리를 상대방의 검에 가져다 댄 것처럼 보였다.

범한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또한 속도를 줄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모두의 예측을 뛰어 넘어 허공에서 몸을 한 차례 비틀기까지 했다. 그런데 비틀 때 각도가 너무 작아서 결국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순식간에 날카로운 검에 종아리를 공격당해 버렸다.

‘탕!’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모두가 순간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왜냐하면 범한의 다리가······ 잘려나가지 않아서였다!

오히려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범한을 막으려 했던 검이 무거운 망치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한편 종아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범한은 공중제비를 돈 후 매포 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곳 어둠 속에 유일한 돌파구가 숨어 있어서였다.

돌파구가 될 곳에는 오래된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꽃은 피어 있지 않았고 오래되고 묵은 가지를 가진 나무였다. 이리저리 뒤틀린 구불구불한 모양의 가지는 계속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범한은 최고 속도로 그 늙은 매화나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 돌파구를 뚫고 지나가야 안전하게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건 범한이 검려 고수들의 실력을 얕본 것밖에 되지 않았다. 9등급 고수 넷 중 둘의 검은 벌써 나와 있었고, 나머지 두 개의 검도 범한의 퇴로를 막으려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늙은 매화나무 뒤쪽 암흑으로 가 있던 터였다.

늙은 매화나무를 향해 고속으로 내달리던 범한이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싸늘한 기운이 번뜩이는 눈으로 늙은 매화나무를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뒤쪽에서 검으로 찌르려 하는 동작을 주시했다.

그런데 나무를 찌르려는 동작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건 일종의 시간상의 착각이었다. 그리고 고속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무언가 정해진 추세를 되돌린다는 건 사람 힘으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두 자루의 검은 절대 후퇴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늙은 매화나무의 뒤쪽 허공을 향해 돌진하고 있어 지극히 멍청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이 봤을 때 이 두 자루의 검은 엄청나가 위력적인 기세로 정확한 지점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그 지점은 바로 검 끝과 범한의 몸이 정확히 교차하게 되는 위치였다.

이때 범한은 패도의 공력으로 무장하고 강제로 속도를 높여 늙은 매화나무를 향해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두 개의 검 끝과 마주치게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말을 타고 골목 입구를 빠져나가는 찰나의 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범한 앞에 가로로 놓여 있던 단단한 늙은 매화나무 기둥은 범한과 부딪힌 순간 부드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단단한 강철이 순식간에 착 감기는 부드러운 손가락처럼 변한 것만 같았다.

범한은 달리는 속도 그대로 늙은 매화나무와 부딪혔다. 그래서 나무는 범한의 몸과 함께 앞쪽으로 밀렸고, 아무 장애물 없이 범한을 기다리고 있는 검 끝과 갈수록 가까워졌다.

그 누구도 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다음 장면은 범한이 이 기묘한 두 자루의 검에 가슴을 찔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늙은 매화나무가 모든 걸 바꾸어 버렸다.

매화나무의 기둥이 천천히 변형되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검 두 자루의 공격 기운 때문에 뒤쪽 수피가 잘게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나무 자체는······ 부러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았다. 마치 범한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해 주려는 듯 자기 몸으로 범한 앞쪽을 계속 가로막고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검려 제자 둘의 눈동자가 갑자기 반짝였다. 평생 이런 광경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매화나무는 이리저리고 꼬이고 꼬여 부러지지 않은 거였다.

그런데 범한의 패도의 기운이 뿜어낸 세는 분명 광폭했는데, 왜 매화나무는 부러지지 않은 걸까?

검 끝이 늙은 매화나무 기둥을 가볍게 찌르자 ‘푹푹’ 하며 두 번 작은 소리가 났다. 그러자 검의 공격 기운이 나무를 따라 위로 올라가 곧바로 범한의 심맥(心脉: 오장 육부에 모두 영향을 주는 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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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때 범한에게는 패도의 기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화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잎이나 그냥 나무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매화나무는 범한을 매단 채 기이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검려 제자들의 검을 교묘하게 피했다.

쓱쓱, 하며 잘게 잘리는 듯한 소리가 수없이 울렸다. 강철 검 두 자루의 살벌한 공격에 나무 기둥이 파편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가는 소리였다.

이에 범한은 하늘 가득 날리는 나무 파편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금 전 왔던 방향으로 사납게 날아갔다. 회색의 용처럼, 번개처럼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지 않던 뒤쪽의 검려 고수를 향해 날아가더니 협원의 나무문을 거칠게 들이받은 후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늙은 매화나무 뒤쪽에 있던 푸른 옷을 입은 검려의 두 고수는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차분했던 그들의 눈동자에서 잠시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왔다 갔는지 알게 되어서였다. 이에 은근히 흥분한 두 사람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껏 감탄하고 말았다.

