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화 동풍이 불어오니 (1)
범한의 살기등등한 목소리에 임완아는 마음이 오싹해졌다. 그제야 그녀는 저택에 돌아온 뒤 줄곧 평온해 보였던 상공의 마음속에 사실은 울분이 가득 차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따뜻한 차를 범한 앞에 놓으며 부드럽게 타일렀다.
“약약이가 지금 의관에 가 있어요. 한 이틀 동안은 저택에만 머물게 하고 밖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하면 어때요?”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약약이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주 중요한 거예요. 이 일로 그 애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직접 처리할 거예요. 하종위가 폐하를 믿고 다가오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요.”
한편 연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유가 군주의 머릿속에는 온통 왕부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이 일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정왕이 입궁한다면 어쩌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이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부리나케 왕부로 돌아갔다.
허둥지둥 떠나는 유가 군주를 배웅한 범한과 완아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상공은 정말 교활한 사람이에요. 일부러 유가 군주 앞에서 이 일을 말한 거죠? 정왕이 입궁해 황제 폐하와 말다툼을 하게 만들려고요?”
“왕야께서 오랫동안 입궁을 하지 않으셨잖아요. 저는 두 분 사이가 화목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로 왕야가 입궁할 상황을 만든 거예요. 그러니 황제 폐하도 분명 제게 고마워하실 거예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는 범한의 목소리에는 진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임완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상공이 이 혼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걸 아시고 계셨을 거예요.”
순간 범한이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나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하종위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갈수록 더 해지고 있어요.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도찰원과 평화롭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신 걸 거예요. 약약이가 홍성와 혼인하길 싫어하니까 폐하께서는 뛰어난······ 인······ 재란 명성을 가진 하종위라면 약약이의 눈이 들 수 있을 거란 생각해서 혼사 이야기를 꺼내신 거죠. 나쁜 마음을 가지고 하신 건 아니에요.”
세상에는 좋은 뜻에서 잘못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있었고, 누구보다 총명한 황제 폐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범한은 황제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하종위에 대한 경멸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찻잔에 담긴 차는 어느덧 차갑게 식어 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는 범한은 화를 가라앉혔는지 얼굴에서 화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 제게 모진 말을 하면서까지 하종위를 보호하려 하시고 저는 지금 황실과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하종위가 지난 2년 동안 제 앞에서 항상 고분고분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건들 핑계를 찾을 수도 없어요.”
임완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는 그저 순수하게 상공과 하 대인이 조정에서 평화롭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신 건데, 그게 오히려 상공의 역린을 건든 꼴이 되었네요.”
“저는 천자도 아니고 용도 아니니 역린 같은 건 없어요.”
범한이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과거 저는 약약이의 혼사를 막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심지어는 고하 대사까지 경국에게 불러들였으니까요. 폐하께서 만약 제 삶과 주변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거예요.”
범한이 약간 비꼬는 말투로 계속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번 혼사가 잘 될 거라 생각하고 계세요. 하지만 제가 계속 강경하게 맞선다면 폐하도 뜻을 거두실 수밖에 없겠죠. 다만······ 황제의 뜻에 맞선 건 가벼운 죄가 아니니 감찰원의 힘을 줄이거나 황실 금고의 규모를 축소하게 될 수도 있어요.”
* * *
사실 이번에는 범한이 황제의 뜻을 오해한 거였다. 경국의 황제 폐하는 비록 천하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범약약이 경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연스럽게 아직 혼인하지 않은 하종위를 떠올랐다. 정왕 쪽은 이미 가망이 없었으니 혼사를 계기로 대신들 사이를 돈독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종위도 노총각이었고, 범약약도 혼기가 찬 노처녀였으니 황제 폐하가 보았을 때 두 사람을 맺어주는 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범한에게 슬쩍 물어 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물론 그는 아들인 범한 역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고분고분 따라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예상과는 달리 그 말을 듣자마자 범한이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고, 어서방에서 한차례 입씨름까지 벌어졌다.
황제는 범한이 자신의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추태를 부렸음에도 그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범한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이 당황스럽고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황제에게는 범한이 충신이듯이 하종위 역시 믿을 수 있는 충신이었다. 두 충신 집안을 혼사로 맺어주는 건 오래도록 칭송될 아름다운 일인데, 어째서 범한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한 걸까?
‘설마 무슨 속셈이 있는 것인가?’
황제의 마음속에 이처럼 어두운 생각이 꿈틀대고 있다는 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임완아가 추측했듯이 경제는 성격이 아주 강경한 군왕이었다. 만일 범한이 부드럽게 재고해 달라 요청했다면 이 일이 달라질 기회가 있었겠지만, 범한은 강력하게 반대를 했고, 이게 오히려 황제의 결심은 굳히게 만들었다.
경국 황제는 이 세상 누구라도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설상 가장 믿고 총애하는 범한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순간에 범씨 집안과 하씨 집안이 혼인 관계를 맺는다는 소식이 경도 전체에 전해졌다. 비록 황궁에서 아직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지만. 소문의 내막을 아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 일은 이미 결정되어 절대 바뀔 수 없는 사실이라 했다.
