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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17화 (817/1,108)

817화 귀환 (2)

왕 십삼랑은 그의 요청에 일언반구도 답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동이성을 떠나 경국 경도에 있는 범한을 찾아왔다.

그래서 범한, 그림자, 왕 십삼랑, 이렇게 세 고수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초원으로 들어가게 된 거였다. 절정의 고수를 이용한 집행 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현 감찰원은 과거 진평평이 이끌었던 때보다 훨씬 더 가공할만한 수준이었다.

범한은 왕 십삼랑이 와준 덕분에 그제야 초원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 거였다. 왕 십삼랑은 신분이 특수해 황궁으로부터 과도한 의심을 살 수 있었다. 이에 범한은 내내 왕 십삼랑의 신분을 속였고, 그를 상인 행렬에 끼워 넣은 후 가는 도중에 서로 갈라지는 방법을 택했다.

황제 아버지께 사고검이 불구가 되고 백치가 되었는데도 왜 왕 십삼랑은 과거 협의를 지키려 한 걸까. 범한은 그런 그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서 뭐하겠나. 이에 범한은 왕 십삼랑이 서호의 좌현왕을 죽인 후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수일이 지난 후 범한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왕 십삼랑의 귀환을 모두가 알게 된 거였다. 그림자가 조용히 돌아온 것과 달리 검려 13제자의 귀환은 온 청주성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뜨거운 태양이 하늘 높은 곳에서 청주 성을 비추어 싸늘한 가을바람이 아직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성문 밖의 푸른 벽돌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더니, 피범벅이 된 사람이 청주성 성문으로 걸어 들어왔다.

청주성에 있는 병사들이 피범벅이 된 사람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긴 창을 들고 여러 겹으로 그를 에워쌌다. 하지만 병사들은 피범벅인 사람이 뿜어내는 한기와 살의에 압도되어 속으로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모피로 안감을 댄 서호 이민족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만약 서른 몇 개의 구멍이 난 이 옷도 옷이라고 한다면, 옷은 구멍에서 베어 나온 무수히 많은 피가 응고되고 번져 전신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피범벅이 된 자가 초원에서 얼마나 걸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곪기 시작한 상처 부위에 파리와 모기떼까지 꼬이고 있어 그의 몰골은 유난히 더 처참해 보였다.

청주를 지키는 병사들은 이 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리 심한 중상을 입고도 초원에서 걸어올 정도면 분명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피범벅인 자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피거품이 이는 입술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범한과 약속한 일을 내가 해치웠으니, 범한에게 알려라.”

소식을 들은 범한이 서둘러 나가 피범벅인 자를 부축했다. 그의 몸에 난 상처를 보는 순간 범한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번 초원에서의 계획을 보면, 범한은 선우와 해당타타를 유인해 내는 걸 맡았고, 이 과정에서 해당타타는 결국 범한을 죽이지 못했다.

한편 그림자는 아무도 모르게 일처리를 했지만, 그래도 꽤 큰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그리고 왕 십삼랑은 제일 어려운 좌현왕 암살을 맡았다.

범한은 왕 십삼랑이 호족 군영이 계속 이어진 곳에서 방대한 세력을 지닌 좌현왕을 어찌 죽였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부탁한 일을 상대방이 완전무결하게 해결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범한은 혼절한 왕 십삼랑을 안고 군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묵을 유지한 채 이 용사에 대한 치료를 시작했다.

한편 섭령아는 뒤쪽에서 잔뜩 놀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침과 칼을 건네며 생각했다.

‘칼을 십여 번이나 맞은 이 감찰원 관원은 대체 누구지? 칼을 이렇게나 많이 맞아 놓고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야?’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왕 십삼랑은 눈 오는 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한을 신뢰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그는 이 방안에서 아이처럼 쌔근쌔근 자고 있지 않을 것이다.

범한은 침대에 혼절해 있는 젊은이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 자신의 심정을 설명해줄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머리를 긁적였다.

대야 안의 시뻘겋게 피 묻은 수건에서는 옅게 피 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왕 십삼랑이 입고 있는 가죽이 덧대어진 옷을 벗기기 위해 범한이 많은 애를 썼던 것이다.

옷 안쪽에 있는 피는 일찌감치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초원에서 불어오는 모래 바람과 섞여 왕 십삼랑의 몸에 아교처럼 단단히 붙어 있었다.

범한은 일단 왕 십삼랑에게 이런 저런 약을 먹였다. 그리고 이미 딱지가 앉은 상처 부위를 찔러 터뜨린 후 안에 있는 고름을 짜내고, 그가 걸어오는 도중 벌어져버린 상처를 다시 잘 꿰매주었다. 이 모든 게 끝났을 무렵 범한은 쓰러질 것처럼 피곤했다. 이에 침대 옆에 무력하게 털썩 주저앉은 후 그냥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마약을 먹여 제일 몽롱한 상태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근육 통증 때문인지 왕 십삼랑은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려댔다. 동이성 검려의 마지막 제자는 정말 맑고 수려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

특히 양 눈썹은 찌푸릴 때면 유난히 더 멋스러워 보였다. 마치 인생 문제를 놓고 고뇌하는 철학가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런 후 들고 있던 칼이며 봉합용 바늘을 대야 안에 넣고는 기지개를 쭉 폈다. 치료를 하는 동안 범한은 상처 수를 세세히 세어보았다. 왕 십삼랑의 몸에는 모두 38개의 상처가 나 있었다. 모두 칼에 베인 상처였고 모두 상반신 앞쪽에 몰려 있었다.

상처가 상반신 앞쪽에 몰려 있는 것과 관련해 군영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이 회자되고 있었다. 그런데 왕 십삼랑은 용맹하고 강하니, 그 말을 완벽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는 바로 무수히 많은 칼에 맞서 정면 돌파를 한 거였다.

