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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27화 (827/1,108)

827화 이건 측비를 들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2)

그가 즉시 안색을 가라앉히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엄하게 말했다.

“왕야에게 시집을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낭자가 가지고 있는 고약한 단점들을 모두 버리지 않는다면 조금의 가망도 없습니다.”

범한의 무서운 얼굴에 겁에 질린 왕씨 집안 아가씨가 순간적으로 왕부 밖으로 도망을 치려 했다. 하지만 시집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마음속이 불길이 인 듯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성격이 너무 고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바꿀 수 있었다면 진작 바꿨을 거였고, 그랬다면 황궁에서 파견되어 온 교습 유모가 자신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런 와중에 범한이 신랄하고 매몰찬 훈계를 들으니 왕씨 집안 아가씨는 오히려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저도 바꾸고 싶어요.”

그녀가 눈물범벅인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강산은 바꾸기 쉬워도 타고난 본성을 바꾸기 어려운 법입니다.”

범한이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저를 스승으로 섬기면 제가 그 고약한 성미를 모두 고쳐 드리지요.”

왕씨 집안 아가씨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도 무서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약간 화도 나고 황당하기도 한 그녀가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의 사생아인데다가 천하에 둘도 없는 권력을 가진 권신이지만 이제 겨우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잖아?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뻔뻔스럽게 내 스승이 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곧장 눈앞에 있는 작은 범 대인이 3 황자의 스승이자 자신이 존경하는 섭 누이의 스승이라는 점이 떠올랐다.

작은 범 대인은 비록 나이는 젊었지만 이미 두 제자를 키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중 한 사람은 그녀의 우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미래 경국 황제가 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그녀를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씨 집안 아가씨를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양손을 뒷짐을 지고 왕부 깊은 곳으로 홀연히 걸어가는 모습이 그녀에게 고민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왕씨 집안 아가씨가 이를 악물고는 치마를 잡아들고 달려갔다. 범한을 따라잡은 그녀는 이제야 작은 범 대인이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이려는 이유가 자신에게 왕부에 들어올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서라는 걸 이해했다.

폐하가 작은 범 대인을 경도로 불러들여 왕야가 측비를 들이도록 설득하는 일을 맡기려 한다는 소문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왕씨 집안 아가씨도 자신이 왕부에 들어가려면 작은 범 대인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제자로 들어가는 걸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범한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저의 제자가 되고 싶으시다면 제게 회초리를 맞을 각오도 하셔야 합니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발끈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누가 감히 나를 때릴 수 있다고?’

하지만 즉시 자신의 바람을 떠올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채찍으로 때린 집사에게 선물을 주어 사과를 표시하시고, 성에 들어갈 때 말에 치여 넘어진 사람을 찾아내 다친 곳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합당한 치료비를 주고 사과하십시오.”

“네······ 스승님.”

“그리고 사과를 하는 것도 좋지만, 이후 앙심을 품고 다시 나쁜 짓을 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네, 스······ 스승님.”

“내일 사 장군의 부하가 낭자를 저의 저택에 보내면 일단 회초리 열 대 맞을 겁니다. 그것까지 해야 이번 잘못에 대한 처벌이 깨끗하게 끝나는 겁니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멍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화를 꾹 참으며 보잘 것 없는 집사에게 선물을 주어 사과하고, 비천한 백성을 직접 찾아가 위로하겠다고 대답했으니 작은 범 대인의 체면을 충분히 세워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은 범 대인은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자신을 회초리로 때려 처벌하려 하는 것이었다.

* * *

“자네는 부끄러움도 모르는가!”

화친왕부 안 조용한 서재 안에서 1 황자가 범한에게 삿대질을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하지만 맞은편에 있는 범한은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자신에게 삿대질하는 1 황자 손가락을 치우며 소리쳤다.

“저하야말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십니다!”

1 황자가 범한에게 부끄러움도 모른다고 화를 낸 이유는 그가 왕씨 집안 아가씨를 왕부에 들인 것도 모자라 왕비가 있는 곳에 보내 두 사람을 함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범한이 이곳에서 왕씨 집안 아가씨와 나눈 대화 내용도 1 황자의 화를 돋웠다. 1 황자는 범한이 왕씨 집안 아가씨를 제자로 받아들여 왕부와 거리를 좁혀주려고 하는 걸 알고는 무척이나 분노했고, 그런 짓을 하는 이유도 이해하지 못했다.

