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850화 (850/1,108)

850화 범한이 나타나자 잘린 매화나무 가지 (2)

운지란이 보일 듯 말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눈꺼풀을 맥없이 두 어 번 위로 올려 두어 차례 싸늘한 빛을 번뜩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중요한 인물이 검려로 찾아 와 스승 대인과 중요한 대화 중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 담판이 성공한다면, 동이성은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나 강대한 경국을 상대로 가장 격렬한 저항을 할 것이었다.

운지란이 눈꺼풀을 치켜뜨고는 성주 대인을 주시했다.

“저는 투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이성 성주는 살짝 놀랐다. 상대방이 이리 시원하게 대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했다. 그런데 사실 성주는 요 2년 동안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떤 선택을 하든 사고검 대인이 부상을 이겨내고 과거의 신과 같은 위력을 되찾는 것보다 기꺼운 일은 없었다.

운지란을 바라보고 있던 성주가 주저하며 물었다.

“하온데······ 검성 대인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최근 2년 동안 어르신을 단 한 번도 뵙지 못했습니다.”

운지란은 그의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낯빛은 살짝 괴이하게 변해 있었다. 검려의 수제자인 그도 지금까지 스승 대인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싸우실 것인지 투항하실 것인지 알지 못한 거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지금 검려에 와 있는 대단한 인물을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스승님께서도 평생 심혈을 바친 것을 이리 사지로 몰고 가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성주 대인이 양 미간을 강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런 후 운지란을 잠시 바라보고는 넌지시 물었다.

“2년 전 대동산에서 검성 대인께서 경국 황제에게 다치신 건 천하가 알고 있습니다. 저처럼 평범하고 우둔한 이들은 검성 대인께서 경국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나 최근 2년 동안 가끔 들려오는 소식을 보니, 마지막 제자인 왕 십삼랑이 경국 범한과 교류를 한다고 하더군요. 운 대사께서는 이 일에 대해 어찌 보시는지요.”

성주의 마지막 말에 운지란의 표정이 짐짓 엄숙해지더니 그가 위엄 있게 말했다.

“십삼랑은 제 사제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스승님께서 안배하신 것입니다.”

“그와 범한이 잘 지내는 게 검성 대인의 안배이기에 제가 이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성주가 운지란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운지란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예전부터 스승님의 이와 같은 안배가 한없이 오싹했던 터였다. 스승 대인께서는 평생 오만하고 광폭하게 사셨는데 임종 직전에 기꺼이 원한을 버리고 암암리에 경국과 접촉을 하시려 하다니. 그건 운지란 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십삼랑아······!’

운지란이 속으로 탄식한 후 자기 자신을 향해 말했다.

‘이 사형은 너에게 그 어떤 반감도 없단다. 스승님께서 너에게 검려를 물려주신다면, 나는 네 명령을 받들 것이니라. 하나······.’

주안상 위의 등불이 별안간 어두워졌다 밝아지며 한껏 싸늘해진 운지란의 얼굴을 음침하게 비추었다. 그가 봤을 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검려 내부에서 진행 중인 중요한 담판을 경국 사람이 훼방 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검려 밖에 이미 무수히 많은 고수를 매복시켜 놓고, 매포 협원(梅圃夹院) 밖에도 고수 여럿을 보내놓은 터였다.

운지란이 술잔을 들고 찔끔 한 모금을 마셨다.

“십삼랑 쪽은 제가 이미 안배를 해 놓았으니, 성주 대인께서는 염려 놓으시지요.”

그러자 성주가 아주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거 참 잘 되었습니다. 경국의 범한이 직접 오지만 않으면 된 것입니다.”

“그 작은 범 대인이란 자는 지금 오는 중입니다.”

운지란이 눈동자에 엄숙한 기색을 담아 차분하고 결연하게 말했다.

“하나 그가 감히 혼자서 막내 사제를 만나러 온다면, 저는 그자를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 * *

그런데 범한은 이미 동이성에 도착해 있었다. 더군다나 그림자와 함께 여행자처럼 동이성 성주부의 위로 날렵하게 솟구친 처마까지 구경한 터였지만 동이성 측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범한도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일단 검려 첫 번째 제자 운지란이 동이성을 향한 충성심과 자기 내면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검려 호위에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왕 십삼랑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경국에서 온 사람을 이 땅에 영원히 남겨두려 한다는 거였다.

