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화 심리전 (1)
월아해 주변은 고요했다. 벙어리 종이 4개월이나 머물렀던 이곳에서 떠났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왕장 주변은 경호가 삼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기운이 짙게 내리깔려 있었다. 특히 선우가 중시하던 중원 사람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청주성, 정주성과 연락을 담당하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들이 머물고 있던 천막에서는 유난히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위무성은 온 몸에 힘이 풀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치아는 계속해서 ‘달그닥’ 소리를 내며 떨고 있었다. 주변에 죽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는 그저 싸늘한 한기만 밀려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서호 왕장에서 회계와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무성은 자기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그러니까 모두 북제에서 온 대단한 이들이 선우를 돕지 않으면, 초원은 일 년 안에 경국과 비등비등한 힘 대결을 할 수 없고, 또 그를 통해 많은 이득을 얻지도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이들은 모두 죽은 반면 자신은 살아 있던 거였다.
위무성은 아까 본 무시무시한 장면이 떠올라 순간 날카롭게 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그 그림자 같은 사신이 유령처럼 그를 제압해 놓고는 천막 안에 남은 사람들을 천천히 그리고 간단하게 도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소리를 낼 수도, 그리고 그 누구도 반격을 할 수도 없었다.
위무성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리고 상대방이 왜 자신은 죽이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다. 대화를 나눈 덕분에 생명을 건지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이득을 얻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는 끝도 없는 공포 속으로 빠져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긴장해 수축한 그의 동공은 더는 광명을 보지 못하고 영원히 지금의 어둠 속에 갇혀 있을 것만 같았다.
* * *
일지도월(一指挑月: 손가락으로 달을 떨어뜨리다) 초식을 펼친 손끝은 가늘고 섬세했으며, 또 너무나도 평범했다. 하지만 천지간의 빛을 담아 찰나의 순간 거친 광풍과 살기를 깨뜨리고는 범한의 울대 앞으로 다가갔다. 이에 범한의 주먹은 허공을 가격했다. 해당타타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초원 위로 흐른 것이다. 그러자 초원에서 폭발음이 울리며 흙이며 풀 잔해가 이리저리 날렸다.
천지의 기세를 빌려 자연스러움을 행하는 것이라 그런지 천일도 문파의 무공보다 강한 무공은 없었다. 달빛이 점점 흐려져 초원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미끄러지듯 한 걸음 옮기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초원의 모든 바람과 풀 잔해를 느끼기라도 한 듯 더할 나위 없이 수려하고 아름답게 그것들을 피해버렸다.
범한은 이 낭자로부터 천일도의 내공 심법을 배운 터였다. 하지만 자연에서 기세를 빌려 오는 정도는 해당타타보다 한참 뒤쳐져 있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왼쪽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작은 칼이 손가락 끝에서 두 번 돈 후 칼집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싸늘한 빛을 번쩍이더니, 범한의 목구멍에서 고작 수 촌[寸] 떨어진 곳에 바짝 서 있던 손끝을 쳐내고 단번에 일지도월 초식을 깨버렸다.
두 사람의 무공 경지라면 손짓이든 다른 동작이든 일단 신체 일부가 상대방의 몸에 닿으면 몸이 교량 역할을 해 정기가 상대방 몸으로 들어가 중상을 입힐 수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과할정도로 담담하게 막으려고만 했다. 그래서 흔적조차 잡을 수 없는 손가락을 담담하게 쳐내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소매에 넣어두던 쇠뇌와 장화 안에 숨겨 두던 검은 비수를 모두 빼 놓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 칼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지?
자그마한 칼은 해당타타의 손가락을 쳐낸 후 이내 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작은 칼의 생김새가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로 해당타타가 범한 아들에게 선물로 준 그 칼이었다.
해당타타의 눈동자가 갈수록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빛 안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츠리지도, 그렇다고 어떤 다른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칼이 없다는 듯 계속해서 범한의 울대 쪽을 향해 나아가기만 할 뿐이었다.
범한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왼손을 살짝 느슨하게 풀어 칼을 잠시 거둬들였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범한도 해당타타가 자신의 울대 쪽을 공격해 오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바닥으로 해당타타의 가슴팍 공격에 나섰다.
정리하자면, 범한이 칼을 거두고 공격에 나서자 해당이 손가락을 거두었고, 이어 범한이 손바닥을 내리자 해당타타가 자기 몸을 방어하는데 나선 것이었다.
단순한 네 차례의 동작이 일사천리로 연달이 일어난 거였고, 둘 다 공격하는 걸 깔끔하게 포기를 해버린 거였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런 기묘한 광경은 대개 젊은 남녀가 대치할 때나 볼 수 있는 거 아닐까?
한데 결국 범한은 마지막에 선수를 쳐버렸다. 손바닥으로 해당타타의 가슴팍에 도장을 찍으려 한 것이었다.
해당타타의 눈이 갈수록 더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거둬들였음에도 범한의 손바닥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이나 가볍게 펼쳤다. 그리고 바람 따라 흩날리는 초원의 가을 풀처럼 범한의 오른팔에 찰싹 달라붙어 꽉 붙들어 버렸다.
