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화 귀환 (1)
홍산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가 산 위의 모래와 돌을 밟는 듯한 소리여서 형과가 참다못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범한은 형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터라 하하하, 하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목이 쉬어서 그런지 범한의 웃는 소리는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홍산에 매복하고 있던 경국 정서군이 인내력이 한계에 달했는지 범한 일행에게도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낸 것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앞쪽 산골짜기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세자 이홍성이 정주군을 데리고 범한 일행을 맞으러 왔다.
이홍성이 말의 배를 툭 쳐 범한 앞까지 왔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범한의 몰골을 보며 참다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내 속필달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는가. 그런 자가 어찌 자네에게 충동질을 당해 걸려들겠는가?”
그러자 범한이 이홍성을 쓱 바라보고는 대꾸했다.
“그래도 엿새나 나를 따라오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엿새는 뭔가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요.”
“왕정에 있는 북제 사람들을 죽이는데, 그리 소심하게 행동했어야 하는 건가?”
이홍성이 그건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범한을 쓱 보았다. 그리고 요놈이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말을 이었다.
“서호 이민족들과 맞붙었는가?”
“물론,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양측의 대오가 하나로 합쳐지고 기세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리고 이들은 천년의 모래와 바람을 품고 있던 홍산 입구를 순식간에 빠져나왔다.
그 어떤 소식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누구든 서호 왕정 쪽으로 소식을 보내는 걸 막기 위해 홍산 입구에는 경국 정예병 8천 명이 매복해 있었다. 모두 대장군부에 있는 직속 부대와 청주성 전선 군인이었으며, 이들 거대 병력은 정주 쪽을 통하지 않은 채 이동한 거였다.
“여기에서 이레를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지 않았어. 감찰원에서 우리에게 뭐든 알려줬어야 하지 않은가?”
거품 물고 말하던 이홍성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냥 좀 넘어가줘요.”
범한이 말의 배를 살짝 쳤다. 그리고 몸 구석구석 시큰거리지 않는 곳이 없기에 이홍성에게 잠시 눈을 부라리고는 속으로만 말했다.
‘홍산 입구 매복은 단순히 준비만 한 것뿐이라고요. 선우의 질투심이 얼마나 큰 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여기만 해도 청주로부터 수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서둘러 돌아가야지, 여기에서 계속 말싸움만 하고 있으면, 이것 또한 위험한 모험을 하는 거라고요.’
지금 범한이 관심을 갖고 있던 건 실은 정주성 내부 상황이었다.
“공격은 한 겁니까?”
“공격하기 전에 내가 떠났네만. 자네 수하들은 모두 총독관아에 협조하고 있다네. 그리고 내가 군령을 내려놨으니, 자네는 염려 놓으시게.”
이홍성이 범한을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겠으나 연일 정보가 오기는 했어. 공격은 분명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거야. 그러니 북제가 정주에 심어둔 첩자는 자네 사람들이 기본적으로는 다 색출해 냈을 걸세.”
범한은 고개만 끄덕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번 작전으로 초원은 심각한 혼란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일 관건은 감찰원 일부는 초원으로, 일부는 서량로로 흩어져 들어가 북제 사람이 이 광활한 전쟁터에 매복시켜 놓은 첩자들을 성공적으로 소탕했다는 거였다.
고하가 죽기 전에 악랄한 수단을 가동시켰고, 북제 젊은 황제와 해당타타는 그걸 가지고 2년 동안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다. 그런데 범한은 더 악독하고 후안무치한 대응 방법을 동원해 그 국면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거였다.
* * *
나흘 후, 근 만에 달하는 경국 정예병이 드디어 초원에서 철수해 청주성으로 들어갔다. 이들 부대는 서호 기마병과 전투를 하지 않아 감찰원 행동의 배경 화면 역할만 하고 온 거였다. 이에 출병 나갈 때 한껏 치솟았던 사기는 자연스레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홍산 입구에서 너무 오랫동안 기다린 탓에 이들은 패잔병들 같은 느낌을 풍기기까지 했다.
감찰원 흑기 일행의 정신 상태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범한 체면을 살려줘야 할 일이 없었다면, 이들은 곧바로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잠부터 청했을 것이다.
청주성으로 들어오자 범한은 곧바로 흑기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명을 내렸고, 형과는 곧장 명을 수행하러 갔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씻고 식사를 할 수는 없었다. 우선 몇 백 필에 달하는 특별 훈련을 받은 감찰원 준마들부터 돌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말들은 체내에 쌓인 약효가 드디어 반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해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서둘러 치료해주지 않으면 말들은 차츰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몇 백 필의 말은 사람 손을 거친 군마(軍馬)이자, 동시에 감찰원 흑기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래서 흑기는 말들이 비참한 지경으로 내몰리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천 리에 달하는 거리를 미친 듯이 내달린 흑마들은 처음의 출중했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흑기들은 어느 정도는 암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범한은 서대영의 군대를 따라갔다. 그를 맞아준 건 청주성 도로 양측에서 쏟아지는 추측의 눈초리였다. 병사들과 상인들은 저 젊은이의 신분이 무엇일지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정에서 초원 쪽에 큰 공격을 시행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한데 정주군이 피로에 찌들고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어 사람들은 모두 경국의 공격이 실패했다고 여겼고, 이에 조금 이상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범한과 이홍성이 막 청주 군아(軍衙)로 들어갔을 때였다. 소식을 들은 섭령아가 급히 성벽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후실(後室)로 뛰어가 여닫이문을 벌컥 열고는 버럭 화부터 냈다.
