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화 풍경 속 두 사람의 마음 (2)
좋은 아들이 되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황제의 아들이 되는 건 더욱더 힘든 일이었다. 특히 경국 황제의 아들이 되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범한이 탄한 한숨을 내쉬며 경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 일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경도로 돌아간 뒤 폐하와 1 황자 사이에 끼어 고생할 처지에 놓이기 전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궁금증을 떨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황제 폐하는 1 황자 측비로 어느 집안 아가씨를 선택했을까?
이 정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조정 대신 중 누구도 자신의 딸을 측비로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화친 왕부는 호랑이 굴과 같았다. 큰 왕비는 성질 사나운 암컷 호랑이였고 1 황자는 우락부락한 수컷 호랑이였으며 황실에 있는 영 귀비는 늙은 암컷 호랑이였다. 누가 금지옥엽 키운 귀한 딸을 호랑이 입 안으로 들여보내고 싶겠는가?
경도 반란이 모두 평정된 뒤 황제 페하는 영 재인의 공덕과 1 황자의 체면을 생각해 마침내 영 재인을 귀비에 봉했다. 20여 년이나 늦게 이루어진 결정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귀비가 되었음에도 동이성 포로 출신인 영 재인의 호랑이처럼 괄괄한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 황자의 집안은 한마디로 말해서 호랑이들이 모여 사는 호랑이 굴이었다.
물론 1 황자의 집안에 어느 집안 아가씨가 측비로 들어가든 범약약이 아닌 건 확실했다. 범한이 이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는 지금 그를 누구보다도 믿고 총애하고 있는데다가 그가 과거 범약약의 혼사를 막기 위해서 무슨 짓까지 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범한은 과거 범약약의 혼사를 막기 위해서 이홍성을 천하에서 가장 음탕한 사람으로 몰아세웠었다. 그러니 만일 황제가 이 일로 범한을 건든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었다.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저택에 가득한 가을 빛깔을 바라보니 경도의 골치 아픈 일들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었다. 군아에서 시선을 돌려 높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바라보니 마음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청주성은 서호와 가까워서 그런지 초원의 풍경과 아주 흡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성격이 명랑하고 시원시원했다.
예를 들면 황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품을 가진 1 황자나 경도 다른 귀족 낭자들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 섭령아처럼 말이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저택 안 낭자를 바라보던 범한이 속으로 지금 큰 왕비가 상당히 난처해하고 있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2 왕비는 이미 둘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서 점차 벗어나는 모양이었다. 이처럼 인간 세상은 항상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법이었다.
* * *
중상을 입고 돌아온 왕 십삼랑은 몸의 회복 속도가 아주 빨랐다. 벌써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청주 군아 정원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소식을 숨길 수 없을 거라는 섭령아의 말을 듣고 나니 범한도 이제 더는 쓸데없이 숨기는 데 힘을 쏟고 싶지 않았다.
이에 종 몇 명을 불러서 바퀴 달린 의자를 밀게 하고 6처 부하들 몇 명을 보내 따라다니며 그의 안전을 지켜주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최근 십여 일 동안 범한은 정주 쪽과 연락하고 서랑로의 반격 행동을 통솔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초원 쪽과 은밀하게 거래를 진행해야 했기에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니 왕 십삼랑의 동정에는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전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눈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적막하던 청주 군아의 분위기가 왕 십삼랑이 깨어나고 나서 점점 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쌀쌀한 가을 정원에 이따금 따스한 봄바람 불었다.
왕 십삼랑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이따금 휴식할 때면 어김없이 그와 멀지 않은 곳에 한 낭자가 앉아 있었다. 낭자는 다소곳이 앉아서 자수하거나 아둔한 거위처럼 멍하니 풍경을 감상했다.
그러면 왕 십삼랑도 아둔한 거위처럼 멍한 표정으로 멀거니 풍경만 바라보았다.
젊은 남녀는 정면으로 부딪쳐도 인사만 나눌 뿐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보처럼 멀뚱멀뚱 있을 뿐이었다.
마치 거위가 굽은 목을 하늘로 쳐들고 노래를 부르고 붉은 발로 물살을 차고 싶어도 무심한 파도에 방해를 받는 모습 같았다.
범한은 감찰원의 작은 주인이었고, 섭령아는 청주성의 작은 주인이었다. 그녀의 명령 한마디에 더는 지난 1년처럼 매일 성을 나가 초원을 질주하며 약탈을 일삼는 이민족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섭령아는 조용히 군아 안에만 머물면서 이곳에 있던 오랜 부하들은 전부 내쫓고 여종들만 남게 했다.
그래서 청주 군아의 작은 정원 안에서 매일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범한은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둔한 거위를 두 마리를 바라보았다.
만약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풍경 속에서 풍경 안에 있는 어떠한 사람이 풍경의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멋진 풍경일 테니까 말이다.
범한은 섭령아의 스승이기에 그녀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만약 자신이 여자였어도 왕 십삼랑의 몸에 난 38개의 칼에 베인 상처에 마음이 놀랐으면서도 뼛속 깊이 감동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왕 십삼랑은 과묵하지만 온화한 성격을 가진데다가 외모까지 준수해서 우락부락한 군인에게 둘러싸여 있는 섭령아의 마음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물론 섭령아의 신분이 특별하기는 했지만 범한은 이 점에 대해서만큼은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께서 2년 전에 살짝 섭령아가 선택한 사람이 생길 경우 개가를 허락해 주겠다는 뜻을 보이셨기 때문이었다.
