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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41화 (841/1,108)

841화 동풍이 불어오니 (2)

이미 겨울이 되자 모든 걸 얼어버릴 것처럼 공기가 차가워졌다. 다만 민간 안은 난로가 쉼 없이 돌아가서 따뜻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기운과 민가 난로가 내뿜는 따스한 기운이 교차하는 가운데 상처 치료를 위해 청주에 남아 있는 왕 십삼랑과 섭령아가 마침내 경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섭령아는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 2 황자가 독약을 먹고 자살한 일을 계기로 자신의 아버지를 줄곧 원망하고 있는 그녀는 섭씨 집안에 돌아왔다는 서신만 보낸 뒤 곧장 범씨 집안으로 가서 임완아와 함께 지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범한이 직접 추밀원으로 찾아가 섭중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현재 경국 군대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섭중은 소식을 들은 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범한의 어깨를 두드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섭중은 자신의 딸이 범씨 저택에 머무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오히려 섭중은 최근에 범약약의 혼사에 대한 소식에 궁금해하며 범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추밀원 정사인 섭중은 폐하가 어째서 범한의 체면을 깎으려 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범한이 어째서 이렇게 강경하게 맞서는 건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문하중서에 있는 하 대인은 범약약의 짝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니 범한만 동의를 한다면 정왕부도 더는 방해를 할 핑계를 대지 못할 것이니 모든 일이 순탄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황소고집이라는 건 알면서 범한의 고집이 얼마나 센지는 잊고 있었다. 범한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누구도 그에게 억지로 시킬 수 없었다. 설사 그게 황제 폐하라도 말이다.

범한은 섭중에 질문에 아무런 설명 없이 웃으며 추밀원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차를 태학 방향으로 마차를 몰았다.

아내와 섭령아가 저택 안에서 온갖 소문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범한은 소문을 직접 확인하러 가고 있었다.

섭령아와 왕 십삼랑이 경도로 돌아왔으니 정왕 세자 이홍성도 돌아왔을 거였다. 정왕이 전투를 시작하는 북소리에 맞춰 황제 폐하에게 돌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이홍성이 직접 나서서 상황에 불을 지피려 할 것이었다.

마차가 동천로 입구에서 멈추자 범한이 서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술집에 들어가 간단한 요리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요리를 천천히 먹으면서 서점 방향을 주시했다.

담박서국 맞은편에는 유간 의관(有間醫館)이 있었다. 이름은 범한이 직접 지은 것이었고, 간판 글씨는 서무가 썼다.

범씨 집안 아가씨가 운영하는 의관은 짧은 시간 만에 경도 사람들에게 호평을 얻어냈다. 범약약은 의술 실력이 탁월한데다가 돈도 많이 받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순서대로 진료하고 약을 처방해줬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경도 평민 백성들은 입을 모아 이곳을 칭찬했다. 지금 저녁 무렵인데도 의관 문 앞에는 추운 바람을 맞으면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임완아가 힘이 좋은 종을 보내 의관 밖 질서를 유지하고 뜨거운 탕을 나눠주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신경을 썼다.

안색인 약간 검은 관리를 발견한 범한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며 속으로 하종위가 아니면 누구겠냐고 생각했다. 황실의 압박을 받은 범한은 하종위를 찾아가 손찌검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종위는 정말이지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혼사에 누가 뭐라 말하든 범씨 집안 아가씨의 승낙을 받아내면 모든 게 끝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하종위는 조회가 끝난 뒤 의관에 찾아가 범약약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경국은 북제처럼 남녀의 만남을 엄격하게 금지하지 않는데다가 범약약은 거리에 위치한 의관에서 진료를 하고 있었기에 거부감 없이 하종위가 오면 예의상 인사를 했고, 누구도 이걸 저지하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은 경도 전체에 소문이 돌아서 사람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범한의 시력이 좋아서 누이가 진찰하는 틈틈이 하종위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왜냐하면, 5년 전에 일석거에서 두 사람이 만난 적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누이와 하종위는 정왕부 시모임에서도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 사실 범씨 집안 아가씨는 경도에서 인재로 명성을 떨쳤고, 하종위 역시 경도에서 뛰어난 인물이라 불리었으니 두 사람이 서로를 아는 건 당연했다.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쉬며 최근 몇 년 동안 경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변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 얼굴이 불이 그슬린 것처럼 까맣던 하종위는 오만한 기색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범한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 안달했지만 범한은 그를 무시했다. 그랬던 하종위가 몇 년 새에 진중한 청년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비록 속에는 아직 거만한 성격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행동하는 모습에는 전혀 거만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른스럽고 영리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과거 오만함에 똘똘 뭉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이 아무리 헐뜯고 비방을 해도 하종위는 조정 관리 대부분의 지지를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황궁에 있는 황제 폐하의 총애도 받고 있었다.

범한이 술집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누이와 하종위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는 자신과 황제 폐하의 힘겨루기 속에서 의연히 행동하는 하종위가 과연 예상치 못한 기병의 공격에도 의연히 대처할 수 있을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리 끝에서 말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범한이 술잔을 내려놓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기병이 마침내 왔다고 생각했다.

