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화 이건 측비를 들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1)
화친 왕부 대문 앞에 선 범한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보고 있지 않으십니까? 제가 왔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실 겁니까!”
아둔한 왕씨 집안 아가씨는 이제야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챘다. 마음이 복잡해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다만 눈물이 왜 흐르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왕부의 커다란 대문이 마침내 끼익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렸지만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부에서는 범한만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야수처럼 날뛰는 왕씨 집안 아가씨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왕씨 집안 아가씨를 바라보며 물었다.
“1 황자 저하를 좋아하는가?”
설사 경도 풍속이 개방적이라 할지라도 관리 부하와 집안 종들 앞에서 남녀의 사사로운 일을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이에 집사와 장군이 이를 부드득 갈며 범한의 신분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따지려 하는데, 왕씨 집안 아가씨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를 악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 좋아한다. 그게 뭐?”
“뭐, 그냥. 내가 낭자에게 알려주고 싶은 건 이 일에서 나는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할 거고, 되는 건 된다고 말할 거라는 점이네······.”
잠시 왕씨 집안 아가씨의 반응을 살피던 범한이 살짝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
“한참을 소리치고 악을 썼으니 목이 마르겠군. 안으로 들어가서 차나 한잔하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왕씨 집안 아가씨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얼이 빠진 얼굴을 한 그녀가 속으로 당장 사 숙부 집으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에 서 있는 젊은 귀족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두려워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잠시 고민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망가진 말채찍을 바닥에 버린 그녀가 집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범한을 따라 왕부로 들어갔다. 이미 꿈에서 들어가 본 적 있는 왕부였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왕부의 대문이 다시 닫혔다. 감찰원 부하나 깊은 시름에 빠진 왕씨와 사씨 집안 집사와 장군도 들어가지 못한 채 왕부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왕씨와 사씨 집안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범한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왕씨 집안 아가씨를 왕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용감하고 왕부로 들어올 거라고는 범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왕씨 집안 아가씨는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아랫사람의 처지를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이라서 섭령아보다도 남을 생각해주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최소한 섭령아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범한이 왕씨 집안 아가씨가 섭령아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 이유는 일반 경도 아가씨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실에서 아직 교지가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왕부로 달려오다니. 왕 대도독과 사 통령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
범한이 고개를 돌려 왕부의 집사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왕씨 아가씨에게 차갑게 말했다.
“자식으로써 효를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거늘. 오늘 함부로 행동한 게 잘못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왕씨 집안 아가씨가 놀란 눈빛으로 범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상대방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상대방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방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섭씨 집안 아가씨의 비공식적인 스승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부에 들어오자마자 상대방이 자신의 아버지처럼 훈계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왕씨 집안 아가씨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두 눈이 벌겋게 충혈 돼서는 ‘앙’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을 향해 그녀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왕야······ 왕야가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험담했단 말이에요······.”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왕씨 집안 아가씨 앞으로 접근해 자세히 바라보았다.
자신 앞에서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왕씨 집안 아가씨를 바라보며 난처해하던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설마 부끄럽다는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당황한 왕씨 집안 아가씨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범한을 노려봤다. 왕야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실망감과 분노가 더욱 컸다.
이에 억울한 마음에 오늘 곧장 왕부로 달려와서 왕야에게 자초지종을 알리려고 했다. 그런 자신에게 범 대인이 농담이랍시고 부끄럽다는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냐고 묻자 기가 막히기도 하고 화도 치솟았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울음을 그치자 범한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는 옆에서 잔뜩 긴장해 있는 왕부 종들을 향해 멀리 물러나라는 눈짓을 했다. 종들을 눈치껏 물러나자 그가 왕씨 집안 아가씨를 향해 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왕부 대문 앞에서 난동을 부려도 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저는 왕야와 숙부 집에서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왜 제가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눈을 벌겋게 충혈된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왕씨 집안 아가씨의 모습은 마치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사람을 물 것 같은 난폭한 토끼 같았다. 그녀가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째려보며 계속 말했다.
“어젯밤 연회에서 엄청 화가 났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고요. 그런데 왕야는 그런 저를 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거예요. 그래서 왕야에게 진짜 부끄러움이 모르는 사람이 어떤 건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오늘 이곳을 찾아와 소란을 부린 겁니다.”