섭령아에게 스스로 남편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 건 엄청난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마음에 든 사람이 있다면 아마 경국 조정은 그녀를 위해 기꺼이 뺏어다 줄 것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걱정거리는 왕 십삼랑의 신분이었다.
왕 십삼랑은 비밀리에 감찰원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고 황제 폐하도 이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검려 13제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왕 십삼랑은 사고검이 애지중지하는 마지막 제자였다. 그러니 2 왕비인 섭령아가 원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황실에서 동이성 고수와 혼인하는 걸 허락할지가 문제였다.
물론 향후 동이성의 태도가 완벽하게 경국 쪽으로 기울게 된다면 이러한 문제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해 황제와 섭중 대인을 대신해 저 가여운 과부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그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범한이 코를 쓱 비비며 속으로 두 사람이 아직도 어색한 상태에 있으니 누군가라도 나서서 지적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섭령아는 왕 십삼랑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왕 십삼랑의 마음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섭령아의 신분이 특별히 존귀한데다가 젊은 과부이니 말이다.
범한은 왕 십삼랑이 섭령아의 옆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이유가 그녀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이 아는 섭령아는 고독을 즐기는 차분한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섭령아는 절대······ 자수를 즐겨 하는 부류의 여자도 아니었다.
순간 범한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서리를 쳤다.
섭령아가 왕 십삼랑 앞에서 매일 다소곳하게 앉아 자수한다는 게 경도에 알려져서 임완아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완아는 너무 웃다가 지쳐서 쓰러져 버릴 것이다.
범한이 마음을 정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혼인 뒤에 진실을 알고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왕 십삼랑이 뒤늦게 자신이 잘못 알았다고 후회하지 않도록 섭령아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범한이 돌계단을 내려가서는 주변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서로에게 푹 빠져 있는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그림자의 인기척을 느낀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림자는 그동안 왕 십삼랑이 자신을 발견하지 않도록 행적을 숨기며 지내왔다. 범한 역시 그림자와 검려 사이에 관계가 복잡하다는 사실과 그림자의 진짜 신분을 알기에 누구에게도 그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고검과 그림자는 같은 하늘을 보며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 사이였다. 그리고 지금 가을로 물든 청주 군아 정원에는 사고검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있었다.
아마도 왕 십삼랑을 지켜보는 그림자의 심정은 정원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젊은 남녀만큼 즐겁지 않을 터였다.
범한이 뒤에 그림자의 기척을 살펴다 말했다.
“내년 봄에 다시 가보도록 하죠. 그가 일찍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림자는 누구보다도 사고검의 생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사고검이 다른 사람의 손이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설사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이 사고검을 데려간다고 할지라도 그림자는 용납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 동이성 안에 큰 혼란이 일어났을 때 사고검을 칼을 쥐고 미쳐 날뛰었고, 자신의 가족들을 무참히 죽였다. 그 난리 속에서 도망친 사람은 당시 열여섯 살이던 그림자가 유일했다.
이에 그림자는 열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형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사고검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던 그는 나중에 분노가 점차 가라앉자 연달아 감찰원의 두 주인을 섬기에 그들의 그림자가 되었다.
사람들이 사고검을 백치라 부르는 이유도 아마 과거 그가 자신의 가족을 죽였을 때 너무도 잔혹한 방법으로 정신 나간 광인처럼 행동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거였다.
그리고 그림자가 어떻게 동이성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으며, 진평평을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진평평이 그림자를 감찰원에 들인 이유와 그림자가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진평평에게 충성하는 이유에는 아주 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것이었다.
범한은 그림자의 과거와 진평평과의 관계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물어볼 생각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말 못 할 사연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흑기 부통령인 형과나 언씨 집안도 다른 사람에게는 털어놓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처럼 그림자도 자신만의 사연이 있는 거였다. 물론 범한은 아주 깊이 숨겨진 그림자의 진짜 신분을 알았고, 그가 사고검에게 피맺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대하며 그들과 함께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갔다.
그림자의 인기척을 느낀 범한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대인께서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마세요. 분명 물어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그림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침묵하다가 범한 뒤에서 종적을 감췄다. 정원에 있는 왕 십삼랑과 섭령아는 아무런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범한이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정원으로 걸어가 아무 말 없이 두 남녀 사이에 섰다. 왕 십삼랑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는 여기 왜 갑자기 나타났냐는 표정을 지었다.
경국은 지금 서량로와 초원 이민족들, 그리고 북제의 지원 능력에 대해 가장 중요한 싸움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 십삼랑은 지난 십여 일 동안 이 일 때 정신없어하던 갑자기 한가로운 모습으로 정원에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반면 고개를 숙이고 자수를 놓고 있던 섭령아는 진작 범한이 오고 있는 걸 알아차리고는 달콤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잽싸게 빠져나왔다.
갑작스럽게 등장해 분위기를 방해하는 범한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든 섭령아의 손짓이 더욱더 느려졌다. 원래부터 아주 천천히 하던 자수 속도가 더 느려지자 자수를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자수바늘로 천을 간질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