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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39화 (839/1,108)

839화 감찰원과 도찰원의 사이의 갈등 (2)

황궁 정문에 깔린 어둠을 바라보던 호 대학사는 하종위의 처지를 생각하다가 걱정되는 마음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그저께 깊은 밤중에 폐하가 넌지시 드러낸 의견이 생각났다.

호 대학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하종위가 비록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난날에 했던 일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뜻을 따른 것이었으니 하 대인을 안 좋게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호 대학사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만일 이번에 작은 범 대인이 마음을 고쳐 잡고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감찰원과 도찰원 사이의 싸움도 종식될 수 있을 것이었다.

모든 건 작은 범 대인이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호 대학사가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한편 범한이 이때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호 대학사가 한 말은 황제 폐하를 대신해서 뜻을 전달한 것이자 문하중서의 태도였다. 범한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평상시 하종위가 나를 지극히 정중하게 대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온순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사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은 범한의 손에 너무 큰 권력이 쥐여져 있어서 비롯된 거였다. 그는 황제의 사생아이자 감찰원의 미래 수장이었으며, 황실 금고의 주인이었다. 그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많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황제의 속마음을 읽어보던 범한이 순간 울분이 치솟아 생각했다.

‘내가 좋은 인품과 배경을 타고난 게 잘못되었다는 거야?’

* * *

대조회가 끝난 뒤 관례대로 소모임이 열렸고, 마지막에는 황제 폐하와 1 황자와 3 황자, 범한이 모여 작은 규모의 가족 모임이 열었다. 이윽고 범한이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황성 정문을 걸어 나왔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호 집안 집사에게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 술을 마시는 건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다고 사과를 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른 뒤 등자경은 오늘 도련님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이는 걸 발견했다.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올라가 있었고, 입가에는 계속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에 그는 최근 자기 아내가 줄곧 닦달하던 일이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등자경의 말에 고개를 돌린 범한은 자신의 가장 충직한 종이 하는 말을 한참 동안 들은 뒤에야 무슨 일인지 이해했다. 알고 보니 등 대가는 집안의 몇몇 사람들이 범씨 집안의 명성에 기대 말단 관리직에 오르는 걸 보고 마음이 근질거려 하고 있었다.

지금 범씨 집안은 모든 잡다한 일을 등자경과 그의 부인에게 처리하도록 맡겨두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생기리라는 걸 범한은 진작 예상하였다. 그가 등자경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가 경력 9년이니까 이미 5년은 늦은 게 아닌가. 그러니 자네가 다시 나가도 상관없네.”

등자경은 도련님의 심오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범한이 옷섶을 걷고 바람처럼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에는 여전히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모든 종이 그 모습을 보고는 함께 기뻐했다. 범한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성격인데다가 집안 종들은 한결같이 범한을 모시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도련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기뻐했다.

셋째 집사가 등자경을 따라 범한이 지나간 정원을 걸어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듣자 하니 정식으로 제자가 되었다고 하던데 도련님의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군요.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할까요?”

등자경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범한과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왕씨 집안 아가씨가······ 참 불쌍하게 되었군.”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셋째 집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등자경이 어두운 얼굴로 설명했다.

“오늘 도련님의 기분이 굉장히 안 좋으시거든······ 이제껏 이처럼 기분이 안 좋으신 적은 본 적이 없네.”

* * *

과연 등자경은 과거 담주에서 어린 범한의 휘황찬란한 미래를 내다볼 정도로 총명한 사람이자 범한의 가장 오래된 심복이라 할만 했다. 이후 상황은 등자경이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범한이 싱글벙글 웃으며 서재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성격이 거친 왕씨 집안 아가씨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서재에서 뛰쳐나왔으니 말이다.

왕동아가 엉엉 울면서 연신 큰 소리로 욕을 퍼붓는 모습은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범한이 무슨 짓을 했기에 왕동아가 저리 원한에 사무친 모습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서재가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라도 되는 것처럼 왕동아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뛰쳐나오자 그녀가 흘린 눈물방울들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왕동아가 뛰쳐나가고 얼마 뒤 일부러 바쁜 일을 제쳐놓고 범씨 집안에 찾아온 경도 수비 사비 대장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나왔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저택을 걸어 나가면서 연신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 아무래도 범한이 자신의 체면은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한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등자경이 토끼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셋째 집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나에게 묻지 말게나. 나도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네.”

이 소식을 들은 여자들이 허둥지둥 서재로 달려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범한이 왕씨 집안 아가씨를 아주 호되게 꾸짖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회초리까지 사용하면서 말이다.

