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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14화 (814/1,108)

814화 가을 들판, 석양, 흑기 (1)

“다쳤소?”

해당타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경국의 범한인가?”

큰 키에 굳센 이목구비를 지닌 속필달이 저 멀리 야생마 무리와 함께 동남쪽으로 질주하고 있는 형체를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 맞습니다.”

해당타타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선우 속필달은 자신의 적이라면 그 누구도 가볍게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경국의 범한 같은 사납고, 대단한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속필달이 사흘이나 참고 버틴 건 실은 그동안 초원에 있는 호족 사나이들을 모으기 위해서였고, 경국에서 지위가 높은 저 신하를 어떻게든 초원에 남아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상대방이 초원 깊숙한 곳에 있는 서호 왕정 근처까지 와 자신의 존엄에 도전했으니, 선우 속필달 입장에서는 반드시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 보여야 했던 것이다.

왕정 쪽은 충분히 준비를 했고, 경국 기마병이 초원을 순시하는 중이 아니란 것도 확인해 범한 몰래 그와 맞설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척후병들은 야생마 무리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어디에서든 야생마를 볼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척후병들이 일찌감치 수초 옆에 있는 야생마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뛰는 자세와 습성을 가지고 야생마라는 걸 확인해서였다.

그 누구도 야생마를 앞에서 제압한다거나, 야생마를 이용해 도망갈 수 없다는 건 초원에서는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오늘 그 불변의 진리가 누군가에 의해 깨져버렸다.

사방팔방에서 먼지가 잔뜩 일고 돌격 중인 천 명이 넘는 선우 왕정 기마병이 부락 천막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족 백성들은 너무 놀라 두려운 눈빛으로 모든 걸 지켜보았다.

기마병들이 야생마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을, 조정 기마병이 3리 앞에서 한데 모이는 것을, 야생마 떼를, 그리고 말 옆에 있는 십 여 명의 사내를, 그리고 야생마 무리 사이에 숨어 있는 범한을 포위하는 것을, 그러다······.

말들이 ‘이히힝’ 하며 하늘을 뚫을 듯한 소리로 길게 울었다.

어떤 힘이 갑자기 야생마 무리를 부리기 시작했는지, 순식간에 혼란이 일었다. 이어 정신이 바짝 든 말들이 온 몸의 근육을 한껏 펼치고 흥분해 네 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속도를 높여 포위가 성글게 된 동남 방향을 향해 맹렬히 내달렸다.

새벽빛이 희미한 가운데 말이 길게 울었다. 수백 필의 준마가 흐릿하지만 빛나는 검은색 털을 드러내고 채 초원에서 마음껏 내달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서호 왕정 기마병의 포위선 앞까지 돌진해 왔다.

원시적이면서도 힘이 넘치는 멋진 광경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선우 속필달은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있었고, 해당타타 옆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싸늘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실은 많이 놀랐지만 자신의 마음을 잘 숨겼다.

속필달이 얼른 몸을 돌려 말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

“내가 저 허연 놈을 잡아다가 그대 대신 화풀이를 해 주리다.”

사실 이즈음 되니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송지선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국의 젊은 권력자는 절대 그저 얼굴이 허옇기만 한 놈은 아니었다.

야생말을 다루는 것을 보니 기마술이 신기에 달한 그는, 온 초원에서 비교 대상을 찾아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실력이었다.

“왕정 쪽이 어젯밤에 습격을 당하고, 좌현왕도 자객에게 당했다고 하나 아직 생사는 모릅니다.”

해당타타가 선우의 근위병 수십 명이 있는 풀숲에 서서 범한이 저지른 일에 대해 담담하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선우는 양 손으로 고삐를 잡으며 살짝 어안이 벙벙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박차를 가해 풀숲 아래쪽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이제 보니, 경국 감찰원 제사가 한밤에 초원 먼 곳까지 온 건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였다. 왕정에서 누군가가 급습을 당한 건 별일 아닌 축에 속했다.

그리고 경국 정예 기마병이 공격해 오지 않은 이상, 왕장에 있는 사람 몇몇이 죽었다고 뭐 대수랄 게 있을까?

하지만 선우가 생각지 못한 게 있었다. 바로 경국 감찰원에서 이번에 선택적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모두 초원에 나라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이란 점이었다.

관건은 좌현왕이 자객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선우도 심장에 한기가 들기 시작했다.

‘설마 2년 동안 아무 일 없던 초원이 좌현왕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지는 건 아니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선우 속필달은 어느새 속으로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좌현왕은 그와 같은 혈통으로 숙부뻘이었다.

‘예전에 나에게도 오만하기 그지없게 행동하던 그자가 경국 자객에게는 단칼에 죽다니. 그야말로 고얀 놈이로고!’

분노한 선우는 저 멀리 보이는 먼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두 다리로 말의 배를 꽉 조이고는 동남 방향을 향해 돌진했다. 비록 저 허연 놈이 야생마 무리를 이용해 엄호를 받고 있고, 또 예상을 뒤엎고 포위망을 뚫었지만, 그래도 이 드넓은 초원에 있는 한 그 누구도 서호 왕정 기마병의 추격과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거라 믿고 있었다.

