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9화 범한이 나타나자 잘린 매화나무 가지 (1)
“진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림자가 범한 옆에서 한껏 소리를 낮추고 물어보았다.
“양인들은 동이성만 믿지요. 그러니 경국 사람 입장에서는 저들 파란 눈을 가진 이들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범한은 별다른 말은 않고 웃기만 하며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래봬도 나 이 사람, 전생에 유학생 전용 기숙사에서 밤새 마작을 가르친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양인을 봤다고 이상하다 생각할 리 없지요.’
“양인들은 왜 우리 경국을 믿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은 기껏해야 천주에서 며칠 묵는 게 다이고, 경국 내부까지 들어올 생각을 않더군요.”
범한이 아까보다 말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북제는 출항할만한 적당한 곳이 없으니 그렇다 쳐요. 한데 우리 조정에서는 강남에 3대 항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특히나 천주항은 들어선지 이미 20여 년이나 되었어요. 그런데도 왜 동이성의 지위를 완전히 빼앗지 못한 걸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림자가 삿갓을 더 푹 눌러쓰고는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듣자하니, 20여 년 전에는 천주 수군과 양인 간에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는데, 훗날 천주 수사가 일을 내는 바람에 수많은 양인들이 놀라 도망가서라고 하더군요.”
그러자 범한은 이맛살을 잠시 들었다 놓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사실 오늘 성으로 들어오는 동안 주변을 살펴보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 또 대륙 내 다른 저자거리와 완전히 다른 동이성의 분위기를 꼼꼼히 음미하면서 범한은 이미 그 안에 숨은 원인을 점점 명확히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동이성이 계속 천하 상업의 중심지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관건은 이곳 백성들의 성향이 자유롭고, 상인들이 이익에 맞추어 언행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로에는 치안을 유지하는 성주부 관원을 제외하면 관부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서였다.
물론 범한은 무역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동이성의 무역이 기본적으로 어떤 계약 관계의 틀 안에 있는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은 들었다. 왜냐하면 성주부든 검려든 상인들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시장 조례 같은 건 있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반면 경국 강남은 상업이 발달하기는 했어도, 발달 정도나 번화한 상황은 많은 부분 황실 금고라는 특수한 생산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강남 상업은 황실 금고라는 독점적인 생산자에 기대고 있었다. 그래서 온전히 조정(朝廷) 또는 범한 자신이 가격 결정을 하는 바람에 변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적었다.
다시 말해, 경국 강남의 상업은 경국 조정의 독점적인 상업 활동이었다. 그리고 과거 이름을 날렸던 명씨 가문이든, 영남 웅씨 가문이든, 천주 손씨 가문이든 모두들 황실 금고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이들에 불과했다. 그러니 조정에서 이 세 가문을 제거하려 든다면, 그들은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조정이 상인들과 맺은 신성한 계약 따위를 신경 쓸 리 없어서였다.
한편 동이성의 상업은 대등한 교역이라는 기반 위에서 세워졌다. 그래서 후안무치하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경국 조정 같은 세력도 없었고,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해 자기는 아무 손해도 안 보면서 명씨 가문의 피 3천 되를 흘리게 한 범한 같은 이도 없었다.
상인 입장에서는 후자의 환경에서 훨씬 더 믿을 만하고, 장기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번영을 누리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동이성이 천하 상인들이 집결한 자치령 지역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상인들은 자신의 생사를 황제의 권한이 아닌 하늘에 맡긴 채 이곳에서 자신들의 땀과 지략으로 이익을 도모하게 된 거였다.
범한이 어느 대형 상호가 적힌 문 앞에서 시선을 거둘 때였다. 불현 듯 황당한 느낌이 훅하고 치고 올라왔다. 만약 동이성이 경국으로 기운다면? 황제 페하께서는 강력한 권력욕을 지닌 분이신데 이들이 50년 간 변치 않고 그대로 살 수 있도록 놔두실까?
본인 치하의 영토에서 이리 많은 상인들이 그분의 명을 따르지 않고 사는 게 될 텐데, 과연 가만히 계실 수 있을까?