소문을 듣고 문무백관들은 모두 놀라면서도 이번 혼사가 조정에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폐하의 깊고 깊은 마음에 감탄했다. 다만 모두들 범한이 평소 하종위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가 반대하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일개 신하일 뿐이니 어찌 황제 폐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어서 호 대학사가 직접 범씨 집안에 찾아가서 범한에게 이 혼사를 받아들이라고 설득했다는 소문이 들리면서 경도 전체가 들썩였다.
감찰원의 손에 모진 처벌을 당했던 관리들과 평소 범한의 권세에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모두 범씨 집안 아가씨가 하씨 집안에 들어가는 날을 기다렸다. 모두들 작은 범 대인이 그 모습을 똥 씹은 표정으로 짓는 걸 보고 고소해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사실 범한이 경도에 온 뒤에 줄곧 너무 완벽하게 행동해서 그 모습에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처럼 작은 범 대인이 분노에 어쩔 줄 몰라 헤맬 모습을 볼 기회가 생기자 사람들은 모두들 그 모습을 보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남몰래 하종위를 응원했다.
다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범한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입궁해서 황제 폐하와 다툼을 벌이지도 않았고, 도찰원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하종위를 때리지도 않았다. 이에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과거 범한이 하종위를 때린 사실은 경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랬던 범한이 자기 누이가 하종위에게 시집갈 상황인데도 아무 일도 안 하고 조용히 있을 수 있다니? 설마 작은 범 대인의 성격이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채 이틀이 되지 않아 범한이 조용했던 이유를 모두가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범한은 조정 문무백관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앉아서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황제 폐하가 겪게 될 난처한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2년 동안 황궁을 찾지 않았던, 밭을 매는 낙으로만 살던 황제의 친동생 정왕이 깊은 밤중에 황궁에 입궁해서는 황제 폐하와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황궁에 있는 태감의 말에 따르면 싸움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고 했다.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정왕이 어서방에 있는 청화자기까지 깨뜨린 뒤 씩씩대며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던 황형을 정왕는 이번에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다음날 정왕은 도찰원에 찾아가 왕야의 체면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종위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난데없는 질타에 놀란 하종위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본분에 맞게 행동했다.
정왕은 신분이 무척이나 존귀했기에 태상사나 궁정도 그를 건들 수 없었다. 그러니 경도부나 성문사와 같은 치안을 유지하는 관아에서 정왕을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들 이 일을 계기로 3여 년 전에 황실에서 범씨 집안 아가씨와 정왕 세자 이홍성을 혼인시키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이에 흥미진진해 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혹여나 정왕야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대문을 걷어차고 들어올까 두려워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일은 한마디로 범한은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 정왕이 대신 도찰원에서 행패를 부리게 만들어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는 묘수를 부린 것이었다.
저택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범한에 입장에서 정왕이 나서는 건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푸는 셈이었다. 황제 폐하가 얼토당토않은 혼사를 추진하려 하자 범한은 천하에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을 시켜 직접 황제 폐하를 다룰 수 있게 한 것이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이 암암리에 이 일을 꾸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아우인 정왕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궁정에 시켜 왕부에 교지를 읽도록 해서 정왕을 호되게 질책하는 것 말고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물론 정왕의 입장에서 이번 혼사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 이홍성이 무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범약약이 돌아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제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범씨 집안 아가씨를 하종위에게 맺어주려 하자 정왕이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조용히 저택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범한은 황실에서 이번 혼사를 확정해 자신의 집에 교지를 내리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정왕이 비록 끈질기게 이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황제 폐하는 자신의 아우와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를 바라지 않을 테니 혼사를 함부로 추진할 수는 없었다.
이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범씨 집안과 하씨 집안 혼사로 떠들썩하던 경도 안은 조용해졌다. 하지만 황궁과 범씨 집안, 정왕부의 줄다리기는 여전히 물밑에서 계속되고 있었고, 하종위도 겉으로는 이렇다 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황궁 소식통을 통해 황제 폐하가 이미 하종위에게 혼사에 대한 의향을 물었고, 이에 하종위가 감사 인사를 하며 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범씨 집안 아가씨의 혼사는 경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조정의 운영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혼사는 황제 폐하가 원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경국 도찰원과 감찰원이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에 예민한 사람들은 폐하와 범한 사이의 힘겨루기가 단순히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하려는 군주와 억압당하지 않으려는 신하 사이의 기 싸움이라는 걸 간파해 내었다. 이 세계에서는 기존의 권력이 새로운 권력을 억압하는 일은 있어도 새로운 권력이 기존 권력을 압도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황제 폐하가 새로운 권력인 동풍이 불어오는 것인지 탐색해 보려 한 시도가 예기치 못하게 정왕의 귀에는 전투를 시작하는 북소리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