지금 이 위치에서 경국 최변방인 청주성까지 가려면 말을 최대속력으로 몰아 내달려도 족히 열흘은 가야 했다. 초원에서 미친 듯이 열흘을 내달리고, 또 뒤에 서호 왕정의 기마병까지 추격자로 따라붙은 이상 그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선우가 타고 있는 말은 초원의 만 마리 말 중에서 고르고 고른 천리마였다. 이에 그는 자신이 분명 범한을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비록 경국의 기마병의 궁술 실력이 대단히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초원 사람들은 온 천하에서 서호 사내들의 기마술에 최고라고 믿고 있었다. 이에 초원에서 멀쩡히 눈에는 보이는데도 쫓지 못할 적이 있다면, 그들은 스스로 알아서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새벽빛이 점점 밝아오면서 천지간 시야도 갈수록 밝아졌다. 변화된 아침 햇살이 초원 동쪽 지평선에서 나와 가을 들판의 모든 걸 비추기 시작했다.

해당타타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걸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걱정과 암담함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초원 위에서 홍수에 불어난 물처럼 서호의 기마병이 포위를 하는 중이었다. 천여 기의 호족 기마병은 질주하면서도 정교한 기마술로 부채꼴 모양의 대형을 완성한 후 한 몸처럼 동쪽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그리고 호족 기마병으로부터 전방 3리 떨어진 곳에서는 수백 필의 검은색 야생마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 줄기, 두 줄기, 만 줄기의 먼지를 일으키며 동쪽으로 그리고 붉은 아침 태양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야생마 무리에서 순간 사람들이 몸을 띄워 말 등에 올라탔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온 이들이며, 또한 어떻게 야생마들보다 앞서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100여 명의 경국 사내들이 수백 필의 야생말 위로 뛰어 올랐다. 그런 후 이민족가 통치하는 초원에서, 그것도 붉은 태양 앞에서 내달리며, 이들 준마들과 함께 활기차고 오만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 * *

서호의 추격병들은 큰 판단 착오를 한 것이었다. 그들은 기마술에 있어 왕정 기마병이 당연히 천하제일이며 그 누구도 자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경국 사람들이 어떻게 야생마 무리를 통제한 건지 파악하지도 못했으면서 야생마가 사납기는 해도 사람 말기를 알아듣고 인내심 많은 전투마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얕보았다.

이에 서호 사람들은 이 광활한 초지에서라면 반나절이 안 되어 동쪽으로 도망가고 있는 경국 사람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선우 속필달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송지 왕녀가 저들을 봐주라고 애원할 것 같아, 그럴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경국인들을 포위한 후에는 범한이라는 경국의 권력자부터 활로 쏘아 죽여야 하는 건 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흘러가는 방향은 서호 왕정 기마병이 판단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반나절이 지나고, 하루가 지났지만, 초원의 자랑스러운 기마병들은 경국인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거리를 좁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원인은 간단했다. 서호 사람들이 본 야생마 무리는 애당초 야생마가 아닌 경국 감찰원이 오랫동안 기른 전투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원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또 말에 통달한 부락민들까지 속인 채 수초 근처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야생마 무리처럼 있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말들에게 약을 먹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감찰원에서 전투마에게 마황 성분을 섞은 약을 먹여 일반 말보다 더 활달하고, 거칠고, 자유롭게 보인 거였다. 더군다나 이 말들은 편자를 달거나 낙인도 찍어 놓지 않았을 뿐더러 갈기도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일단 내달리기 시작하자 정말로······ 자연스럽게 긴 갈기가 찰랑거리며 휘날렸던 거였고, 이에 모두들 이 말들을 야생마 무리라고 착각한 거였다. 그리고 그 덕분에 한밤중에 서호 왕정 기마병의 경계를 뚫고 조용히 범한이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였다.

범한은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말 위에 엎드리고 고개를 숙여 말의 상태를 세심히 살피며 백 여 명에 달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맞았다. 말몰이꾼으로 위장한 십여 명의 정예 외의 다른 사람들은 처음부터 고도의 기마술로 말무리 사이에 숨어 있었다.

마황 성분의 약효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실험 끝에 사람에 비해 말에게 미치는 영향은 약하며, 전투마가 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추격대 입장에서는 감찰원 전투마들이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뛰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효과는 있었다.

다시 말해, 야생마로 위장한 전투마들이 흥분제까지 먹은 거였다. 범한은 흥분제 약효를 오래 지속시키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 입장에서는 약효를 오래 지속시킬 필요도 없었다.

백 명의 사람이 수백 필의 말에 번갈아가며 올라타 전투마에게 휴식을 취하고 약효에서 회복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이런 방법을 쓰고도 선우의 왕정 기마병에게 따라잡혔다면, 범한은 아예 자기 목을 긋고 죽어버렸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결국에는 사람이 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서호 추격병이 일으킨 두 번째 판단 착오였다. 그들은 천지간에 자신들의 기마술을 뛰어 넘는 자는 없으며, 먼 거리를 내달려 급습하는 데에 자신들이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이 잊고 있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흑기였다.

경국의 기마병은 원래가 극강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갑옷과 투구라는 보호구를 벗으면 실력 면에서는 서호 기마병보다 훨씬 뛰어난 건 없었다. 한편 흑기는 경국 기마병에서 정예 중의 정예였다. 진평평이 세심하게 고르고 훈련을 시킨 때문에 병사 개개인의 소질이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높았다.

특히나 서호 사람들이 그리 자랑스럽게 여기는 천리를 달려가 급습하고 장거리 추격하는 면에서, 흑기는 온 천하에서 가장 혁혁한 전투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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