경국의 강력한 황권을 빛내주고 있는 광배가 정말로 동이성 머리 위에 강림한다면, 자유롭게 번영할 수 있을까? 또 속으로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이 거대성이 현재의 활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범한과 그림자는 눈길도 가지 않는 허름한 객잔을 골라잡았다. 그리고 말과 마차 갈무리를 잘 해놓은 후 다시 큰길 쪽으로 걸어와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날이 아직 밝기에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두 강자는 아예 무슨 여인네라도 된 듯 해변에 들어선 떠들썩한 거대 성 안을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동이성의 크기가 큰 건 천하 상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몰려 무역량이 많은 것도 있었지만, 각양각색의 기인들이 몰려든 때문도 있었다. 예를 들어, 과거 강양대도로 불렸던 왕계년, 심지어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섭가 아가씨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눈먼 소년 종도 있었다. 기인이 있으면 자연스레 전설과 전기(傳奇)가 생겨나기 마련이고, 더군다나 사고검처럼 압도적이고도 빛나는 인물도 나타나자 수많은 방랑자들이 찾아와 이곳에 정착했고, 경국과 북제의 많은 젊은이들도 이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다.
심지어 저 멀리 초원의 서호와 북쪽 설원 지대에 사는 북만도 만 리나 떨어진 이곳으로 기꺼이 찾아왔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나자 동이성 거주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고, 성의 규모도 날로 확대된 거였다.
대로 옆으로 들어선 각양각색의 건축물을 바라보며 범한이 혀를 쯧쯧, 차며 기이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전생 때 중국 상하이의 와이탄과 비슷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와이탄에는 서양식 건축물이 많다면, 동이성 내 건축물은 대륙의 각양각색의 양식이 모여 있었다. 북위를 계승한 북제의 한껏 위로 치켜 올라간 검푸른 처마, 경국의 장엄하고 엄숙한 정방형 건물, 초원의 둥근 아치형을 닮은 가옥, 남조의 화살 모양의 금붙이를 붙인 건물 등등이 있었다.
듣기로는 과거 동이성에서는 양인들의 건축물이 유행했다고 한다. 한데 훗날 섭가가 크게 일어나 양인의 지위가 바닥으로 추락하자, 그 후 이 대륙에서 일어나는 무역은 순수입이 늘어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양인들은 비단과 차, 도자기를 사기만 했지 만들어내지는 못한 때문이었다. 반면 그들이 판매한 지극히 귀한 유리와 거울 같은 물건은 옛 섭가에서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품질도 더 좋고 가격도 싼 때문이었다.
이에 해상 무역에서 바다 밖 대륙에 있는 왕국들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동이성에서는 이미 그들의 물건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재를 할 때는 반드시 은을 사용하도록 해서였다. 만약 전해지는 소문처럼 십여 년 전에 바다 밖 대륙의 어느 황무지에서 대량의 은이 매장된 은광을 찾지 못했다면, 그들은 동이성의 교활하고 악랄한 상인들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옛 섭가에게 국고를 홀딱 털렸을 것이다. 그리고 더는 그곳 귀족들의 사치품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범한이 내지른 감탄사에 그림자가 냉랭하게 반응했다.
“양인은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 그들의 무력은 그들의 법사처럼 겉보기에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우리에게 가혹하리만큼 착취당하고 매년 못 살겠다 아우성 쳐대는 것입니다.”
그림자의 말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환생해 이 세계에서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서였다. 그건 바로 옆에 있는 그림자가 매처럼 날아가 법사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는 장면이었다.
해가 살짝 기울었는데도 동이성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문을 닫는 점포는 점점 늘어났지만 횡으로 놓인 퇴폐적이고 음탕한 기운이 가득한 거리에서는 오히려 홍등을 밝히기 시작해서였다.
“구경은 다 하셨습니까?”
그림자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범한이 손가락으로 삿갓을 살짝 눌러 내려쓰고는 잠시 아무 말 않다가 대답했다.
