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844화 (844/1,108)

844화 봄이 왔으니 길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1)

따뜻한 담비 가죽 외투를 입고 눈보라 속으로 점점 사라져가는 왕 십삼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은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범한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계속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암투와 음모에 시달려 마음이 지친 상태였고, 단순하고 순수한 인간관계를 맺는 즐거움을 느낄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멀리 눈 내리는 광경을 바라보던 범한이 어떤 기묘한 감정을 느끼고는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내년 봄에 검려가 마지막으로 한번 열릴 때 지금껏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검은색 마차 옆으로 걸어가 오른쪽 무릎을 들고 고개를 숙인 뒤 마차 난간에 신발 밑창을 비벼 밑창에 묻어 있는 눈과 진흙 찌꺼기를 떼어냈다. 어지럽게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한참 뒤에 두꺼운 발을 열고 마차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순간 얼굴에 후끈한 공기가 덮쳤다. 눈발이 날리는 밖은 무척이나 추웠지만, 넓은 감찰원 마차 안은 특별히 제작한 소형 난로가 내뿜는 열기로 봄날처럼 따뜻했다. 마치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수건을 건네받은 범한이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말했다.

“떠날 사람도 떠났는데, 우리도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게 수건을 건네준 섭령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속눈썹 아래 밝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아주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는 그분을 배웅하러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왕 십삼랑을 배웅하러 온 게 아니면? 저와 눈 구경이라도 하려고 여기 오신 겁니까?”

범한이 재미없다는 말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는 두 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달 넘게 만났으면서도 어떻게 청주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을 수 있습니까.”

“스승님, 저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섭령아가 고개를 들어 범한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년에 사고검이 세상을 떠나면 동이성 안은 두 파벌 간의 의견으로 갈라져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왕 십삼랑이 이번에 동이성으로 돌아갔으니 걱정되는 마음이 어찌 없겠습니까. 비록 사고검이 가장 아끼는 마지막 제자라 해도 어떤 인맥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범한이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아마도 결국에는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대인께서 도와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왕 십삼랑이 감찰원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해주지 않았습니까.”

섭령아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 일은 말하고 싶지 않군요. 왕 십삼랑이 저를 위해 일을 해주었으니 저도 당연히 그에 따른 보답을 할 겁니다.”

범한이 담담하게 말했다.

“사고검은 그동안 저에게 충분한 성의를 보였습니다. 비록 사고검은 황제 폐하와 어떤 거래도 하고 싶어 하지 않겠지만 제가 잘 말한다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섭령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문제는 왕 십삼랑이 동이성으로 돌아간 뒤입니다. 아마도 1년 동안은 그곳에 머무를 테니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째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까?”

2 황자가 세상을 떠난 뒤 섭령아는 과거 명랑하고 제멋대로이던 모습과는 달리 말수도 줄어들고 성숙하게 변했다. 비록 범한처럼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허물없이 웃고 떠들었지만 범한이나 임완아나 모두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걸 알았다.

청주에서 왕 십삼랑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국경지대 군사 안에만 머물러 있던 섭령아의 마음도 조금은 그곳을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범한은 이런 변화를 즐겁게 바라보았지만 왕 십삼랑의 신분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많은 난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에 잠겨 있던 섭령아가 최근에 범한을 골치 아프게 만든 일을 떠올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약약이 일은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범약약의 혼사가 언급되자 범한이 인상을 팍 썼다. 원래 그는 정왕 부자가 들고일어나면 황제 폐하가 은근슬쩍 혼사를 없던 일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황제 폐하는 오히려 범씨 집안이 이미 정왕과 혼인 관계를 맺는 걸 거절했다는 핑계로 뜻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일단은 두고 봐야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있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저희 체면을 생각해서 강제로 일을 추진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범한이 입술을 샐쭉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이가 홍성이에게 시집가기를 원한다는 뜻만 밝혀도 일을 해결하기 쉬워질 텐데. 최소한 황제 폐하와 싸울 명목은 생기는 셈이잖아.’

“저는 하종위가 어떤 사람인인지는 모르지만, 소문을 들어보니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군요. 대인께서 이 일로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섭령아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화를 낸다고요?”

범한이 웃더니 모호한 말로 상황을 설명했다.

“하씨 집안과 범씨 집안이 혼인하면 도시락밥이 되지 않겠습니까?”

“무슨 밥이요?”

“팔보반 말입니다.”

섭령아가 뭔 소리냐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완아가 저보고 오늘 왕 대도독이 일석거에서 연회를 여니 대인께 늦지 않게 가라고 말하라 했습니다. 늦지 않게 가십시오.”

