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화 사흘 (2)
범한과 해당타타는 밭을 갈고, 술을 마시고, 잡담을 하다가 20년 어치 천하 대계를 세웠었다. 그때 상경성에서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또 밭에서는 덩굴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북제와 경국의 걸출한 두 젊은이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유치하고 또 유난히 아름다운 목표를 함께 세웠다는 건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전쟁 없는 천하를 만들자는 목표 말이다.
이 유치한 협의는 두 사람의 참여로 곧 이루어질 것만 같았고, 또 언제든 현실화 될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이 두 젊은이는 각자의 나라에서 대단히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반적인 추세가 변하지 않고, 나이든 이들이 점점 퇴장하면, 훗날 강산은 이 두 젊은이의 손바닥 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서였다.
그런데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천하대세는 대동산 사건의 발발로 극적인 변화가 인 터였다. 세계가 변했으니 사람도 변하고, 결국 약속한 그 20년은 요원해지게 된 거였다. 그리고 범한과 해당타타도 더는 함께 밭 갈고, 술 마시고, 한담을 나눌 수 없게 된 거였다.
“내가 싫어요.”
범한의 낯빛은 하얗게 질렸지만, 눈빛만큼은 갈수록 빛나고 있었다.
“담주를 떠난 지 이미 5년이에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당신만······ 당신만이 내가 이 협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손해를 보고, 당신네 북제를 얼마나 많이 도왔는지 알고 있어요.”
범한이 해당타타의 눈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천 년 후에 매국노라고 비난 받을 걸 무릅쓰면서까지 이런 일을 했는지, 당신은 똑똑히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데도 타타는 소리 소문 없이 도망가 버렸어요. 그래 놓고는 여기 이 초원으로 와서 내 뒤에 칼을 찌를 준비나 했고요.”
범한의 눈동자가 점점 싸늘해져 갔다.
“나는 싫어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느릿느릿 내뱉은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장이 칼에 콕콕 찔리는 기분이었다. 통증마저 생생하게 올라와 어느새 해당타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일에······ 당신이 연루될 줄은 생각 못했어요.”
해당타타가 놀란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있는 남자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고스란히 느끼는 듯 했다.
“그 칼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 일을 알게 된 후 청주성에 한 차례 갔었는데, 한 자루를 누군가가 가져갔다는 것만 알뿐이라고요.”
청주성까지 잠입해 증거를 없애버린 것 같다는 9등급 고수가 해당타타 라는 걸 범한은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다.
그녀가 자기 입으로 직접 시인하자 범한은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래도 그의 낯빛은 여전히 대단히 힘든 기색이었다.
“아직도 나를 속이다니······ 그 칼들이 나타난 것 자체가 너무 이상한 일이잖아요!”
범한이 해당타타의 옷깃을 틀어쥐며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당신과 북제의 젊은 황제는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연락을 끊은 적 없는데······. 이번 일로 그분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게 드러났어요. 그런데도 그분 대신 계속 눈속임을 해줄 생각인 건가요?”
해당타타가 자신의 손을 범한의 손 위에 살포시 올리고는 안타깝고 미안한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에요. 상경성에서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나는 몰랐어요. 황제 폐하께서 왜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하셨을까요.”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경국 내 북제의 최대 조력자는 범한이었다. 그런데 대동산 사건 후, 범한은 자신을 북제와의 관계에서 갈라놓기 시작했으니, 북제 황제가 정말로 장래를 생각한다면, 범한의 도움 없이는 분명 곤란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북제 젊은 황제의 생각에 대해 범한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해당타타에게 다가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혀 바보 같지 않아요. 그분은 내가 반기를 들도록 압박하고 있는 거겠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을 걸요······. 2년 전 경도에서 그분은 장 공주의 손을 빌려 나를 죽이고, 내 큰형님을 보위에 올리려 했어요. 그런데 나는 아직 그 빚은 받아내지 않았다고요······ 그러니 내가 어찌 반기를 들겠어요?”
범한의 말에 살짝 조롱이 섞여 있자 해당타타는 마음이 싸해졌다. 그녀는 2년 전 경도에서 변이 일었을 때 북제의 그림자가 섞여 있었다는 걸 지금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범한의 말을 토대로 생각을 해보니, 일의 전체적인 맥락이 더 명확해지는 건 있었다.
북제 황제는 범한이 원한은 꼭 갚고야 마는 성미란 걸 잘 알고 있던 터라 감히 자기 곁에 두기를 바라지 않았다. 더군다나 북제 황제와 범한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해 주던 해당타타는 2년 동안 초원에만 있었으니, 둘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북제의 안전을 생각해 북제 황제는 범한과 경국 황제 간의 관계를 들쑤셔 놓을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 거예요.”
이 순간 해당타타와 범한은 서로 애매한 자세로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너무 놀라운 일을 두고 이야기를 하고 있던 터라 해당타타는 천천히 하던 말이나 이었다.
