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화 성문에서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경도로 돌아가는 길 (1)
두 사람 사이에 선 범한은 두 사람이 아무 말도 묻지 않으니 굳이 등장한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세상 모든 일을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뒷짐을 지고 정원 밖에 펼쳐진 가을 나무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이 더없이 고상하고 유유자적해 보였다.
그런 범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왕 십삼랑은 어쩌면 범한이 자신이 지금껏 드러내지 않았던 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빛을 짓자 섭령아가 곁눈질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범한이 마른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왕비 마마, 청주의 경치가 아름다워 매일 정원에 나와 자수를 두시는 건 이해하지만 정원 담장 밖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으시나 봅니다?”
왕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날강도 같은 범한이 자신에게 뭘 일러주려 하는지를 깨달은 섭령아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 십삼랑도 섭령아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의 뜻을 잘못 짐작한 그는 속으로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섭씨 집안 아가씨와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이 시원스러운 성격을 가진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왕 십삼랑은 섭씨 집안 아가씨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었지만······ 경국의 왕비인 그녀와 신분의 차이가 너무 나서 감히 다가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왕 십삼랑을 바라보았다.
“십삼랑, 자네가 중상을 입어 누군가가 보살핌이 필요한 건 알지만 남녀 사이의 규율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섭씨 집안 아가씨는 우리 경국의 왕비이시네. 정원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내가 경도로 돌아가서 황실에 뭐라고 말을 해야겠는가?”
말뜻을 이해한 왕 십삼랑이 한숨을 쉬었다.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가 눈썹을 추켜세워 범한을 바라보더니 대뜸 말했다.
“저택에서 나가겠습니다.”
그 말에 섭령아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쏘아 보았다.
범한이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왕 십삼랑을 믿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옆에서 섭령아가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그가 태연히 손을 들더니 공중에 원 세 개를 그리고는 잽싸게 섭령아가 들고 있는 옷감을 잡았다. 가벼운 바람이 불 정도로 굉장히 빠른 손놀림이었다. 바로 그 유명한 잔재주였다.
섭령아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바늘로 범한의 손목을 찔렀다. 그것도 아주 교활한 각도로 말이다.
섭령아가 사용한 방법 역시 잔재주였다. 다만 그녀의 잔재주는 원래 범한에게 배운 것이었기에 범한이 옷감을 빼앗아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손에 있던 자수 천을 빼앗은 범한이 왕 십삼랑 옆으로 가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십삼랑, 나는 자네가 속을까 봐 걱정되네. 우리 왕비께서는 평범한 귀족 여자들과는 다르게 자수를 즐기는 분이 아니시거든.”
놀란 왕 십삼랑은 제사 대인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바로 그때 그의 눈앞에 옷감이 펼쳐졌다. 범한이 득의양양하게 펼쳐 보인 옷감 위에는······ 물오리가 절반 정도 수놓아져 있었다.
왕 십삼랑이 정원에 있을 때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항상 자수를 두고 있는 섭령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꼬박 7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자수를 두었는데 결과는······ 물오리 절반 정도로 수놓은 게 전부였다.
왕 십삼랑이 즉시 자신이 속을까 봐 걱정된다는 범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범한도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남녀가 만나 즐거운 게 하늘의 이치인 만큼 누가 자네들을 막을 수 있겠나. 다만 나는 자네가 신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섭령아가 벌떡 일어나서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에 찬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부끄러워 한마디도 따지지 못한 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게 정말 가여워 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본 왕 십삼랑이 안쓰러워하며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웃음을 멈춘 범한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왕 십삼랑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연애하고 싶으면 해야지. 평생 둘 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기만 할 건가? 그런 연애가 무슨 좋은 점이 있다고?”
이 말로써 마침내 분명해졌다. 범한이 일부러 와서 섭령아의 비밀을 들춰낸 이유는 이해한 왕 십삼랑은 부끄럽기도 하면서 고맙기도 했다.
그는 범한처럼 뻔뻔하게 행동할 줄을 몰랐다. 반면 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섭령아는 귓속말을 하는 두 사람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마친 범한이 유유자적 군아로 걸어갔다. 어깨가 한껏 치켜 올라간 것이 자신이 한 일에 아주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섭령아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스승님, 제가 자수를 잘 두지는 못하지만, 이 오리가······ 그분이 두신 것보다는 예쁘지 않습니까?”
순간 범한은 머릿속에 바늘에 찔린 상처투성이였던 완아의 손가락과 도무지 물오리라고 할 수 없었던 물오리의 모습이 떠올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다가 재빨리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 모습을 본 섭령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방울처럼 맑고 고운 웃음소리가 청주 가을 정원 안에 가득 퍼졌다. 그리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웃음소리를 내지 않고 즐겁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만 웃으니 머쓱해진 섭령아가 웃음을 멈췄다. 왕 십삼랑의 상처를 치료하는 십여 일 동안 그녀는 자신의 소탈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면서 최대한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노력을 범한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섭령아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차마 왕 십삼랑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은 섭령아는 그가 어떤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상대가 자신을 너무 천방지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순간 마음이 심란해진 그녀의 눈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
반면 왕 십삼랑은 약간은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본심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섭령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이름은 왕희이고, 이전에 철상이란 이름을 사용했었습니다. 동이성 검려의 13제자로 며칠 동안 왕비께서 세심하게 보살펴 주신 것에 정말 감사합니다.”
