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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04화 (804/1,108)

804화 왕장에서 걸어 나온 젊은이 (2)

범한이 고삐를 잡고 있는 엄지의 위치를 살짝 이동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자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네. 아주 중요한 부분이거든. 만약 상대방이 내가 추측하고 있는 자라면, 반드시 수단을 바꿔야 하지. 그러니 정주성 안을 일망타진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아.”

범한은 송지선령이란 이름을 지금껏 들어본 적 없었다. 또 호족 언어로 송지선령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 이름의 주인공이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추단일뿐더러 좀 아득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범한도 딱히 상세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범한은 갈수록 자신의 판단이 맞으리라 확신했고, 그에 따라 분노도 강해졌다.

저 멀리에서 새하얀 새 몇 마리가 무릎 높이까지 자란 풀 위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범한이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들판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사막이 언뜻 보였다.

‘사막에서 더 나아가면 대체 뭐가 있을까?’

“황량한 사막 동쪽이 바로 북해입니다.”

대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자 목풍아가 그의 뜻을 알아채고는 자그마한 소리로 일러주고는 말을 이었다.

“거친 북해 너머에는 북제가 있지요.”

“북해에 가 본 적 있지.”

범한이 사막 너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북해에서 본 갈대가 눈에 선한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저 황량한 사막은 천 리나 이어져 있지. 하여 듣자하니 저길 살아서 통과할 사람은 없다더군. 또 북해가 아름답기는 해도 해안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어서 횡단하려면 어려울 걸세. 그래서 줄곧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북제에서 서호까지 대체 어떻게 올 수 있을까?”

“우선 남쪽으로 가서 국경으로 들어온 후 다시 경도 서북쪽에서 곧바로 정주로 빠져야 합니다. 그런 후 다시 청주까지 와서 초원으로 들어와야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 올 수 있습니다.”

목풍아가 경도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게 분명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편이 편하니까요. 그 방법이 북해를 힘겹게 건너고 사막을 뚫고 오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호 왕장과 두 현왕은 절대 경국에서 온 중원 사람을 믿지 않을 것이야.”

범한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열정적으로 신용을 얻으려는 게 보이기는 해. 하지만 서쪽 초원의 이민족들은 실제로는 의심이 많으니 신용을 얻는 건 정말이지 대단히 어려운 일이네. 그래서 그들이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무척 궁금하단 말이지.”

이후 십여 일 동안 상인들은 초원 먼 곳을 향해 나아갔다. 사방에는 가을 풀들이 빚어낸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고 가끔 유목민들과 그들이 방목한 소떼와 양떼 수백 마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리고 일렁이는 초원의 풀 위로 가끔 흰 구름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평안하고 아름다운 한때가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서호와 경국의 교전 지대를 벗어나서 그런지 일행은 멀리 갈수록 점점 국경 밖 별천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가는 도중에 두 개의 큰 부락이 나와 경국의 상인들은 이곳에서 많은 물건을 팔았다. 그러자 한결 가뿐해진 상인들은 그만큼 더 빨리 움직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물건을 다 판 상인은 없던 터라 이들은 가려던 길을 계속 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가장 값나가는 물건은 무게가 가벼웠고, 더군다나 더 큰돈을 벌려면 서호 왕장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는 내내 범한은 상인을 대하는 이민족들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폈다. 모두 나중에 있을 중요한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범한은 살짝 자조적인 느낌을 들게 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중원 상인들을 바라보는 이민족들의 눈빛은 우호적이지 않을뿐더러 심지어는 뼈에 사무친 원한까지 담고 있었다.

천 년 동안 피로 쌓은 원한이니 애당초 보석이니 차(茶)니 하는 것으로는 씻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부락을 이끌고 있는 제사장이나 귀족들은 중원 상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우호적이었다.

목풍아가 조심스레 물어본 내용과 상인들이 말해준 걸 종합해 보면, 이들의 태도가 변한 건 대략 1년 전부터라고 했다.

서호 왕장이 드디어 상업적 교류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니 각 부족에게 초원으로 들어온 상인들을 괴롭히지 말라며 엄명을 내린 것일 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위험 지대에서는 종족의 정예병까지 파견해 이들 상인들을 보호하고 길을 인도한 것일 터다.

1년 전 궁핍함을 견디지 못한 작은 부락에서 중원 상인들을 습격해 많은 화물을 강탈한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왕장에서 크게 노했고 직접 병사들을 파병해 약탈자 소탕에 나섰다. 결국 그 작은 부락에서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으니, 이건 도륙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다.

이런 피로 얼룩진 선례가 있어서인지 초원에 있는 사람들은 왕장에서의 결심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이는 중원 상인들의 안전이 근본적으로 확보된 것이기도 했다.

그 후 초원에서 일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원 상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위협은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온 계획이라 범한은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상인들은 일부 사치품만 팔고 있었다.

하지만 초원에서 상업이 활성화되고 왕래하는 길이 안정적으로 뚫려 있기만 하다면, 경국뿐만 아니라 동이와 북제 상인들도 이익을 쫓아 몰래 경국의 법령을 어기고 초원으로 생필품과 군수 물자를 판매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고 국경 지대의 경계가 느슨해지면 서쪽 이민족들의 힘은 날이 갈수록 강대해지게 되는 것이다.

* * *

범한 일행이 드디어 왕장에 도착했다. 우뚝 솟은 고산(孤山) 아래로 월아해(月牙海)가, 월아해 옆에는 작은 사막과 풀이 파릇파릇하게 난 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범한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경치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왕장이 있는 곳은 과연 비범한 곳이었고, 세상 그 무엇과 비교해도 완전히 다른 구도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특히나 푸른 초원이라니. 범한은 너무 신기해 ‘지금은 가을인데, 왜 풀이 아직도 파릇파릇 한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산 옆으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에는 무수히 많은 소와 양이 흩어져 있었다.