이제 막 밤으로 접어들었을 무렵, 범한은 동이성 근교의 어느 협원 밖에 와 있었다. 야트막한 협원 담벼락에 꽂혀 있는 푸른 깃발을 보는 순간 범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문을 두드리기보다는 이리저리 길을 돌아 매화 정원 후방으로 들어가 줄곧 자신을 기다렸을 왕 십삼랑과 만나려 했다.

범한은 매화나무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후문으로부터 약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협원 안에서 개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였다. 십삼랑은 범한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자신이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말한 적 있었다.

물론 개는 이미 잘게 잘려 개고기 전골의 식재료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매화나무에서는 고작 가지 하나만 떨어질 수는 없는 거였다.

범한이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눈꺼풀을 살짝 아래로 내리 깔고는 앞 쪽에 있는 매화나무를 주시했다. 누군가가 매복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누군가가 모두 고수란 걸 알아차린 거였다. 왜냐하면 그가 나타나는 순간 곁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매화나무 가지 하나를 잘라버렸고, 곧이어 사방에서 강렬하고 살벌한 검의(劍意: 검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의지, 그로 인한 살벌한 기운 등을 의미한다)가 스며들어 와서였다.

십삼랑이 왜 자신에게 사전에 경고를 해주지 않았는지 범한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대신 동이성이라는 이 괴상한 지역이······ 과연 9등급 검 고수들의 양산지란 건 제대로 알게 되었다.

범한은 문득 왕 십삼랑의 푸른 깃발이 자신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주었던 나날들과 매포(梅圃: 매화나무 정원) 협원에서 죽은 충견들이 고마웠다. 그들이 있었기에 범한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조금 전이라는 찰나의 순간에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건 검들의 기운이 만들어낸 포위권 바깥쪽 측편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범한이 발바닥을 바닥에 대는 순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고수들 중 하나가 더는 검의를 통제하지 못하고 공중을 가르고 공격을 개시해 범한 앞에 자신을 드러냈다.

살벌한 검의가 빈 공간으로 떨어지더니, 곧이어 여러 개의 맹렬한 검의가 뒤따랐다. 비록 완벽한 원형을 그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 방향에서 독사처럼 범한의 몸을 향해 습격해 들어왔다.

범한은 왼쪽 태양혈에 침을 찔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오른쪽 눈에서 살짝 쓰라린 느낌이 들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오른쪽 팔의 솜털이 모두 곧추서는 기분이 들었다.

범한은 산골짜기에서 진씨 가문에게 습격을 받았을 때, 그리고 신궁 연소을이 자신에게 활을 겨눴을 때와 이와 같은 위험을 감지했었다. 그리고 이번 건 최근 들어 가장 오싹하게 느껴지는 위험이었다.

살의를 띤 검의 기운은 총 다섯 개였다. 제일 먼저 매화 가지를 자른 사람의 공격만 살짝 약했고, 나머지 네 사람은 하나 같이 고수였다. 고요했던 한밤의 매포(梅圃)에서 갑작스레 가공할만한 검의가 나타나더니 범한이 도망갈 수 있는 몇 개의 도주로를 알게 모르게 모두 막아 버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한밤에 별안간 9등급 고수가 넷이나 나타나다니! 범한이 앞서 감탄했던 것처럼 동이성이라는 이 괴상한 지역에는 그야말로 고수들이 득시글한 거였다.

이런 식의 매복 공격을 받으면 누구든 심장이 떨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범한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눈꺼풀까지 아래로 내리깐 채 주변 세 개 방향에서 전해져 오는 검의를 느끼기만 할뿐 조금도 움직이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검 다섯 자루가 꼼짝 않고 가만히 있어서였다.

* * *

초반 맹렬한 공격의지를 보였던 검의는 순식간에 평온한 중립 상태로 돌입한 터였다. 그런데 이러한 평온한 중립 상태에서도 결연한 기세는 깃들어 있었다. 격노한 독사처럼 가늘고 빳빳하게 편 긴 몸을 뒤쪽을 향해 살며시 치켜들고 사냥감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든 치명타를 날리기 위해서였다.