섭령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범한의 머릿속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 떠올랐다. 1 황자가 측비를 들일 수 있도록 범한은 용감히 나서서 왕씨 집안 아가씨를 교육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았었다. 하지만 곧이어 황실에서 범약약 혼사를 추진한다는 말을 듣고는 불같이 화가 난 범한은 왕씨 집안 아가씨를 호되게 훈계했고, 결국 왕씨 집안 아가씨가 울며불며 저택을 뛰쳐나가면서 그는 경도 수비 사비 대장에게 상당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범한은 이 일로 왕동아가 화가 상당히 났으니 다시는 저택에 찾아오려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며칠 뒤 왕동아는 사비 장군에게 작은 범 대인의 제자가 되고 싶으니 자신을 다시 범씨 저택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게다가 예의 바른 말투로 자신은 이미 상당히 많이 달라졌으며 더는 이전처럼 제멋대로 거칠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까지 했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갑자기 철이 든 모습을 보일 줄은 범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왕씨 집안 아가씨가 자신의 더러운 성격까지 고치고 싶을 정도로 1 황자를 정말로 좋아하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 집안 아가씨 성격상 고집을 꺾고 이렇게까지 고분고분 행동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오늘은 연경 대도독인 왕지곤이 업무 보고를 위해 경도로 돌아온 지 둘째 날이 되는 날이었다. 왕 대도독은 연회에 범한을 초청해 자신을 대신해 딸을 교육해준 것에 감사를 표시하고 싶어 했다.

“왕동아가 왕비의 팬이라고 하던데.”

범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혹시 만나본 적 있습니까?”

섭령아는 팬이란 단어가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일고여덟 살이었던 왕씨 집안 아가씨가 지금처럼 불같은 성격으로 자랄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지금은 많이 온순해졌습니다.”

범한이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며 말했다.

“그 옛날 누구처럼 회초리 몇 대 맞으니 철이 들더군요.”

그 말에 얼굴이 굳은 섭령아는 과거 경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범한을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저를 말하는 겁니까?”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범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당시에는 훈계해야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하시더니 이제는 훈계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시는군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가운데 마차는 눈에 깊은 바퀴 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경도로 돌아갔다. 마차 안 열기에 갑갑해진 범한이 창문 발을 살짝 열고 시원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창밖에 보이는 눈이 쌓인 나무들과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지금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하종위에게 위협을 주고 있지 않았지만,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내년에 동이성 문제를 해결하면 경국을 위해 상당한 공로를 세우게 되는 셈이었으니 황제 폐하도 더는 매정하게 그를 핍박하지 못할 것이었다.

눈보라를 맞으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는 말을 바라보던 범한은 순간 자신의 처지가 저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말은 채찍질에 마지못해 눈보라를 뚫으며 거대 마차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닐 테니 말이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찬 공기가 범한의 가슴과 가슴 안에 숨겨진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가 마차 창문 발을 놓고 다시 두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집중했다. 그는 서량로 일이나 동이성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사실 황제 폐하의 뜻에 맞춰 움직이는 졸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범한은 이런 상황을 뒤엎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 만큼의 용기가 없었고, 더욱이 속마음을 예측하기 힘든 황제 폐하에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만약 오죽 아저씨와 상자가 곁에 있었다면 상황은 분명 아주 많이 바뀌었을 것이지만, 그런 변화가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고개를 가로로 흔들며 골치 아픈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오죽 아저씨는 비록 명의상 범한의 종이었지만 사실은 범한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다름없었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탐색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인 점은 황제 폐하가 이미 많이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최근에 범한과 정왕의 반항에 시달리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관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면은 최소한 황제 폐하가 광채가 빛나는 높고 높은 신단 위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 * *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경국은 따뜻한 바람이 불자 사방을 하얗게 덮고 있던 눈과 얼음이 사라지고 곳곳에서 비취색의 연한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온 사방이 봄 경치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경국 동북쪽에 위치한 연경은 아주 중요한 행렬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3월에 접어들어서 관도 양쪽에 나뭇가지에는 푸른 새싹이 피어나고 꽃이 만개해 있었다. 이에 나뭇가지가 봄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이 마치 꽃다발을 들고 어서 오라고 인사하는 환영인파 같았다. 아무래도 식물들도 이번 행렬의 중요성을 아는 모양이었다.

연경은 외진 북쪽에 위치해 있어 경도에서 가려면 효산까지 직진한 뒤 다시 북쪽으로 돌아 창주의 평탄한 관도를 통해 동북 방향으로 가야 했다. 수십 년 전 북위의 성이었던 당시 연경은 남경(南京)으로 불리었다. 다만 경국의 위대한 황제 폐하가 전투로 이곳을 점령한 뒤 제비가 진흙을 물고 돌아온다는 뜻에서 이름을 연경으로 바꾸었다.

연경이 1천여 년 전에 경국 조상들의 땅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연경의 이름은 최소한 경국에게 정당한 명분을 주었다. 게다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온순해서 통치자가 바뀌는 데도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국은 통치한 지 채 3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수월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