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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15화 (815/1,108)

815화 가을 들판, 석양, 흑기 (2)

과거 경국이 북벌에서 참패해 지금의 경국 황제가 오도 가도 못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진평평이 흑기를 이끌고 구출 작업에 나섰었다. 그리고 6일 만에 전쟁터에서 천리를 뚫고 들어가 당시 태자 신분이었던 현 황제를 산채로 구출해 왔었다.

그리고 또 1년 후, 진평평은 흑기를 이끌고 북위 국경 안 깊은 곳까지 침투해 소은을 산 채 로 잡아들였다. 그리고 북위 군측이 대응하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경국 국경 안으로 철수했다. 한데 흑기는 공격하러 들어가고 철수할 때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수천 리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었다.

이렇듯 흑기의 천리 급습 능력이 천하 최강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감찰원 흑기가 천리 급습에서 명성을 얻게 되자 이들은 이 부분에 있어 훈련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전투마에게 약을 먹여 효과를 지속시키는 데에도 지대한 공을 들여 전쟁터에서 불길처럼 재빨리 들어가 물처럼 순식간에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서호 왕정의 기마병은 급습에 있어서 천하제일이고, 재빨리 빠져나오는 데에도 천하제일인 흑기와 맞붙은 거였다. 그러니 자신들이 제아무리 정예병이라고 한들, 새처럼 날아 들어가 공격하고 빠지는 대오를 어찌 추격할 수 있을까?

초원의 가을바람이 얼굴을 덮쳐오는 가운데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옆에 있는 형과를 바라보았다. 형과가 쓰고 있는 은색 가면을 보는 순간 범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초원에 서호 왕장이 있는 깊숙한 곳, 그러니까 서호 왕정까지 들어와 선우를 유인해 내고, 또 거대한 폭탄까지 설치하는 일은 자신의 부하들을 절대적으로 믿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추격 셋째 날, 선우 왕정의 기마병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속도를 줄인 적이 없기에 그들이 타고 있는 준마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상대방은 따라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초원 먼 곳까지 들어온 경국인은 아직 여력이 남았는지 대담하게도 가끔씩 속도를 늦추고 억지로 일정 속도를 유지하며 뒤쪽에 있는 왕정의 기마병을 유인하기까지 했다.

대당호의 경계하라는 소리와 피곤에 지친 보고에 먼지를 가득 뒤집어 쓴 선우 속필달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사실 그는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도 앞에 있는 야생마들이 이상하고, 심지어는 신기하기까지 해 뭔가 잘못 됐다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왕장의 참매는 상공에서 맴돌고 있었고, 청주로 가는 초원 길목에는 자신들을 가로 막는 큰 부족이 없기에 선우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던 것뿐이었다.

좌현왕이 자객의 공격을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은 이미 확인이 된 상태였다. 이에 선우는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온 초원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다면, 모두들 선우나 우현왕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돌릴 것이었다. 그러면 좌현왕장에 있던 사내들은 분명 현왕을 대신해 복수하겠노라 이미 크게 떠벌릴 게 분명했다.

왕정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면 선우 속필달은 지금 당장 말을 돌려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좌현왕 측에게 해명을 해야 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지 오래니, 좌현왕장에서는 자신을 향한 의심이 더 커져 있는 상태일 터였다.

선우 속필달은 당연히 좌현왕 부하들이 복수하러 나올까 봐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초원의 진정한 군왕으로 자리 잡고 싶었던 그는 반드시 피비린내 나는 내홍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만 했다.

초원에서의 건국은 피 흘리는 싸움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송지 왕녀의 말을 믿고 있던 거였다.

단지······ 내키지 않을 뿐!

선우는 타고 있던 준마의 속도를 늦추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지칠 리 없어 보이는 야생말 무리를 바라보며 선우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리만큼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러자 왕정 기마병들이 일제히 멈추고는 위대한 선우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이걸 계속 해야 하는지, 그리고 계속 이리 힘들게 쫓는 게 나은지 돌아가는 게 나은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초원에 혼란이 일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경국 사람이 초원에서 무공 실력을 뽐내는 걸 바라 보기만하고 그냥 이렇게 돌아가는 건 그들로서는 도통 내키지가 않는 일이었다.

선우 속필달도 당연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초원의 주인으로서 가끔은 마음의 분노를 억누를 필요는 있었다. 무엇이 가장 이득일지를 생각해 나아가야 할 가장 정확한 길을 찾아야 했다.

이에 선우가 암담하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왕정 기마병들에게 말 머리를 돌려 왕정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바로 이때 그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서호 기마병이 추격을 멈추는 순간 전방 노을 아래에 있던 도망자들도 갑자기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야트막한 풀숲에서 고개를 돌리고 추격병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어떻게 굴욕도 이런 굴욕이!’

선우가 이를 꽉 깨물고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한참 후 오히려 편안해진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돌아간다.”

* * *

“상대가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형과가 모래 먼지에 뒤덮여 있는 제사 대인을 쓱 보고는 말을 이었다.

“더 이상 안 쫓아 올 것 같습니다.”

범한이 입에 들어온 모래 먼지를 뱉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한결 가벼웠다. 현 상황을 보면 도망자들이 매우 마음 편히 도망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추격을 당해본 사람 입장이다 보니, 이들은 서호 기마병의 가공할만한 실력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호 왕정의 정예 기마병이 흑기에게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준 건 확실했다. 속도만 놓고 봐도, 서호 기마병은 확실히 세상에서 제일 강대했다.