“네.”
범한은 다른 세상에서 온 여행자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단순한 여행자는 될 수 없었다. 그는 귀하게 얻은 동이성에서의 반나절 여행을 일단락 한 후 어둠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관광의 즐거움과 그로부터 얻은 기쁜 마음을 벗어버리고 다시 검은색 비수를 챙겼다.
그림자가 아주 살며시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런 후 얼음 위에 꽁치를 올려놓고 파는 일렬로 늘어 선 가판대를 스치듯 지나 작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그가 쓰고 있던 삿갓도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해를 비추는 영광된 자격을 잃고 서쪽으로 떨어지게 된 태양은 동이성의 이런저런 높은 건물에 막혀버려 거대한 암흑이 되고 말았다. 이에 범한은 암흑 속으로 걸어 들어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 * *
동이성의 성주부 안에 환하게 등불이 밝았다. 아직 온기가 남은 석양이 성주부의 높은 처마를 비추고 있으니 아직 완전히 밤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종들은 동이성에 어둠이 찾아오는 게 두렵기라도 한 듯 일찌감치 등불을 켜버렸다.
경국과 북제의 사절단은 며칠 더 지나야 동이성에 도착할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검려의 대종사는 이번 검려 개방을 통해 동이성의 향후 방향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두 더 잘 알다시피, 검성 대인이 고인이 되는 순간, 동이성이 어떤 선택을 하든, 자유로운 상인으로 사는 걸 위안으로 삼았던 이곳 백성들에게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강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긴장하는 건 당연히 동이성 성주였다. 동이성이 경국이든 북제든 그들의 식민지가 되면, 이 명의상 성주는 자연스레 존재 이유가 사라져서였다.
그를 명의상 성주라고 한 이유는 동이성의 진정한 주인은 사고검과 검려이고, 그는 단순히 부귀영화나 누리며 간단한 행정 절차나 대리집행 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중년의 검객과 마주하고 앉아 있는 성주 대인이 잔뜩 걱정하는 표정으로 작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 대사, 불길한 말이기는 하나, 검성 대인은 지금으로서는 가망이 없어 보이십니다. 하여 대사께서 현재 검려의 제일 웃전이시니,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검려의 첫 번째 제자인 운지란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스승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하니 성주 대인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지요.”
“제 자신 때문이 아니라 성 백성들이 염려되어 드리는 말입니다.”
성주가 운지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만약 경국이 정말로 동이성을 갖게 된다면, 저는 경국 경도로 가 할 일 없는 후작 어르신 노릇이나 하게 될 터이니······. 하나 저의 동이성은 힘들게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철천지원수인 경국 황제에게 이 동이성을 두 손 모아 공손히 바쳐야 할까요?”
운지란도 알다시피, 성주가 일부러 이렇게 허울 좋게 말한 건 사실 하루아침에 동이성이 무너지고 검려가 해산될 걸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출로를 염려해서였다.
이 자가 정말로 경국 경도에서 할 일 없는 후작 어르신 노릇을 할 만한 배짱이 있었다면, 운지란에게 이리 정중히 부탁할 리도 없었다. 경국 황제가 야심가이고 성정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음험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성주가 할 일 없는 후작 어르신 노릇을 하러 경국으로 간다면, 2년 도 못 가 독주나 마시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지란도 자신과 성주부 쪽의 생각이 지극히 일치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9등급 상의 강자이기 때문에 동이성이 함락된 후 자신의 장래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았다. 경국 황제도 자신을 환영해 줄 게 분명해서였다. 다만 그는 어려서부터 동이성에서 자라 이 도시와 검려에게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귀속감을 느끼며 이곳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되었든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해 동이성이 경국의 영토로 편입되도록 할 수는 없었다.
만약 천하 양측 세력 밖에서 유유자적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동이성 입장에서는 최고의 길을 걷는 거였다. 하지만 국면을 전환시키지 못한다면, 운지란은 차라리 비교적 약한 북제 조정과 연합해 경국 공략에 나설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