섭령아는 상대방이 갑자기 입을 열거라고도 예상하지 못했고, 더욱이 이렇게 진지한 말을 할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예를 갖춰 인사하며 말했다.
“왕 대인,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신분에 맞는 호칭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건 섭령아가 보기에도 아주 자연스러웠지만, 그녀는 서로 십여 일 동안 지내면서 채 열 마디도 말을 섞지 않다가 갑자기 왕 십삼랑이 진지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정말로 저택을 떠날 생각인 건가? 모든 게 다 한낱 꿈에 불과했던 거야?’
섭령아가 마음속으로 긴 탄식을 내뱉었다. 만약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걸 선택했을 거였다. 하지만 섭령아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자수할 줄은 몰라도 검과 춤추고 창을 휘두르며 놀 줄은 알았고, 비록 과부가 되었어도 십 대 때처럼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하는 말괄량이였다······.
그녀가 왕 십삼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말하면 되지 자신을 소개해서 뭐합니까? 대인도 보니 시원시원한 성격이신 것 같은데, 설마 범 대인에게 허풍 떨면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법이라도 배우신 겁니까?”
왕 십삼랑이 당황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작은 범 대인께서······ 뭐든 다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의미를 이해한 섭령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갑자기 가을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서늘한 바람이 아니라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 * *
왕 십삼랑과 섭령아의 일은 범한이 상상하는 것처럼 되지 않았다.
칠석날 한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처럼 한차례의 만남보다는 여러 차례 만나는 게 인연이 되기에는 더 쉬운 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도발로 인해 두 사람 사이가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활활 타올라 넘치는 황하의 강물처럼 수습할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젊은 두 남녀는 여전히 서로를 예의 있게 대하며 거리를 두고 앉았고, 가끔 말을 섞더라도 고작 두마디 정도 할 뿐이었다.
왕 십삼랑과 섭령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들이 일반 사람들처럼 이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특히 섭령아는 어려서부터 초원 주변에서 성장했기에 경도 아가씨들보다 훨씬 명랑하고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사랑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섭령아는 경도에서 겪은 아픈 기억 때문에 쉽사리 행동하지 못했다.
또 왕 십삼랑의 경우 신분의 격차를 너무 신경 쓰느라 주저하기만 했다. 이에 범한이 아무리 노력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전혀 진전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범한은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인간 세상의 일은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기 마련인 만큼 세상 모든 남녀의 사랑이 자신처럼 빠르게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이런 아름다운 일들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서량로의 아름답지 않은 일들을 직접 지휘해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가을 단풍이 지고 겨울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감찰원 여덟 부처가 정주성에 모였고, 초원에서는 여덟 부족이 왕정에 모여 공무를 논의했다.
경국은 무지막지하게 초원에서 삐져나오는 손과 북제가 초원을 향해 뻗은 손을 절단했다. 그리고는 차가운 눈초리로 초원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하 대사는 임종 전에 초원에 마지막 수를 두었다. 그리고 북제 젊은 황제는 1여 년 동안 북해를 건너고 황량한 사막을 지나 경국 국경을 넘은 그 손으로 서량로와 초원의 접경 지역을 손쉽게 움켜쥐었다.
움켜쥔 시간이 근 1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경국 조정에는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국경 관문 상황이 아주 긴장되었고 국고, 군사력, 시선이 모두 서쪽에 쏠려야 했다. 이에 진정한 적이라 할 수 있는 북제에 대한 압박도 자연스레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경국 황제의 지원을 받은 감찰원은 4개월 동안 계획을 진행했다. 그리고 범한이 직접 군대를 지휘해 마침내 경력 9년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려 할 무렵 서로 맞잡고 있던 두 손을 끊는 데 성공했다.
초원의 상황은 아마도 선우 속필달과 해당이 통제하고 있으니 수습할 수 없을 정도까지 심각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어둔 밀정이 제거되었으니 북제 젊은 황제가 서량로는 마음대로 주무르기는 쉽지 않을 거였다.
게다가 범한은 초원에도 자신의 세력을 배치해 놓고 내년 봄에 날씨가 따뜻해져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열매를 수확할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각 사항의 배치가 확실한지 확인하고 전투로 인한 이득을 계산한 범한은 마침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원무에서 벗어나 경도로 돌아갈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왕 십삼랑은 그를 따라 경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첫째로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고, 둘째로 여정 과정에서 그가 그림자와 자주 접촉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었으며, 셋째로 섭령아가 설을 보내기 위해 경도로 돌아가려면 아직 보름 정도 더 있어야 하니 그동안 두 사람이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한은 자신의 계획을 아주 조금 변경했다. 그는 섭령아와 왕 십삼랑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한 이상 자연히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진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도로 돌아가 1 황자의 골치 아픈 집안일을 해결한 뒤에 추밀원에 가서 섭 대장군에게 혼사에 대해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먼저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은 뒤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