“본인이 신서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죠? 사람 몇 명만 데리고 초원 깊은 곳까지 들어가다니요! 서쪽 이민족에게 산채로 잡아먹힐 걱정은 안 했어요?”
섭령아에게는 화를 낼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범한이 이번에 초원 먼 곳까지 나갔기 때문이었다. 아무 손실도 없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큰 모험을 한 것이었다.
이에 섭령아는 범한이 본인의 목숨을 가벼이 여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범한이 초원에서 죽었다면 완아는 어쩌라고! 두 아이는 어쩌란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어 울컥 화가 치민 것이다.
섭령아는 임완아의 단짝친구이기 때문에 범한의 경솔한 행동을 향해 가혹하게 비난을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다른 이유 때문에 화를 낸 것이기도 했다. 그건 바로 범한이 청주성까지 와 놓고 자기도 만나지 않고, 또 이리 큰일을 할 거면서 자신을 속였기 때문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던 범한은 입에서 입김을 가닥가닥 내며 문을 부술 듯 열고 들어온 섭씨 가문의 큰아가씨를 그냥 멍하니 보고 있었다.
섭령아는 가벼운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범한의 시선은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익숙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상대방의 마음씨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런데······.
“왕비님의 얼굴을 보니, 이민족들보다도 더 나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것 같군요.”
범한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비님, 나와 홍성 세자는 지금 옷을 벗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 성급하게 나오면 쓰겠습니까?”
범한과 이홍성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래서 청주 군아로 들어오자마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자신들의 권세와 지위를 이용해 당장 뜨거운 목욕물을 목욕통 두 개에 나누어 대령하도록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제 막 기분 좋게 목욕물에 몸을 담근 순간, 생각지도 못하게 여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온 거였다. 그것도 특별한 신분의 여인이 말이다.
섭령아는 범한이 말해준 때문에 범한과 이홍성이 홀딱 벗은 채로 목욕통 안에 웅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다.
특히나 두 사람이 일부러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 섭령아는 그게 너무나도 꼴불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섭령아는 어려서부터 정주군 안에서 자라 활발하고 화끈했고, 성격이 일반 여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에 그녀는 부끄러워하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발 옆에 침을 한 번 ‘퉤!’ 하고 뱉고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뒤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 * *
초원에서 좌현왕이 암살당했고, 왕정 쪽에서도 일이 터졌으니, 그곳에서는 분명 혼란이 일 것이었다. 이홍성은 경국 조정의 주(駐)서량군 수뇌로 이 일을 속히 경도에 보고해야 했다.
아울러 초원에서 새로 발생할 국면에 대응하기 위해 정주로 돌아가 대군영을 지키고, 군사력을 배치해야 했다. 이에 이홍성은 다음날 곧장 청주성을 떠났다.
하지만 범한은 청주성에 남았다. 청주의 풍광이 좋아서도, 섭령아 때문도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는 몇몇이 돌아와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였다.
정말 여러 날이 지난 후, 범한은 중원 상인 대열로 다시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온 몸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청주성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시간을 따져보니 상인 행렬의 이동 속도는 제법 빠른 편이었다. 상인 행렬은 범한이 철수할 때 사용한 길과 다른 길로 돌아오느라 그 심장 떨리는 무서운 추격전은 보지 못했다.
상인 행렬이 무사히 귀환하자 범한은 마음이 좀 놓였다. 그는 그동안 감찰원의 행동 때문에 중원에서 온 상인들이 이민족들의 보복 대상이라도 되면 어쩌나 하고 내내 걱정하고 있었다.
한데 걱정한 것과는 달리 호족은 잔뜩 화가 난 와중에도 상인들에게는 꾹 참고 공격을 하지 않았다.
해당타타가 2년 동안 초원을 교화하고 선우가 장래에 대해 결정한 게 있다 보니, 이미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곧이어 소와 양을 잃고 초원에서 살 수 없게 된 어느 외로운 유목민이 청주성으로 들어왔다. 한데 그 누구도 이 외로운 유목민이 요 반년 동안 몸이 굽은 벙어리 종인 척 하며 살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림자도 무사히 돌아오자 범한은 마음이 절반은 놓았다. 그런데 왕 십삼랑 녀석은 왜 감감무소식인 건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던 범한은 왕 십삼랑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번 초원 행은 큰 그림을 그리고 간 거였고, 감찰원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음험한 수단으로 적을 대한 거였다. 하지만 그 수단이란 것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늘 강한 집행 능력을 지닌 사람이 필요했다.
이제 범한은 강력한 고수였다. 그런데도 수하에 그림자를 두고 있었다. 만약 범한에게 가공할만한 이들 극강의 살수가 없었다면, 범한이 설령 해당타타와 선우를 유인해냈다 하더라도 감찰원이 세운 목표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왕정 쪽에 있는 북제인은 그림자가 처리했다. 그렇다면 좌현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다른 강자가 필요했다. 범한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어야만 했다. 천하에서 절정의 고수는 고작 십여 명 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한참 후 범한은 의사 타진 차원에서 포월루를 통해 왕 십삼랑에게 요청을 넣어보았다.
대동산 사건 후, 왕 십삼랑은 줄곧 동이성 검려에서 중상을 입어 죽기 직전인 사고검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검이 죽을 것 같으면서도 계속 살아 있는 바람에 왕 십삼랑은 더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비록 2년 전에 범한과 왕 십삼랑이 협의를 한 게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범한은 그 협의가 유효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의사 타진 차원에서 요청을 넣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