과거 북위 기마병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았다. 흑기가 정말 멋지게 달리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견딜 수 없을 지경까지 온 터였다. 만약 서호 왕정의 기마병들이 이틀 정도 더 버텼다면, 흑기 전투마들은 점점 떨어지는 약효 때문에 범한 앞에 피 안개를 뿌렸을 수도 있었다.

범한이 지금까지 흑기에게 미친 듯이 내달리지 못하도록 한 건 이미 머릿속에 다 계획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해, 선우의 왕정 기마병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계획이 주효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범한이 보기에 서호 선우처럼 야심이 큰 사람은 화가 난다고 이성을 잃고 범한만 쫓아오거나, 또 왕정에서 발생한 혼란과 좌현왕의 죽음으로 초원이 폭동이 일어나는 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니었다.

뒤로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서호 왕정 기마병이 대열을 정비하며 뒤로 철수했다. 선우 속필달은 제일 뒤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두른 얇은 갑옷에 석양이 비추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여전히 냉혹해 보였다.

범한이 ‘퉤!’ 하며 입안에 있던 마지막 한 알의 모래알을 뱉어냈다.

“이번에 내가 분명 저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거예요. 그러니 훗날 초원에서 다시 붙게 된다면, 저자는 들판에서 전투를 하는 것임에도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겠지요.”

“놀라 물러나다니,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형과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

“다만 세자 어르신께서 홍산(紅山) 입구에 병사를 십여 일 동안 매복해 뒀는데, 선우가 나타나지 않아 실망하겠군요.”

“그만합시다. 저자는 초원의 주인이에요.”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저 멀리 풀숲에서 외롭게 말을 타고 가는 선우를 바라보며 입을 씩 벌려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 함정에 쉬이 빠질 리 있겠습니까?”

양측은 서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상대방의 얼굴 표정은 볼 수 있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멀어져가는 상대방을 확인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내 범한은 참을 수 없는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늑대 같은 서호 병사들에게 사흘이나 쫓기다 보니 양측은 모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상대방이 포기했다고는 해도 범한은 실망하기보다는 해방된 기분뿐이었다.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사흘 동안 기다렸고 또 사흘 간 추격전을 벌인 거였다. 하지만 흉악한 일이 일어났다거나, 양측이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화살이 날아든 것도 아니어서 얼핏 보기에는 아이들 놀이처럼 보였다. 또 하지만 이번 추격전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와 어떤 위험이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범한 일행은 초원 중심지까지 들어갔다가 말을 내달리며 멋지게 그곳에서 벗어났다. 비록 작전대로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워 놓은 건 있었다. 여러 해 전, 경국 최대의 변경 개척 활동도 감찰원이 암암리에 주도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 일로 진평평이란 이름은 지금까지도 초원에서 악마와 동일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의 이번 서호 행은 감찰원의 우수한 전통을 이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가 감찰원을 맡은 후 영지를 거만하게 한 차례 순시한 게 되었다.

이번 일로 초원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동안 서호 왕정은 초원을 통일해 경국과 맞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초원 중심지까지 들어온 경국인들을 잡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의 실력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요 2년 동안 잘나가던 서호 부락은 출병 할 때 더 소심하고 신중한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서호의 선우 속필달은 사흘을 쫓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우울한 기분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그냥 보기에도 그는 무력하고 슬퍼보였다. 하지만 그게 범한의 눈에는 다른 의미로 비춰졌다.

초원의 주인은 단호하게 퇴각하고 용감하게 포기를 하는 상황에서도 호족 기마병들의 호전적인 면을 충분히 억누르고 있었다. 이에 범한의 눈에 비친 선우 속필달은 그동안 초원에서 볼 수 있었던 부류는 아니었다.

만약 이런 사람이 해당타타의 도움을 받아 정말로 초원을 통일한다면 경국의 큰 우환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범한이 눈을 깜빡였다. 그의 긴 눈썹 위에는 먼지가 가득 붙어 있어 범한은 흙 인형과 같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초원의 강자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놀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적막하고 무력해지는 기분이었다.

“갑시다.”

범한이 말고삐를 쥐고 초원에 드리워진 노을을 향해 내달리자 그가 타고 있는 전투마가 환희에 찬 질주를 했다.

* * *

왕정 추격병들이 이미 물러난 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흑기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서쪽 이민족는 지독해서 위장 퇴격을 한 후 다시 측후방에서 공격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초원에서 서호 사람들은 참매에게서도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는 범한이 가지고 있는 원통 망원경의 효과를 완전히 상쇄시켜버릴 수 있는 거였다.

이러한 이유로 초원을 빠져나온 범한 일행은 섣불리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이에 몸은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억지로 버티며 약물 섞인 땀을 흘리고 있는 말을 재촉해 동쪽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렇게 이레를 달려 홍산 입구로 들어선 후에야 범한과 흑기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홍산은 초원 동쪽에 위치한 정말 괴이한 지형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흙과 돌이 자연적으로 쌓여 만들어졌으며, 수 만년 동안 풍화 작용을 거치며 깎이고 잘려나가 고립된 산봉우리가 된 곳이었다.

산봉우리는 온통 붉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얼핏 보면 어서방에서 황제가 어필로 찍는 붉은 인주의 색깔과 닮아 있어 깜짝 놀랄 정도로 살기등등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관문으로 들어서는 길은 홍산 아래쪽에 양(羊)의 내장처럼 좁고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다. 대오의 맨 앞쪽에 있던 범한이 형과가 건네주는 가죽 주머니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물 한 모금 마셔 욱신거리는 목을 축인 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 일을 끝냈으니, 경도로 돌아가면 분명 두 달은 누워 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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