호족 소녀들은 월아해 가장자리에서 옹기그릇을 씻으며 중원에서 온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정함으로 가득한 곳이었고, 하늘도 다른 데서 본 것보다 조금 낮아 들판과 맞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가을바람이 살랑 불어와 풀들이 저마다 바닥으로 누웠지만, 그래도 참으로 상쾌한 바람이었다.

범한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뒤따라오고 있는 평범한 감찰원 관원을 잠시 바라보며 생긋 웃어 주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아름다운 절경이다 보니, 범한은 어느새 고개까지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호족 소년이 힘들게 이곳까지 찾아 온 중원 상인들을 데리고 월아해 가에 마련된 천막으로 인도했다. 잠시 쉬라는 의미였다. 이어 소년은 잠시 후 대왕께서 귀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친히 연회를 여실 거라는 설명도 친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이번 상인 행렬은 가을에 찾아온 상인들 중 제일 큰 무리에 속한 터였다. 이에 왕장에서도 접대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서호 사람이 너무 우호적이어서 그런지 범한은 뭔가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송지선령이 정말로 왕장에 이리도 많은 영향을 미친 걸까?’

살짝 허기를 채운 범한이 배를 문지르며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월아해 부근의 초원으로 걸어 와 실눈을 뜨고 주변 경관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의 신분은 상인이었다. 하여 왕장 근처를 몰래 염탐하는 것만 아니면 서호는 중원 상인들이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니는 걸 막지 않았다. 더군다나 초원에서는 자신을 아는 이도 없었으니, 범한은 자신의 안전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던 터라 마음이 홀가분했다.

“하늘은 푸르고, 땅은 드넓고······.”

딱 요만큼 말했을 뿐인데 옆에서 누군가가 “좋다!”라고 말하며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웬 젊은이가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다급히 좋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고작 하늘과 땅 얘기만 꺼냈을 뿐인데, 뭐가 좋단 말이오?”

범한이 중원 사람처럼 보이는 젊은이를 향해 미소 지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왕장의 천막을 무의식적으로 쓱 훑었다. 초원에는 이 젊은이 말고 다른 이는 없었다. 바로 왕장에서 걸어 나온 젊은이 말이다.

범한이 젊은이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웃음으로 감춘 속마음을 이 젊은이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범한은 풀숲에 서 있은 지 꽤 되었다.

이 젊은이가 왕장에서 걸어 나오고 점점 자기 쪽으로 다가올 때를 기다렸다가 이 말을 내뱉은 거였다.

범한은 이 젊은이에게 적당히 얼버무릴 기회를 주려 했다. 왕장에서 걸어 나온 젊은이가 분명 중원 상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를 이어 가는 건 범한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과거 북제 성녀인 해당타타도 결국에는 그의 말재간에 패했다. 그러니 이런 젊은이 정도는 범한에게는 별 것 아니었다.

“당연히 좋지요.”

젊은이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말에 이곳 초원의 기세를 모두 담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는 핑계였다. 초원에서의 삶이 적적했던 그에게 대화를 나누고 향수병을 달래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러니 그는 상대방의 발을 붙잡아 둘 핑계를 댄 것뿐이었다.

이에 일 년 내내 감찰원의 특무를 수행 중이던 범한은 신속하게 결단을 내렸다.

젊은이는 외모만 보면 서호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장에서 나왔으니, 범한은 분명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과 관련이 있을 거란 생각에 작업에 들어갔다.

“상인 행렬에서 그쪽은 본 적 없는 것 같소만.”

범한이 놀란 척하며 그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중원 사람이오?”

“지난번에 왔지요. 물건 일부를 다 못 판 것도 있고 해서요. 대왕께서 우리를 잘 대접해 주시기에 나는 이곳에 남았어요. 뭔가 득 될 게 있나 좀 볼 요량도 있었거든요.”

범한이 듣기에도 뭔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이는 거짓말에 능숙한 이가 아니었다.

“나는 이번이 처음이외다.”

범한이 껄껄 웃으며 앞에 있는 월아해와 초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초원의 풍광이 이리 매혹적인 줄 이제야 알았지 뭡니까!”

“하나 계속 보다 보면 질릴 겁니다.”

젊은이가 씁쓸하게 받아쳤다.

“그런가요? 오늘 막 도착했으니, 아직은 질릴 새가 없군요.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범한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모두들 서쪽 이민족는 야만인이라 하더군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저들이 갑자기 미쳐 날뛸까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변장한 범한의 모습은 맑고 진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말투와 행동마저도 진심이 담긴 것처럼 하니 쉬의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살 수 있었다. 이에 범한과 젊은이의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져 나갔다.

이 젊은이의 성은 위(魏), 이름은 무성(無成)이었는데 가명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초원으로 들어온 상인 중 하나였는데 강제로 초원에 남게 되었고 이곳에서 지낸 지 3개월이 넘었다고 했다.

하지만 범한은 속으로 꼼꼼히 따져보고 있던 터라 당연히 이 자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 자가 상인이라면, 어찌 그리 쉽게 왕장을 들락거릴 수 있을까? 젊은이는 향수병을 가지고 일단 자신의 음흉한 속을 간절한 척 포장해 놓고는 마음 편히 말을 해나갔다.

그는 서쪽 이민족의 가죽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많이 닳아 있었다. 그러니 이것만 봐도 그가 초원에 있은 지 오래 되었다는 걸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편 대화를 통해 범한은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예를 들어, 월아해 왕장에 머물고 있는 중원인은 이 젊은이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며, 장기간 머물고 있는 이가 적어도 십여 명은 되었다. 또 예를 들어 왕장에서는 최근 2년 동안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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