황실은 1 황자를 대신해 측비 상대까지 미리 정해둔 뒤 며칠 동안 끓임 없이 측비를 들이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1 황자는 끈질기게 저항하며 강력하게 맞섰지만, 황제 폐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을 할 수는 없었다. 이에 오랜 시간 압박감에 시달리며 이도 저도 못 하는 난처한 상태에 놓인 1 황자는 상당히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제 새로 경도 수비 통령에 부임한 사비 장군이 일부러 연회 자리를 만들어 1 황자를 초대했다. 1 황자는 사비 장군의 체면을 생각해 마지못해 초대에 응했지만, 술잔에 세 번 돌기도 전에 사비 장군이 왕씨 집안 아가씨를 연회 자리에 불러들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수줍은 표정으로 자리에 나타난 왕씨 집안 아가씨를 보자마자 상황을 이해한 1 황자는 불같이 화를 냈고, 연경파 사람들의 체면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하지만 1 황자를 정말 견딜 수 없게 만든 건 조금 전 범한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며칠 동안 번민을 거듭하던 1 황자는 누구보다 뛰어난 수완을 가진 범한이 돌아온다면, 양쪽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신묘한 방법을 생각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범한이 혼인을 막으면서 동시에 황제 폐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낼 거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왕부 대문 앞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서 1 황자는 속으로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왕씨 집안 아가씨는 제멋대로 행동해 범한의 심기를 건드는 모습을 본 1 황자는 모든 게 자신이 원하는 데로 흘러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1 황자의 기대와 달리 범한은 왕씨 집안 아가씨를 데리고 왕부 안으로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기까지 한 것이다. 잔뜩 절망한 1 황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어째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인가!”

1 황자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으르렁거렸다. 그가 범한에게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소리친 건 범한이 형제 사이의 정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더욱더 난처한 상황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 황자는 범한이 자신에게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맞받아치는 이유를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럼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범한이 노기등등한 얼굴로 물었다.

“저하의 집안일에 저를 끌어들이는 이유가 뭡니까? 저하께서는 폐하와 연경 쪽 장군들의 눈 밖에 나는 것도 모자라서 저와의 사이도 틀어지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어째서 저하와 왕비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계집아이조차 스스로의 힘으로 처리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가장 빠른 말을 보내 제게 상황을 처리해 달라하셨지 않습니까. 두 분은 강제로 저를 이 상황에 끌어 들여놓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시는 겁니까!”

말문이 막힌 1 황자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비와 십여 일 동안 상의한 끝에 그는 지금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범한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1 황자가 마른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다듬고는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황께서도 자네를 이 일에 끌어들여 나를 설득하게 할 생각을 가지고 계셨네. 그래서 먼저 움직여서 자네를 내 편으로 만들면 앞으로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네.”

“흥! 저는 중매쟁이가 아닙니다.”

범한이 화가 가라앉지 않은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1 황자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태상사 정경이지 않은가.”

정곡을 찌르는 1 황자의 말에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태상사 정경은 황실 종실의 일을 담당하는 자리인 만큼 황자와 군왕, 그리고 국공의 혼사를 처리해야 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경도 반란이 있고 2년이 지난 지금 두 형제 사이는 이전처럼 돈독하지 않았다.

진평평과 영 재인의 관계 때문에 함께 단결해 행동하는 것일 뿐 함께 적을 무찌르며 쌓았던 깊은 우정과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 느낀 전우애는 2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왕씨 집안 아가씨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가 뭔가?”

1 황자가 범한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자네도 내가 측비를 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는가.”

“이 문제를 의논하기 전에 먼저 왕씨 집안 아가씨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아가씨의 성은 왕(王)씨이고 이름은 동아(曈兒)로 왕 대도독이 애지중지하는 딸입니다. 그런 그녀를 어째서 저하께서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여자라 험담하신 것입니까? 어젯밤 연회에서는 오늘처럼 추태를 부리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1 황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왕씨 집안 아가씨의 성품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네. 하지만 황자의 신분에 어찌 난생처음 만난 장군의 딸을 함부로 험담할 수 있었겠나. 그런 말을 한 적은 결단코 없네.”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제가 아는 저하는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시지요. 아무래도 황궁의 교습 유모가 왕씨 집안 여종들을 통해 왕씨 집안 아가씨에게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은 것 같군요. 그래서 왕씨 집안 아가씨가 오늘 왕부를 찾아와 난동을 부린 거고요. 분명 이 일은 황궁에서 꾸민 일입니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왕부 대문 앞에서 난동을 피우면 이 사실을 경도 전체가 알게 될 것이고, 왕비께서는 울화가 치미셨을 테니까요.”

그가 고개를 들어 1 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씨 집안 아가씨는 왕 대도독의 딸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게다가 저하께서도 대동산 사건 이후 경국 조정과 민간에서 북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왕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1 황자가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지난 2년 동안 왕부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나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나가고 싶어도 경국 백성들의 적대시하는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북제가 경국 황제 폐하를 암살하려는 일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국 백성들은 북제 출신 왕비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이 일이 만약 성 전체에 소문이 난 상황에서 폐하께서 공개적으로 혼사를 발표하신다면 조정 문신과 무신들이 모두 지지할 것이니 왕비를 반드시 폐위될 겁니다.”

“조정 문신과 무신이 전부 지지할 거라고?”

1 황자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하지만 왕씨 집안 아가씨는 평판이 좋지 않네.”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하는 본인의 위치를 상기하고 계신 겁니까? 저하는 황실의 장자이며, 황자 중에서 유일하게 군대를 이끌고 북벌을 단행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저하의 왕비를 북제 사람에서 경국 사람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조정 문무 대신과 백성들은 왕씨 집안 아가씨가 아니라 암퇘지라도 기꺼이 저하의 왕부에 들이려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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