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843화 (843/1,108)

843화 절정에 이른 겨울 (2)

범한의 일장 연설이 끝나자 범약약이 아무 말 없이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둘둘 말았다. 이런 모습은 이 세상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범약약이 긴 탄식을 내뱉고는 범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오라버니,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구는 걸까?”

다른 귀족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천하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곳에서 봐도 범약약이 결혼과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이전에 정왕부의 혼인 요청을 거절한 뒤 경도를 떠나 고하의 제자로 들어가 여러 해 동안 의술을 배운 그녀는 이제 다시 황제 폐하가 정한 두 번째 혼사를 거절하려 하고 있었다.

황제의 권한이 막강한 봉건 사회에서 황제 폐하가 정한 혼사를 거절한 집안은 많은 위험과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범약약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집안이 불안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는 게 걱정되었고, 이 일로 인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녀가 너무 제멋대로라서 무책임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욕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범한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몬 드 보부아르의 페미니즘 저서인 《제2의 성》을 읽어 본 남자였다. 그래서 그는 한 번도 누이의 결정이 비난한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이 세계에 살았던 섭씨 성을 가진 여자도 《제2의 성》을 읽어 보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나 없었고, 범한 만이 이 세상에 굳건히 서서 누이가 하고 싶은 데로 살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있었다.

그는 연장자가 마음대로 혼인 상대를 지정해주지 않아도 되는 아름다운 세상, 최소한 그런 방면에서는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세상을 회상하고 그리워했다.

“너 바보니?”

걱정하는 누이를 바라본 범한이 정색하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누누이 자신의 행복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말했잖아.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 말고 다른 일에서는, 그게 어떤 일이든 희생하거나 양보할 필요는 없는 거야. 충성하고 효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와 나의 행복보다 중요하지는 않은 거라고.”

“하지만 그게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 건 아닐까?”

범약약은 오라버니인 범한의 정색에도 물러서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왜냐하면, 내 일 때문에 집안도 불안해지고 경도에서 여러 말들이 돌아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한이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며 손을 거세게 내저었다.

“비록 네가 사사처럼 오랜 시간 나와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교육을 받았잖아. 그래서 나는 네가 앞으로 크게 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나는 네가 이 세계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라. 도대체 너는 왜 자신이 너무 제멋대로 군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지금 모두 담주에 계시니 경도에서 네 보호자는 나야. 그러니 제멋대로 군다고 해도 걱정할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솔직히 이기적인 면에서 보면 내가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지. 더욱이 가족들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범약약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촉촉한 것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일의 당사자인 그녀는 경도에 온 뒤 오라버니가 자신의 혼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쏟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과거 정왕부의 혼담을 거절하기 위해서 그는 심지어 북제 사람과 협상을 이뤄 그녀가 고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해주기까지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것 같지 않은 일 같아도 사실 범한은 자신의 누이를 위해서 굉장히 큰 노력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사실을 아는 범약약은 자신이 너무 제멋대로 굴어서 오라버니를 힘들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가책이 커지면 커질수록 오라버니의 지극한 애정이 느껴진 범약약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지각색의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 * *

며칠 동안 범한은 황실에서 정한 혼사를 잊은 것처럼 감찰원에서 언빙운과 함께 동이성 방면의 일을 계획하고 서호의 일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데 파묻혀 지냈다. 비록 선우 속필달과 송지선령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해당타타는 능력이 출중했지만, 정주와 청주에 심어둔 첩자들을 감찰원이 전부 찾아내 제거한데다가 좌현왕의 갑작스러운 사망하는 바람에 초원은 다시 불안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경국은 마침내 서쪽 국경 상황에 대해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감찰원의 모든 사무는 언빙운이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범한은 과거 상경성 깊이 침투해 작은 언 공자를 구하기로 했던 게 잘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언빙운은 습격, 공격 결정 및 대세를 판단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거나 집행하는 데 있어서도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만약 언빙운의 도움이 없었다면 범한은 방대한 감찰원 체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언빙운의 능력은 이미 증명되었다. 범한이 경도로 들어온 뒤 감찰원이 몇 차례 실행한 대대적인 행동의 실질적인 집행자는 감찰원의 검은 관복과 대비되는 하얀 옷을 입은 작은 언 공자였다. 유일하게 한번 범한이 스스로 계획을 세워 교주 수군을 숙청했을 때 범한은 이후 진평평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그 뒤로 범한은 폐하와 자신의 의도를 언빙운에게 말한 뒤 동이성 일을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왕 십삼랑을 데리고 은밀하게 황궁을 한 차례 들어갔을 뿐이었다.