공기 중에서 점점 스스슥 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형의 힘이 허공을 가르고 그곳에 검의 기운으로 만든 무수히 많은 줄을 넣고 있는 것만 같았다. 즉 매포 협원의 전방 공간이 무수히 많은 작은 구역으로 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누구라도 감히 이 공간에 들어갔다가는 날카로운 검의 기운에 의해 무수히 많은 살덩어리로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이건 마치 왕 십삼랑 거처로 들어가려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범한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들이 숨겨 놓고 발산하지 않는 살기를 느낀 때문이었다.

검들이 세력을 구축하기만 하고 공격을 않는 건 범한이 내딛은 첫 발이 애당초 무척이나 신묘해서였다.

그 발걸음은 때마침 포위권 가장자리로 떨어졌고, 그 바람에 매화가지 하나가 잘려가도록 유도하는 게 되어버렸다. 아울러 오랫동안 진을 치고 공격 준비를 하고 있던 검의 기운을 살짝 정체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검려에 매복해 있던 9등급 검객들은 대체 누가 나타난 건지는 분명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을 통해 상대방의 경지를 가늠한 건 있었다. 그래서 섣불리 공격에 나섰다가는 아주 잠깐이지만 상대방에게 공격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틈이나 구멍이 생겨도 결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9등급 고수 넷이 동시 출격한다는 건 그들도 침입자를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경국의 섭류운이거나, 실력이 심후해 가늠하기 힘든 경국 황제일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검 다섯 개 중 하나는 기운이 약한 게 침묵하고 있었고, 나머지 네 개는 범한이 도망갈 수 있는 방향을 향해 어둠 속에서 천천히 계속 각도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먼저 공격할 리는 없었다. 먼저 공격하게 되면 특정 방향으로 향하게 될 터이고, 미리 방향을 잡았으니 실수 할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 실수로 생긴 틈은 범한이 노리고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도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9등급 강자 넷이 둘러싸고 공격하는 건 실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범한만큼 강했기 때문에 이는 오싹한 일이었다. 범한은 지금껏 셀 수도 없이 많은 고수들과 겨뤄왔다. 하지만 9등급 고수 넷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그로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범한은 더 오만방자하게 굴고 싶어도 한꺼번에 이 네 명을 이길 거란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비록 이들 9등급 중에 운지란, 랑도, 해당타타 같은 절정의 9등급 상의 강자는 없었어도 말이다.

범한은 눈꺼풀을 아래로 살짝 내리깐 채 발아래에 떨어져 있는 잘려진 매화 가지를 주시하고 있어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주변에 빡빡하게 차 있는 검의 기운이 자신을 옭죄어오고 있어 너무나도 난처한 지경이었다. 이에 그의 정신 상태는 반등과 붕괴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몸에서는 천천히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나기 시작한 땀도 어느새 그의 이마 경사면을 타고 내려와 미간과 코를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눈으로 파고든 땀방울 때문에 살짝 쓰라리고 따가워 범한이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사방에 있는 강자들은 여전히 꿈쩍도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포위하고 있는 이 고수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이제 곧 움직일 것만 같아서였다.

* * *

범한은 발을 바닥에 내딛는 순간 자신에게 벗어날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지 왕 십삼랑이 협원에서 어찌하고 있는지 몰라 발걸음을 멈춘 채 억지로 포위를 뚫고 들어가는 모험을 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매포 협원 밖에 이렇게나 대단한 고수들이 매복해 있는 것, 그리고 또 운지란이 동원할 수 있는 검려 제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건 범한으로서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그는 일단 고생스럽더라도 참아 본 거였다.

그러다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들었을 때 그는 협원으로 들어가려던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맑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체내 탁한 기운을 모두 뱉어냈다. 그러자 몸 안에 있는 두 개의 길이 미친 듯이 정기를 운행시키기 시작했고, 범한은 몸 안에 있는 가장 순수한 패도의 정기에 의지해 맹렬히 앞으로 나아갔다.

어둠 속에서 먼지가 크게 일었다. 그리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범한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어느덧 바람처럼 후방 쪽으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 오늘 범한이 마주친 자객들이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범한이 지극히 패도한 정기를 순식간에 운행시킨 걸 따라잡지 못하고 그가 광폭한 속도로 도망가는 걸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타난 자객들은 모두 9등급이었다. 그놈의 뒈질 9등급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