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화 사흘 (1)
범한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초원에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완벽하게 계산해 놓은 상태였다. 더군다나 고하가 남겨 놓은 음모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대응 방법을 마련해 놓은 터였다. 심지어 적당한 때에 해당타타의 신분을 폭로하는 것도 그가 세운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거였다. 해당타타가 선우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암암리에 초원에 왕정을 건설하도록 도울 수 있었던 게 그녀의 가짜 신분 때문이 아닌, 그녀가 원래······ 왕녀이기 때문이었다니!
해당타타는 양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얼굴을 살포시 무릎에 기댔다. 그리고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조금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눈동자로 조심스레 말했다.
“과연 안지는 나보다 침착하군요. 2년 전 사부님께서 내 진짜 신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을 때, 나는 당신보다 훨씬 격하게 반응했었거든요.”
범한은 해당타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야 인간 세상의 도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게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생의 인연과 모든 일들, 해당타타의 신분, 이 모든 게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생각해 보면 수십 년 전에 우연히 고하 대사의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난 일에 불과했다.
단지 그때의 생각이 훗날 자기 앞으로 날아와, 그것도 눈앞에 펼쳐진 이 초원위에 떨어진 것뿐이었다.
북방 부락의 백성에게 해당타타가 어떻게 왕녀의 신분이란 믿음을 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그녀가 2년 전에 그 일들을 어떻게 해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 없었다.
고하 대사가 임종 전에 이러한 변수를 던져 놓았다는 건, 당연히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고하가 자기 형을 속이고 카르나 왕정의 혈통 하나를 남겨 둔 것이니, 어찌 증표도 남겨두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관건은······.
“당신의 부모님은······?”
범한이 좀처럼 멍한 모습을 볼 수 없는 해당타타의 얼굴을 응시한 채 주저하며 물었다.
해당은 양 무릎을 끌어안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남자의 배려는 느끼고 있었다. 범한은 초원에서의 일에 대해 물은 것도, 그렇다고 그녀를 추궁한 것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그녀가 가장 관심 갖고 있는 일부터 물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데요.”
모자 아래로 보이는 낭자의 얼굴에 적막감이 감도는 것 같았다.
범한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않았다. 해당타타의 부모님은, 그러니까 카르나의 마지막 왕족이 어찌 이 세상을 떠났는지, 그리고 고하가 몰래 암살을 했는지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분명 무언가를 추측하고 있기는 할 것이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자신의 스승님을 그런 역할과 연계시킬 의사가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사부님께서 임종 때 해주신 이야기에요. 내게 어찌 할지 선택하라면서 말이죠.”
호수 위의 물오리를 바라보고 있던 해당은 점점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물오리들이 노을 속에서 더는 물장난을 치지 않고 두려운 듯 호수 가장자리에 성글게 솟아난 수초 사이로 몸을 숨겼다.
“당신의 선택은 그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거였군요. 부락으로 돌아간 후 이곳 초원으로 오는.”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송지는 카르나족 왕족의 성씨였다. 단지 카르나족 부락이 이미 수십 년도 전에 전청풍 총독에 의해 깔끔하게 멸족을 당해, 천하 사람들이 송지선령 이란 이름과 호족과의 관련성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범한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해당타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부족을 대신해 복수할 생각이라면, 마땅히 북제에게 복수를 해야겠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우리 경국을 겨눈 건가요?”
“복수요? 그건 십여 년 전 내가 무지 어렸을 때 일인걸요 뭐.”
해당타타가 모자 가장자리로 빼져 나온 머리카락을 매만지고는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후 자그마한 소리로 계속 말했다.
“당신과 마찬가지에요. 우리 둘 다 복수란 게 아무리 씻어도 깨끗이 씻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냥 가본 거였어요. 나와 같은 뿌리의 사람들이 대체 어찌 생활하는지 보러······. 안지, 호족(胡族)도 사람이에요. 그들 역시 생존할 권리가 있다고요. 남쪽으로 만 리 길을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몰라요. 부락에 있는 여자와 아이들은 설마 계속 살아나가면 안 되는 건가요? 북제는······.”
해당타타가 고개를 숙이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스승님께서는 나에게 내 진짜 신분을 알려주셨음에도 천일도를 물려주셨어요. 나는 여전히 북제의 성녀라고요. 이런 내가 북제에 화를 입힐 생각이었다면, 무엇 하러 이곳 초원까지 왔겠어요? 나는 이곳에 있는 부락민들이 안정적인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해당타타가 범한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속필달을 도와 초원을 통일하고 싶어요. 이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알력 싸움과 배척을 마무리 짓고, 이 초원에 평화가 찾아오도록 하고 싶어요.”
“평화요?”
범한의 음성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초원의 통일과 평화는 훗날 우리 경국과의 전면전을 초래할 거예요. 그게 당신이 바라는 평화인가요?”
“내가 속필달을 제어할 수 있어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유치하군요.”
범한이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때 그의 말투는 정주성에서 이홍성이 그를 비웃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군왕의 야심은 당신과 내 힘으로는 영원히 제어할 수 없는 거라고요.”
“그러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에요? 설마 눈만 멀뚱멀뚱 뜬 채 경국이 날마다 서쪽으로 침략해 오는 걸 보고만 있으란 건가요? 결국에는 경국이 온 초원을 점령하고 호족 사람들을 몽땅 죽도록 내버려두라고요?”