비록 지금 범약약의 혼사 때문에 범한과 황제는 냉전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자 모두 조정의 큰일까지 등한시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이미 황제 폐하가 왕 십삼랑의 존재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범한은 혼사라는 사소한 문제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 범한은 혼사 문제에 관련해서 황제 폐하와 싸우는 임무를 이미 정왕부에 넘겨주고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범약약은 여전히 의관에서 병자들을 보살폈고, 정왕세자 이홍성은 매일 삼엄한 표정을 짓고 의관 밖에 서 있었다. 이번에 황실에서 정한 혼사를 듣고 엄청난 분노에 휩싸인 정왕세자는 눈에 거슬리는 건 전부 없애버리겠다는 듯이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의관 밖을 지켰다. 이에 의관을 찾은 병자들은 정왕세자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에 놀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정주군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가까스로 3년 만에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경도에 돌아온 이홍성은 이제는 자진해서 의관 밖에서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냥 가만히 의관 앞에 서 있을 뿐이었지만, 위풍당당한 대장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로 인해 경도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렸다. 심지어 호 대학사마저 더는 저택에 찾아가 범한을 설득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면 범한의 협박에도 마음을 단념하지 못한 하종위는 기어코 몇 차례 의관을 찾아갔다가 번번이 이홍성에게 쫓겨나야 했다. 작은 의관이 어느새 조정 대신과 장군의 힘겨루기 장소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다만 문신에 불과한 하종위가 늠름한 장군인 이홍성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로써 의관은······ 경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장소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범한이 속으로 탄식하며 글은 주먹의 힘을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가 의관 앞에서 하종위가 느꼈을 좌절과 슬픔을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정에서 제일 잘 나가는 문하중서 하종위는 현재 황족의 자손이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범한과 이홍성을 만나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사실 며칠 동안 하종위는 황궁을 한차례 찾아가 이번 혼사에 대해 완곡한 거절의 뜻을 밝혔다. 다만 이 일은 범한도 예상하던 부분이었다. 하종위처럼 주도면밀한 사람이 범한을 공격할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범한이 미리 일깨워줬음에도 하종위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종위의 침울해하는 얼굴을 본 황제 폐하는 범한이 자신이 신임하는 대신에게 잔악무도한 위협을 가했다고 추측했다. 이에 잔뜩 화가 난 황제 폐하는 범한을 황궁에 불러들여 어서방 안에서 호되게 질책했다.

이에 범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질책을 들으면서 침묵을 사용해 반항했다. 혼사라는 사소한 일을 이용해서 황제 폐하는 범한의 심리 방어선을 허물어 사리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하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범한은 절대 고분고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황제 폐하의 불쾌한 기색에도 겁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전과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 범한의 손에 있는 감찰원과 황실 금고는 경국 조정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유지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질서와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제 폐하는 자신의 사생아 아들이 갈수록 의기양양해져도 함부로 떼어낼 수가 없었다.

사실 경제는 범한이 마음에 들면 들수록 자신에게 모든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 주고 자신의 모든 계획을 고분고분 따라주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황제는 가끔 아들 안지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보이거나 소원한 모습을 보이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느낌은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왕의 관점에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고, 이에 그는 범한이 한발 물러서기를 바라고 있었다.

* * *

음력 11월이 되었지만 범한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정왕부를 이용해 황실과 싸움을 계속 하고 있었다.

경도 전체를 뒤흔들었던 하씨 집안과 범씨 집안의 혼사와 관련된 소문은 황실에서 추가적인 입장이 없는 탓에 흐지부지 식어버렸다. 그리고 정왕세자 이홍성은 여전히 의관 앞에 문지기가 되어 들어가는 환자들을 모두 감시했다. 특이 환자 중에서 하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가명을 지어야만 가까스로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황제 폐하를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정왕일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형님인 황제 폐하와 치고받고 싸운 정왕은 비록 이긴 적은 거의 없었지만 주먹으로 용안을 때려본 적이 있는 데다 허물없이 친했기에 황제 폐하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물며 세속에 대한 욕망을 버린 정왕은 평생 밭을 일구고 꽃을 키우며 조정 일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는 이 부분에서 유일한 아우인 정왕에게 약간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가 함부로 난동을 부려도 인상을 구겨 불쾌함을 표시하는 것 외에 죄를 묻지는 않았다.

더구나 정주에서 3년 동안 군대를 지휘한 이홍성은 가장 앞에서 칼을 들고 적을 베어 죽였다. 설사 공은 세우지 못했다고 해도 그동안 고생한 이홍성이 당당하게 하종위에게 신붓감을 빼어 오겠다고 주장하는데, 황제 폐하가 하지 말라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천자의 말은 한번 내뱉으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법이었다. 이에 황제 폐하 역시 체면상 자신의 뜻을 거두지 않고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 * *

경도에 첫눈이 내렸다. 마차 옆에 선 범한이 하얀 입김을 불며 왕 십삼랑에게 말했다.

“말해야 할 일은 모두 말했네. 성주부 쪽은 경국에서 압박을 가할 수 있지만, 검려 내부의 분열은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네. 게다가 자네도 내가 개입하는 걸 원치 않지 않은가.”

지금 왕 십삼랑은 스승이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서 경국을 떠나 동이성 검려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를 배웅했다. 눈이 쌓인 길 위에 외로이 선 두 사람은 억지로 화제를 찾아내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범한이 주로 말하고 왕 십삼랑은 듣는 식이었다.

“검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보따리를 등에 메고 푸른 깃발이 걸린 깃대를 손에 꽉 쥔 왕 십삼랑이 범한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얼른 오셔야 합니다.”

범한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왕 십삼랑이 황궁에 들어간 뒤 황제 폐하는 마침내 동이성과 관련된 일의 전권을 범한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주도권을 쥐게 된 범한은 정말 마음이 홀가분하고 기뻤다.

“고맙네.”

말을 멈춘 범한이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중에는 자네에게 고마워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군.”

왕 십삼랑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범한의 고맙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채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곧장 눈보라 속을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