업무 보고를 위해 경도로 돌아온 정왕세자 이홍성은 황궁을 나온 뒤 곧장 왕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심지어 갑옷과 투구도 벗지 않은 그는 호위병도 대동하지 않은 채 행인에게 직접 의관을 위치를 물어가며 혼자 힘으로 이곳까지 찾아왔다.

멀리 술집에서 있는 범한은 이홍성이 말에서 내려 하종위에게 침착하면서도 정중하게 인사한 뒤 범약약에게 몇 마디 말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이가 그리워하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이홍성이 뭐라고 말한 것이지 범약약이 인상을 구기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범한이 마음을 졸이며 목을 길게 빼고 상황을 자세히 바라봤다. 그는 누이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홍성이 바보같이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서 누이의 화를 돋운 건 아닐까 걱정되었다.

바로 그때 하종위가 나서서 뭐라 말을 했지만, 이홍성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직접 범씨 집안 종에게 의관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약간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범약약을 막무가내로 거칠게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말에 태웠다.

곧이어 말채찍 소리가 들렸다. 경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정왕세자가 범씨 집안 아가씨를 강제로 말에 태우고 범씨 집안 방향으로 달려갔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입을 쩍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범한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직접 본 장면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던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홍성이 정말 근사하게 변했군. 몇 년 전에 시모임 때는 고상하고 점잖은 청년일 뿐이었는데, 정주에서 3년 동안 고생하더니 늠름하게 변했어!’

반면 범씨 집안 종과 의관에서 일하는 하인들, 그리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병자들은 넋을 놓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범씨 집안 종들은 최근 경도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서 정왕부가 시끄럽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범씨 집안과 정왕부의 관계가 돈독하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가장 당황한 사람은 줄곧 점잖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던 하종위 대인이었다. 의관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점차 자리를 떠나는데도 하 대인은 여전히 홀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굳게 닫힌 의관 앞에 서서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종위는 범씨 집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가는 범한의 주먹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마 범씨 집안으로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무기력하게 정왕세자가 범약약을 데리고 간 방향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이지 처량하고 불쌍한 모습이었다.

* * *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감정을 추슬렀다. 이홍성은 길 위에서 소문을 듣고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는 바람에 막무가내로 행동한 것이지 원래 경솔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범한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매부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하종위보다는 기생집을 전전하던 고약한 버릇을 버리고 개과천선한 이홍성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처량하게 서 있는 하종위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 대인에게 올라오시라고 전하게.”

그가 술잔을 천천히 탁자에 내려놓고는 뒤에 서 있는 목풍아에게 지시했다.

잠시 뒤 하종위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술집에 올라오더니 범한 맞은편에 앉았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알고 지냈지만,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범한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술잔을 흔들며 하종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황제가 하종위에게 상으로 시종을 내려 줬으므로 이곳 술집 아래 황실의 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드십시오.”

범한이 젓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하종위는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뭔지 몰랐지만 두려울 게 없었기에 당당하게 음식을 먹으며 상황을 살폈다. 범한이 멈추라고 소리쳐도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을 기세였다.

범한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범한의 시선을 받으면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없었다. 더욱이 하종위는 범한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먹을 만큼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 뒤 범한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하 대인께서 며칠 동안 의관을 찾아 제 누이를 돌봐주신 걸 알고 있습니다. 오라비로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먼저 드려야겠군요.”

“소공야께서 그러실 것 없습니다.”

하종위가 떪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범한이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방금 일어난 일을 보셨으니 대인도 정왕부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아셨겠지요.”

하종위가 살짝 풀이 죽은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소공야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 일은 제 능력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범한이 하종위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대인과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대화할 기회가 좀처럼 없었지요. 오늘 어렵게 기회를 마련했으니 직접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이번 혼사는 가망이 없으니 단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종위의 검은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잠시 뒤 간곡한 말투로 말했다.

“소공야, 저도 알고 있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범한은 한쪽 귀로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곧장 다른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하종위는 먼저 성실히 자신이 범약약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설명하고,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 해명한 뒤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말하고 있었다.

“저는 어떤 불만도 없습니다.”

범한이 담담히 말했다.

“다만 정왕부에서 이 혼사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황실에서 추진했던 정왕세자의 혼사를 막은 건 소공야시지 않습니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하종위의 눈에서 고집스러운 집착이 보였다.

“물이 넘치면 흙을 쌓아 막으면 되고, 폐하께서 터무니없는 지시를 내리시면 불살라 없애버리면 그만입니다. 저는 이전에 한 번 불사른 적이 있으니 두 번도 불사를 수 있습니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대역무도한 말을 해놓고도 범한은 하종위가 이 말을 빌미로 황제 앞에서 자신을 고발하지 못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종위는 범약약에게 호감을 얻으려고 애를 쓰는 있으니 그녀의 오라버니인 범한을 함부로 건들거나 모함할 수 없었다.

“대인은 제가 이미 대인을 싫어하고 있으니 제 눈 밖에 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밝혀둘 부분이 있습니다. 미움에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미움이 차고 넘치게 되면 제가 어느 날 식칼을 들고 대인의 저택에 찾아갈지도 모릅니다.”

범한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하종위에게 경고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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