해당타타의 미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모두 생존할 권리가 있어요. 설마 서호 사람과 중원 사람의 목숨 사이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귀천이야 당연히 존재하죠. 나와 친한 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한 법이라고요.”
범한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호족이 어찌 생존해야 하는지만 생각하고 있어요. 경국 서량로에서 밭을 지키는 군인과 백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 있어요? 서쪽으로 오는 동안 불에 타버린 가옥과 살해당한 부녀자와 아동을 수도 없이 많이 봤다고요. 이런 게 당신이 바라는 평화라면, 나는 그 모든 걸 망쳐놓을 거예요.”
범한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해당타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건 천년 묶은 원한이에요. 우리 대에서는 없앨 도리가 없는······. 당신은 초원 왕정의 입장에 서 있으니 자연스레 경국이 물러나기를 바라겠지요. 하나 나는 경국 입장에 서 있으니 자연스레 초원이 계속 혼란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해당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초원에 온 지도 이미 십여 일이 지났어요. 분명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조사를 마쳤겠지요. 그렇다면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죠?”
“당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범한의 낯빛은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어쩌면 당신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타타는 줄곧 자신을 북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이 카르나의 왕녀라는 생각은 전혀 않는다고요. 초원에서 생존할 공간을 찾는다는 미명 하에 당신은 사실······ 북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러 온 거라고요. 북제를 대신해 우리 황제 아버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려 온 거란 말이라고요.”
해당타타가 대꾸도 하기 전인데 범한은 대뜸 눈썹을 들었다 놓으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그건 무의식으로 나온 행동이겠지요······. 이리 말하고 나니, 고하에게 절로 탄복하게 되는군요.”
범한이 애석한 듯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성녀에요. 천일도에서는 고하 이후 가장 출중한 인물이고요. 하지만 당신의 일생은 나처럼 저 높은 데 계신 누군가에게 통제당하고 있어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그 누군가의 계산에 따른 게 되죠. 그게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어찌되었든 고하는 당신을 이용해 북제 왕조를 보호하고 있는 거라고요.”
고하는 해당타타를 근 20년 동안 키워 자신의 제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해당에게 그녀의 신분을 알려준 건 이미 명확히 계산된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해당이 자신을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건 모두 고하의 포석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었고, 경국에게 통렬한 일격을 날리는 거였다.
해당의 낯빛이 갈수록 쓸쓸하게 변했다. 그녀는 2년 동안 초원에서 지내며 선우 속필달을 돕느라 정말 많은 정신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그러다 오늘 호숫가에서 그동안 자신이 꽁꽁 감춰두고 또 회피하고 있던 마음을 범한이 까발려 버리자 그제야 뭔가를 알게 된 것만 같아······.
“우리는 성인(聖人)이 아니에요. 그러니 절대 천하 백성을 평등한 위치에 놓고 볼 수 없어요. 만약 이런 나를 두고 음험하다고 말한다면, 사실은 당신 경우는 이기적인 거예요.”
범한이 살짝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서호 백성 생명을 가지고 경국 정예 기마병의 행동을 늦추려 하고 있어요. 한데 이건 북제에게 유리한 행동이지요. 하지만 초원에 있는 백성에게 강대한 왕정이 필요한 건지, 또 동진하며 군사를 보내야 하는 건지······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고하는 정말 대단하네요!”
범한이 두 눈을 감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가 결국에는 우리 황제 폐하의 손에 패해 이미 죽은 사람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경국에 큰 골칫거리를 선사했으니······. 전씨 가문의 두 형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고수인 것만은 확실한 거 같아요.”
경국 황제는 평생 남과 북을 정벌하며 딱 한 번 패한 적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일한 완패이기도 했다. 바로 과거 북위 왕조의 총독 전청풍에게 진 것이었다.
한데 전청풍이 죽은 지 십 수 년 후에 뜻밖에 고하가 임종 직전에 경국 서쪽에 지뢰를 묻어 놓은 거였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거 알고 있잖아요.”
해당타타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범한 옆에 가만히 서서 하려던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단지 선택 가능한 여러 것들 중에서 초원에 관한 걸 고른 것뿐이에요. 그리고 그게 우연히 북제 입장에서는 제일 좋은 방법이 된 거예요.”
범한은 해당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일부러 상대를 격노하게 만들려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범한의 눈에서 점점 싸늘함이 차올랐다.
“그렇다면 나는요?”
해당타타가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대꾸했다.
“당신은 좀 전에 우리가 성인(聖人)이 아니기 때문에 천하 백성을 평등한 위치에 놓고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네 경국의 검이 천하를 겨누고 있어서 북제와 동이도 모두 그 비바람에 출렁이는 중인데······. 당신이 바라는 게 내가 경국 입장까지 생각해서 행동하기를 바라는 거라면, 그건 좀 황당한 거 아닐까요?”
“황당하다고요?”
범한이 해당타타의 진짜 속마음을 보려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주시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몇 년 전 상경성 술집에서 나는 경국 감찰원 제사 신분으로 당신과 협의를 맺었어요. 그런데 황당하다고요?”
범한이 자조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맞아요. 나는 경국의 권력을 쥔 귀족이에요. 하나 아예 얼굴을 당당히 든 채로 당신에게 뺨이나 한 대 맞아볼까 하는데요. 우리 대경국의 정예 기마병이 천하를 공격하려는 마당에 내가 타국의 성녀와 협의 따위나 맺으려 했다니······. 평화요? 그 개 같은 평화란 거, 확실히 황당하긴 하네요. 뭐, 나란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조차 원래 황당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