이는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범한과 해당타타 둘 다 상대방에게 찾아 온 절호의 기회를 한 차례 씩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기회는 상대방이 일부러 흘린 것인지라 두 사람 모두 다시 공격을 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전 상황을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거였다.
북해 근처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범한은 춘약과 시(詩)로 해당타타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해당타타는 모두 담담하게 응했고, 그 후 북제와 경국의 두 젊은 인물은 지금까지도 심리전을 계속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 방금 전 사용한 건 손이었지만, 실제로 사용한 건 마음이었다.
즉, 해다타타는 범한이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치지 못하고 칼을 버릴 것이라 도박을 한 것이다. 범한은 해당타타가 자신의 울대를 찌르지 못하고 손가락을 거둬들일 것이라 도박을 한 것이고.
해당타타는 범한이 자신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치지 못할 거라 생각해 범한의 오른 팔이나 붙잡는 도박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뭘 하든 제대로 치지도 못할 텐데, 두 사람은 무엇 하러 공격을 한 걸까?
범한은 괴이한 웃음을 지은 채로 앞에 있는 해당타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이번 공격에서 결국에는 헛수고로 끝날 거란 걸 알고 있음에도 그는 계속해서 공격을 했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손가락을 멈춘 해당타타가 천일도의 순수한 정기를 내뿜으며 범한의 오른팔에서 패도의 정기가 앞으로 돌격해 오는 걸 막았다. 그리고 이로써 그녀의 가슴팍으로 들어오는 손바닥 공격을 잠시 무력화 시켰다.
그래도 범한은 계속 공격을 했다. 정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그리고 그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아 보이게 해당타타의 옷 주변을 계속 건드렸다.
범한의 손바닥은 너무나도 미묘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곳만 건드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 공격은 정신을 쏙 빼놓기 위해 한 작전이었다.
해당타타는 분노했고 살짝 심란해졌다.
칼을 버린 범한의 왼손이 상대방의 심장 쪽을 살짝 어지럽히던 찰나였다. 그의 손이 대뜸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해당타타의 귓가였다. 새끼손가락을 살짝 튕겨 금침을 귀밑 혈도에 찔러 넣은 것이다.
범한은 해당타타를 중원으로 붙잡아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고하가 설치해 놓은 국면에서 이 불쌍한 아가씨가 더 이상 마음고생을 하지 않도록 잘 정리할 생각이었다. 이에 고심 끝에 범한은 상대방을 붙잡아 가려는 모험도 불사한 것이다.
바로 이 금침으로 말이다.
* * *
일대 하늘의 자손이자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가 드디어 패한 순간이었다. 이 평온한 초원에서 범한에게 패하고 만 것이다.
경력 4년, 해당타타는 하산 후 크고 작은 전투를 수십 번을 치르며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이에 명성이 드높아졌고 순식간에 최고의 무공 실력자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건 경국에서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젊은 고수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범한이 등장한 후 세상 사람들은 ‘해당타타와 범한이 대결한다면 대체 누가 이길까?’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북해 근처에서 해당타타는 처음으로 범한과 만났다. 그때의 범한은 절대 해당타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오죽으로부터 배운 몸놀림을 가지고 가까스로 공격을 피하고, 독침이나 독 연기를 사용하며 초원위에서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범한은 패하지는 않았다.
범한은 자신의 후안무치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해당타타를 성공적으로 압박했고, 기억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해에서 색정이 가득 차도록 만들었다.
그날 이후, 해당타타와 범한은 제대로 겨룬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다시피, 단순한 실력 가르기로는 범한은 해당타타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또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이 발생해 범한이 악랄한 수단을 동원한다면, 아무리 해당타타가 범한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 할지라도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고, 이 사실은 천하에 염문설로 떠돌게 돼 모두들 두 사람이 싸울 리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는 두 사람을 싸움을 보지 못하게 되어 실망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때 실망한 이들이 오늘 초원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된다면 기뻐할 게 분명했다.
‘해당타타가 결국에는 작은 범 대인에게 패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범한이 더 갈고닦아 향상된 후안무치하고 음험한 방법으로 인해 패하고 만 것이다.
금침이 해당타타의 매끄러운 귀밑에서 계속해서 파르르 떨었다. 범한이 손가락으로 금침을 조심스레 집고는 대단히 엄숙한 낯빛으로 이 가느다란 침을 통해 해당타타의 경맥에 자신의 정기를 주입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해당타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오른손으로는 여인의 몸에 있는 혈 자리를 재빨리 찍었다. 그녀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범한은 강남에서 천일도 정기로 체내 상처를 치료한 후, 천일도 정기의 회복력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금침을 혈 자리에 찔러 넣은 건 해당타타의 몸을 잠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 뿐이었다.
물론 이 정도로는 해당타타를 다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자신의 패도의 정기를 이용해 해당타타의 체내 경맥 관문들을 강제적으로 봉인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데······ 범한은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재빨리 움직이던 손가락의 속도를 점점 늦추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한껏 엄숙했고, 심지어는 비상한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범한이 드디어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왼손을 천천히 금침에서 뗐다.
그러자 ‘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해당타타 귀밑에 있는 금침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귀 밑 중요 혈 자리에 꽂힌 정말 가느다란 침인데 해당타타가 체내 정기로 산산조각을 내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강력한 반발력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