범한은 처음에는 우레처럼 패도했다. 하지만 늙은 매화나무에 부딪히고 숨은 검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부드러운 바람이 되어 나무 기둥에 가볍게 착 달라붙었다. 그런 후 나무의 기세를 따라 움직이며 절묘하게 검려 제자들의 검을 피했다. 이어 범한은 나무의 탄성에서 오는 기세를 이용해 순식간에 다시 광포한 돌풍으로 변했고, 결국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 십삼랑의 거처인 협원으로 되돌아갔다.

검려에 매복해 있던 고수들은 범한이 도망가는 거라고 여겼다. 범한이 힘을 아끼고 있다가 물러난 게 결국에는 협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매복 작전이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검려의 9등급 고수 넷이 매복하고 있으니 그가 도망가지 않고 버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리 짧은 시간 안에 이리도 복잡한 계산을 해내다니. 심지어는 퇴로에 있던 늙은 매화나무와 검려 고수들이 모두 계산 범위 안에 있던 거라니. 범한의 퇴각과 전진은 간단해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적과 생사를 건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결심이 수도 없이 많이 담겨 있는 거였다.

하지만 검려 고수들을 가장 놀라고 경탄하도록 한 건 그가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방향 전환을 하는 점, 그리고 마음먹은 바에 따라 정기의 성질을 변화시킨 점이었다. 만약 범한에게 이런 신기한 능력이 없었다면, 그는 늙은 매화나무에 부딪혔을 때 나무를 부러뜨려 그 뒤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노리고 있던 두 개의 검에 찔렸을 것이다.

이 세상에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정기를 연마하고, 또한 그 두 가지를 모두 거의 최정점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범한처럼 패도의 공결과 자연스러운 천일도 심법을 이리도 자연스럽게 전환시키고, 그 전환이란 걸 이리도 쉬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푸른 옷을 입은 고수 둘은 두려움과 감탄이 섞인 상대방의 눈만 멀뚱멀뚱 보고 있던 거였다. 이 세상에서 작은 범 대인만 경국 황제의 패도의 공결과 북제 천일도의 자연스러운 법문(法門)을 동시에 익히고 있어서였다.

물론 동이성의 고수들은 오래 전부터 관련 정보를 상세히 연구해왔다. 그렇지만 범한이 찰나의 순간에 두 개의 정기를 동시에 펼치고, 모든 고수들의 예상을 깨고 돌파구를 정확히 찾아낸 건 그들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 두 개의 정기 순환 길이 있는 기이한 사람은 범한밖에 없어서였다.

* * *

협원으로 들어간 범한은 곧장 후실(后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낯빛이 살짝 누렇게 떠 있고 초점 없는 눈으로 침대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왕 십삼랑을 발견했다. 독에 당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는 순간 범한은 이유 모를 분노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에 범한은 바람처럼 침대 옆으로 달려가 오른쪽 손가락으로 왕 십삼랑 옆을 노렸다. 거기에는 검으로 왕 십삼랑의 목을 겨누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범한이 너무 빨리 들어온 탓에 그 여인은 자신의 다섯 사숙이 동시에 출격하고도 적을 죽이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집안까지 들어온 사람을 향해 잔뜩 놀라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만 지을 뿐,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범한의 손가락이 자신을 향해, 그리고 자신 급소를 찔러 죽이기 위해 맹렬히 다가오는 걸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왕십삼랑의 눈에서 잠시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스쳤다.

범한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살짝 암담해져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이에 손가락에서 나가는 바람이 살짝 비켜나가 검려 여제자의 왼쪽 가슴을 맞추었다.

그러자 검려 여제자는 끄응, 소리와 함께 침대로 엎어져 혼미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말하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다. 밖에 검려의 9등급 고수 넷이 쫓아오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왕 십삼랑에게 왜 중독되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고, 서둘러 그를 등에 업고 발끝으로 침대 위를 거칠게 밟기나 했다.

그러자 ‘와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꽃이 조각되어 있는 커다란 침대가 엎어졌다. 범한은 들어왔던 방향을 통해 다시 협원 밖으로 직행했다. 퇴각, 전진, 다시 퇴각 중인 거였다. 범한은 총 세 차례에 걸쳐 방향 전환을 했고, 그때마다 매우 기이한 방법을 썼다. 그건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고, 검려 고수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이었다.

검려의 9등급 고수 넷은 경탄, 분노, 경계심 등 복잡한 감정이 뒤엉킨 상태로 범한이 협원으로 들어가는걸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분명 작은 사제를 데리고 협원 후방 담벼락을 통해 포위를 뚫고 나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들의 생각과 달리 왕 십삼랑을 들쳐 업고 대문 쪽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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