범한은 멍하니 왕 십삼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좌현왕을 찔러 죽이는 걸, 호족 군영을 강렬하게 돌파하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범한은 처참한 상처 하나하나에게서 십여 일 전에 초원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을 들은 것만 같았다.

지난 번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던 동료를 만났을 때가 언제였더라? 분명 북제 상경성에서 그 공자의 흰색 도포를 뜯어낼 때였다. 범한은 침대에 누워 있는 왕십삼랑을 바라보고 있다가 순간 그를 언빙운과 동일 인물로 착각하고 말았다.

다만 오늘 본 왕 십삼랑의 상처는 언빙운보다 심각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범한에게는 완전히 다른 관계였다. 언빙운은 자신의 수하이자 수족이었고, 더욱이 경국의 충신이었다. 한편 왕 십삼랑은 범한에게 2년 동안 붙어 있었지만, 그건 동이성의 이익 때문이었다. 왕 십삼랑을 보고 있던 범한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어 살짝 눈을 가느다랗게 뜨기 시작했다.

‘설마 약속이라는 게 이 세상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 거였나?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거였어?’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혼미한 상태인 왕 십삼랑도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범한과 왕 십삼랑은 둘 다 잘생겼다. 다만 왕 13이 범한보다 냉담한 느낌이 2할 정도 덜하고, 친절한 느낌이 3할 정도 많았다.

특히 혼미한 모습으로 있다 보니, 어린 티도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이 동시에 이맛살을 찌푸리자 참으로 묘한 광경이 빚어졌다.

* * *

방 밖에서 물 따르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이어 섭령아가 대야에 담긴 뜨거운 물을 들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수건에 물을 살짝 적신 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조심스레 왕 십삼랑 몸에 묻은 피를 닦아주려 했다. 한데 몸에 상처가 너무 많다 보니 한참 동안 손을 댈 곳을 찾지 못했다.

“서른여덟 군데를 베였다니······.”

섭령아가 입술을 꽉 물었다. 이름 모를 감찰원 관원의 고통을 그녀가 대신 느껴주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이 사람에게 초원에 들어가 무얼 하도록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자는 이리 심한 중상을 입고도 돌아왔군요.”

조금 전 범한이 수술을 할 때 섭령아는 너무 놀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는 범한의 신의 의술 실력에 경탄해서였고, 둘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의 다친 정도에 깜짝 놀라서였다.

한창 생각 중이던 범한은 섭령아의 말에 놀라 정신이 돌아오자 이내 입가를 멋쩍게 움직이며 웃어보였다.

“감찰원 관원이 아닙니다.”

섭령아는 범한을 쓱 바라보고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부상자가 평범한 이가 아니란 사실은 그녀도 눈치 채고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범한이 이 사람과 관련한 소식을 새나가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더군다나 존귀한 신분인 왕비에게 직접 돕도록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범한이 섭령아의 손에서 젖은 수건을 빼앗은 후 이마에 땀을 닦았다.

“저자의 이름은 왕 십삼랑이고 동이성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왕 십삼랑이라고요?”

섭령아의 눈이 순간 반짝이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어쩐지 대단히 용감하다 했어요.”

범한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자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

섭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과 관련한 소식을 계속 속일 생각은 말아요. 이틀 안에 황제 폐하께서 그가 초원에 개입했다는 걸 알게 되실 테니까요. 그러니 어찌 해명할지나 잘 생각해 두라고요.”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황제 폐하께 해명하는 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동이성이 어느 쪽에 붙을 지는 결국에는 사고검 생전에나 통하는 말이니까. 그러니 본인이 왕 십삼랑과 관계를 잘 맺어둔 데 대해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 화를 내시지는 않을 터였다. 단지 섭령아가 왜 왕 십삼랑에 대해 이리 잘 아는 것처럼 말한 건지만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 사람이 한동안 당신 수하였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 없기는 하죠. 하지만 군 측에서는 감찰원에 정말 대단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건 많이들 알고 있었어요.”

“듣자하니, 그가 작은 할아버지의 공격도 막아냈다고 하더라고요.”

섭령아가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 금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고 했어요. 모두들 대단히 감탄했다고 하더군요. 최근 2년 동안 많이 회자되었으니, 자연스레 유명해질 수밖에요.”

섭령아의 작은 할아버지는 바로 대동산 일 이후 스르륵 사라져버린 대종사 섭류운이었다. 이에 범한은 조금 전 섭령아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 고개를 돌려 혼미한 상태인 왕 십삼랑을 쓱 쳐다보고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용맹한 성정을 지녔으니, 군에 있었더라면 분명 보기 드문 맹장이 됐을 거예요.”

범한은 북제의 일대 명장인 상삼호가 2년 전 대동산 입구에 왕 십삼랑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했었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 * *

왕 십삼랑은 꽤 시일이 지나고 나서야 깨어났다. 검려의 막내 제자가 체내에 어떤 힘을 축적해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상처 회복 속도는 정말로 빨랐다. 그가 깨어난 날, 범한은 기쁜 마음을 억누르고 다음과 같이 직접적으로 물었다.

“자네는 동이성의 미래일세. 그런데도 나를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내놓은 건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왕 십삼랑이 동이성을 떠나 범한 곁으로 돌아온 건 당연히 눈 오는 날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작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왕 십삼랑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짙은 눈썹이 검처럼 치켜 올라가 있는데 여기에 얼굴까지 창백해지다 보니, 그는 유난히도 무서운 사람처럼 보였다. 한참 후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스승님께서 더는 버티실 수 없는 상황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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