모두들 대경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왕동아를 건드렸으니 군대 연경파에게 적지 않은 미움을 사게 된 셈이었다. 더욱이 경도 수비 통령이 왕동아를 왕부에 들이기 위해서 직접 저택에 찾아와 범한의 체면까지 세워 주었는데, 범한은 오히려 그의 체면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범한은 여전히 만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섬뜩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가 서재로 들어온 임완아, 사사, 유가 군주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사항이었는걸요. 제자가 되었으니 당시 잘못한 것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아야지요.”

임완아가 차가운 공기를 깊이들이 마시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공이 오늘 정신병이라도 걸려 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회초리를 때린 걸 아무렇지 않은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정말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범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윤리에 따라 합당한 처벌을 내린 것뿐이니, 이런 일은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 장군 앞에서 때려서는 안 됐어요.”

임완아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총명한 그녀는 이미 황궁에서 있은 일로 화가난 범한이 애꿎은 왕동아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 천하에서 범한을 이렇게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이 말은 당신 외삼촌이 내게 했던 말이라고요.”

임완아가 발끈하며 말했다.

“상공의 친아버지겠죠.”

부부 두 사람이 말하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황제 폐하였다. 범한이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은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이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다만 범한과 임완아는 침대 위에서 거리낌 없이 이 사실을 말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있는 서재에서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유가 군주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임완아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며 차분히 말했다.

“도대체 폐하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거예요?”

범한이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더니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약약이의 혼인 상대를 정해주려 하세요.”

유가 군자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일이네요.”

범한이 유가 군주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황제 폐하께서 약약이의 짝으로 군주의 오라버니를 지정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오늘 넌지시 제 의견을 물어보시더군요. 약약이를······ 하종위와 혼인시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범한의 말이 나오자마자 서재 안 분위기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된 분위기였다.

* * *

임완아는 자신의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범한이 홧김에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걱정된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쩔 생각이에요?”

임완아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범한의 영향을 받은 범씨 집안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종위를 경멸하고 싫어했다. 특히 임완아는 지금 오주에 있는 아버지가 과거 재상직에서 물러난 일 때문에 하종위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범한의 입을 통해서 하종위가 과거 범약약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사실 당시 하종위는 경도에서 인재로 명성을 떨치며 청년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으니 범약약을 좋아하는 걸 나쁜 일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범한은 하종위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오늘 어서방 회의를 끝낸 뒤 황제가 혼사 이야기를 꺼내자 범한은 그 자리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황제 폐하와 크게 한바탕 다툼을 벌였다. 결국 황제 폐하는 마지막에 범한에게 신하의 본분을 다시 상기시켜주며 억지로 화를 억눌렀다.

“하종위는······ 인품이 좋지 못해요.”

유가 군주는 당연하게도 범약약이 자신의 형수가 되기를 바랐고, 그래서 어떻게서든 자신의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노력하고 싶었다.

유가 군주가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하종위를 욕하자 범한이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가 군주의 소심한 모습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기분이 나아졌다.

“폐하께서는 하종위란 사람의 인품이 나쁜 건 신경을 쓰지 않으십니다.”

범한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의 눈에 하종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인데다가 충성스러운 고위 관리이니 약약이의 배필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지요.”

사실 색안경을 버리고 보면 모두들 하 대인을 범약약의 천생이 배필이라고 생각할 거였다. 왜냐하면, 인품이나 관직을 봤을 때 하종위는 폐하를 위해 앞장서서 일하는 충신임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다만 몇몇 일들에서 범한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청주에서 1 황자가 측비를 들이는 일을 고민했을 때에도 그는 같은 생각을 했었다. 황제 폐하가 지금 자신을 누구보다도 믿고 총애하고 있고, 또 과거 약약이의 혼사를 막기 위해서 이홍성을 천하의 음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강제로 혼사를 진행할 경우 어떤 상황이 펼쳐질 수 있는지를 황제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지금 약약이를 하종위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꾸미는 것일까?

“폐하가 넌지시 상공의 의견을 물으셨다는 건 상공이 반대하리라는 걸 알고 떠보신 걸 거예요.”

침착함을 회복한 임완아는 이미 모든 걸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상공은 막무가내로 폐하에게 대항하려 해서는 안 돼요. 폐하의 성정이 어떤지는 상공도 잘 알고 있잖아요. 상공이 반대를 심하게 하면 할수록 폐하는 강제로 이 일을 추진하려 하실 거예요.”

“나는 폐하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드신 것에 화가 나는 것뿐이에요. 설마 혼사를 강행해도 조정이 아무 일 없이 평온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깊은 고민에 휩싸여 있던 범한은 머리가 번쩍하면서 무언가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살기등등한 눈빛을 번쩍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종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만일 그가 냉큼 혼사를 받아들이면 단칼에 죽이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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