범한은 속으로 약간 이상한 점을 느꼈지만, 심도 있게 탐색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당하던 친왕이 황궁의 압박과 성격이 난폭한 여자아이 때문에 대문을 굳게 닫아두고 나오지 못하는 꼴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이 왕 대도독을 대신해 왕씨 집안 아가씨를 교육할 준비를 했다. 그의 머릿속에 영감이 떠오르면서 썩 괜찮은 발전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차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왕씨 집안 아가씨의 목소리가 서서히 작아지더니 말수도 줄어들었다. 그녀는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곱상한 귀족 청년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있던 용기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큰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사실 이건 누구의 기세가 더 센지에 대한 문제였다. 범한은 지금 상당한 권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국에서 명실상부 황제 폐하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2년 전에 두려워하던 연소을을 저격 총으로 쏘아 죽인 뒤 범한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었고, 무예도 이미 안정적으로 9품에 이르러 대종사 바로 아래 단계까지 와 있었다.
이처럼 권세와 기세를 모두 갖춘 범한은 앞에 왕 대도독이 있거나 심지어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연소을이 있더라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범한은 지금 상자가 옆에 없어도 과거 연소을을 다시 만나도 당당하게 대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앞에서 울며 억지 쓰는 가녀린 여자아이 하나 정도 기세로 찍어 누르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매일 감찰원 일에 시달리는 그는 겉으로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안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냉혹함과 살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왕씨 집안 아가씨가 범한의 기세에 압도되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범한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왕씨 집안 아가씨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에 잔뜩 주눅이 들었다. 조금 전 왕부 대문 앞 돌사자상 위에서 욕을 퍼붓던 제멋대로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왕씨 집안 아가씨가 기죽은 표정으로 뒤에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작은 범 대인을 따라 왕부에 들어온 거지?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건 아닐까?’
한편 범한은 왕씨 집안 아가씨가 겁에 질려 있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단호한 목소리로 엄격하게 그동안 왕씨 집안 아가씨가 저지른 잘못을 질책했다.
경도 서성문 앞에서 말을 험하게 몰면서 백성들을 위험에 빠뜨렸던 일부터 조금 전 왕부 앞에서 부린 추태와 늙은 집사의 얼굴을 말채찍으로 때려 상처를 입힌 일들까지 잘못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범한의 목소리가 갈수록 무서워지고, 말투가 살벌해지자 왕씨 집안 아가씨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왕부 집사를 포함한 집안 종들은 모두 멀리 숨어 있었고, 왕야와 왕비는 교활하게 후원 안에 틀어박혀서는 손님이 온 걸 알면서도 맞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부 대문 안 가짜 산 옆 공터에 서 있는 범한과 왕씨 집안 아가씨는 이번에 처음 만난 사이었다.
왕부에 손님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중 한 사람은 훈계하고, 다른 한 사람은 기죽은 표정으로 훈계를 듣고 있었다. 정말이지 다시는 보기 힘든 황당하고도 기묘한 광경이었다.
* * *
가장 엄한 말투로 앞에 있는 왕씨 집안 아가씨는 한바탕 호되게 질책한 마음은 그제야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범한과 달리 왕씨 집안 아가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왕씨 집안 아가씨를 보자 범한이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씨 집안 아가씨의 제멋대로인 모습은 분명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지금 보니 자신 역시 제멋대로 행동한 것 같았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범한이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뭘 잘못했는지 이해하셨습니까?”
고집이 센 왕씨 집안 아가씨는 입술만 삐죽삐죽 내밀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범한이 너무 신랄한 말투로 사람의 마음을 찌른 게 못마땅한데다가, 심지어 그 쌀쌀맞고 매몰찬 말투가 그녀 아버지의 말투와 너무나도 닮아서 대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뽀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왕씨 집안 아가씨가 마지못해 소리쳤다.
“대인은 섭 누이의 스승이지 제 스승이 아니잖아요!”
“섭령아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제가 한 말씀 드리지요.”
범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섭령아가 경도에서 말을 몰고 달린 적은 있어도 그 일로 사람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말채찍을 휘두른 적은 더더욱 없지요. 섭령아도 당시에 제멋대로인 말괄량이 낭자이기는 했지만, 제멋대로인 행동할 때는 모두 특정 대상을 두고 행동했습니다. 절대 힘없고 불쌍한 평민 백성들을 향해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경도 백성들은 그녀를 좋아했고,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지요. 백성들이 그녀에게 길을 비켜줬던 건 섭 장군의 딸이라는 배경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녀의 선량한 마음씨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왕씨 집안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정말 섭령아를 본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먼저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실부터 고치십시오!”
“섭 누이가······ 누구에게 제멋대로 굴었는데요?”
왕씨 집안 아가씨는 범한의 가장 마지막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당황한 범한이 화가 치솟은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 말고 누구한테 그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