“요 2년 동안 당신은 경국 황제를 도와 나라를 관리하고, 민생을 돌보고, 황실 금고 문제를 처리했어요. 더군다나 큰 전쟁까지 일촉즉발로 임박했으니, 그분이 어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분이 나를 믿든 말든 상관없어요. 더군다나 지금은 당신의 신뢰도 필요 없어요.”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자 살짝 차가운 해당타타의 뺨에 범한이 자신의 뺨을 문지르는 게 되고 말았다.
범한이 숨을 깊이 들이 마시며 말을 이었다.
“북제 젊은 황제께 내 말 좀 전해 줘요. 나 범한은 그분이 내게 준 두 건의 대례(大禮) 때문에라도 그분께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돌려드릴 거라고 말이에요.”
해당타타가 몸을 부르르 떨며 놀란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이 세상에서 일국의 군주에게 감히 교훈을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대종사를 빼면 대략 범한 같은 오만한자뿐일 것이다.
“당신이 경국 사람이고, 경국 황제의 아들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줘요.”
해당타타가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북제나 동이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한다면, 대체 누가 믿겠어요?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불신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요.”
“나는 경국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경국의 백성이 끝없는 전쟁의 화마 속에 빠지는 것도 원치 않는 거고요.”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생각하던 범한이 물었다.
“당신이 초원에 뭘 준비해놨는지는 내게 말해주지 않겠지요?”
해당타타의 양손이 자연스레 범한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막을 거예요.”
“나의 황제 아버지를 빼면, 지금 이 세상에 나를 막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어요. 그러니 당신은 그렇게 못해요.”
범한이 해당타타의 모자를 벗기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범한은 해당타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의 눈빛은 점점 차분해 지고 있었다. 범한은 해당타타를 품에 않은 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매 한 마리가 노을이 펼쳐진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호수 위의 물오리들은 그 참매가 무서웠는지 다시 수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실 해당타타도 참매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범한이 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속으로 탄식했다. 자신과 황제 폐하가 지금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이 젊은이에게 못할 짓을 해서였다.
하여 그녀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감정들로 너무나도 복잡했고, 이에 범한이 무엇 때문에 심사가 뒤틀린 건지에 대해서도 콕 집어 지적하지 않았다.
“나랑 사흘만 같이 있어요.”
범한이 해당타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 * *
호수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초원에 수백에 달하는 서호 기마병이 그들의 왕을 호위하고 있었다. 초원의 주인인 선우 속필달이 싸늘한 시선으로 전방 먼 곳을 바라보며 참매가 공중에서 지나간 흔적을 쫓았다.
송지선령이 떠나자 선우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이에 그는 직접 기마병을 이끌고 뒤를 쫓았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선우는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이 떠난 것만 같다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그 여인은 외모가 그다지 아름다운 편도 아니어서, 각 부락에서 바친 미녀들과는 비교 자체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선우는 그녀를 그 어떤 사람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만 명이 넘는 정예 기마병을 데리고 와 자신에게 충성했고,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치국의 방침을 알려주고, 초원에 새로운 기상을 불어 넣어주어서였다.
한데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여인과 함께 있으면 선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했다.
카르나의 왕녀와 함께 할 때마다 선우 속필달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냥 마주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데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도 송지선령이 북제 성녀이고, 고하 대종사의 마지막 제자여서 하늘에서 자라 인간 세상을 거니는 신비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송지선령이 자신과 같은 호족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훗날 천하를 휩쓸며 초원을 공격할 때 자신의 준마 옆에 그녀가 옆에 앉아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참매가 점점 하강하자 선우 속필달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서는 위협적인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낭자는 어떤 남자를 쫓아간 거였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참매는 선우에게 보고란 걸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역겨울 정도로 선우의 보물을 욕보이고 있는데도, 선우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런 거였다. 범한이 일부러 도발을 했지만, 기대한 효과는 보지는 못한 것이었다.
“전력질주해서 저놈을 죽여라!”
대당호가 한껏 음울한 선우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소리쳤다.
“저놈을 죽여라!”
속필달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송지선령이 떠나갈 때 분명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녀는 분명 돌아올 터였다.
속필달은 신분이 예사롭지 않은 그 여인을 존중했다. 이에 칼과 무기로 거리낌 없이 자신의 강대함을 보여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 여인의 마음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저들을 쫓기만 하고 방해하지는 말거라.”
속필달이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 선우 주변에는 왕정 고수들이 많이 따라와 있었다. 하여 지금 이 수백의 기마병이 돌진한다면, 범한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 드넓은 초원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터였다.
물론 선우는 송지선령의 마음을 동요시킨 자가 대체 누구인지 너무 궁금하기는 했다.
‘설마 몇 년 전 소문으로만 듣던 경국의 얼굴 허옇다는 놈인가?’
초원의 주인은 쥐고 있던 채찍을 더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천하의 주인이 되겠노라 마음먹은 사람이었으므로 경국에서 온 권력자 하나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질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초원까지 들어온 그 젊은이를 살려 보낼 생각은 없었다.
참매가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그러자 송지선령과 그 젊은이가 헤어지는 순간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왕정 부근에 있던 서호 기마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려 사흘이나 두 사람의 뒤를 쫓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