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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803화 (803/1,108)

803화 왕장에서 걸어 나온 젊은이 (1)

이틀 후 범한 일행은 청주를 떠날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초원 깊숙이까지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마차를 타고 가는 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화물만 마차로 운반하고 나머지 행상들은 말을 탔다.

그리고 관문 밖으로 나가기 전 이틀 동안 목풍아는 상인들과 관계를 잘 맺어두는 것은 물론 함께 열심히 나아가자고 격려의 말까지 해두었다.

이날 새벽, 거대한 무리의 상인이 차례대로 성문을 나갈 때였다. 때마침 다시 토끼 사냥에 나갔던 청주 기마병이 성으로 귀환해 상인들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마병들은 이들 상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가끔 윗선에서 이들 기마병을 파견해 상인들을 보호하기도 했지만,

양측은 별다른 접촉을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경국군이 호송하지 않아야 이들 상인들이 더 안전할 수 있어서였다.

말에 타고 있는 섭령아는 살짝 피곤해 보였다. 투구 아래로 삐져나온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뒤엉킨 채 얼굴에 붙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떼어내던 섭령아가 무의식적으로 성문 쪽에 있는 상인들에게 시선을 옮겨 한 차례 훑어보았다.

한데 딱 한 번 훑었을 뿐인데 그녀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리듯 누구에게로 향했다.

섭령아가 이맛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짝 의혹이 담긴 눈으로 상인들 속에서 말 옆에 서 있는 젊은 상인을 바라보았다.

그 상인은 무명옷을 입고 있어 평범하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본 섭령아는 뭔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가 바라보는 각도에서는 젊은 상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뒷모습 때문에 섭령아는 상대방의 진짜 신분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에 그녀의 낯빛이 갑자기 변하더니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기 시작했다.

그 상인이 범한임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섭령아는 왜 이렇게 쉽게 범한임을 알아차린 걸까? 그건 범한이 그녀의 스승이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1년 동안 그녀에게 자신의 잔재주를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때 섭령아는 섭씨 가문의 대벽관을 범한에게 숨김없이 가르쳐 주었다.

손바닥을 서로 교차시키며 몸으로 싸우다 보니 서로의 습관적인 몸동작과 신체적인 특징에 무서울 정도로 익숙해져 있던 거였다.

섭령아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

그녀는 말을 앞으로 몰지도, 갑자기 채찍을 휘 내둘러 “스승님!” 하고 외치며 큰 소리로 외치지도 않았다.

섭령아가 그리 행동한 건, 범한이 변장을 하고 청주까지 왔으니 자기를 보러 온 게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사적인 일보다는 조정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온 것으로, 감찰원이 저 초원에 무언가 볼일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높은 분의 아들인 범한이 절대 초원 먼 곳까지 가는 큰 모험을 할 리 없었다.

지금의 섭령아는 예전처럼 콧대만 높은 어린 낭자가 아니라 충분히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범한의 신분을 노출시킬 리 없었다. 이에 섭령아는 그의 뒷모습을 두 눈에 가득 담은 후 조용히 말 머리를 돌려 주부(州府)로 향했다.

주부로 돌아간 후 섭령아는 쉬는 것도 잊은 채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정주 대장군부가 얼마 전 가을 정벌에 나선다는 명을 내렸더군. 그러니 우리도 행동에 들어가야 할 것이네.”

옆에서 듣고 있던 장수 하나는 순간 심장이 오싹해졌다.

‘아가씨께서 갈수록 지독해지시네. 밤새도록 급습하느라 사람도 말도 다 지쳐서 피곤하거늘.’

이에 장수가 설명에 나섰다.

“대장군부 군령의 내용은 명확했습니다. 하여 청주는 이번 가을 정벌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건 내 알아서 할 것이네.”

섭령아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했다.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장난기 많은 소녀가 아니었다. 이미 많은 경험과 식견을 쌓은 군 내 여장군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신분을 놓고 보면 맨 윗자리에 있었으므로 반드시 진지한 고려가 뒤따라야 했다.

사람들은 섭령아가 왜 청주군을 가을 정벌에 합류시키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감찰원 제사 범한이 청주로 왔다가 다시 청주에서 나가 초원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섭령아가 이와 같은 제안을 한 이유는 상단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청주 기마병으로 대다수 이민족들의 주의를 자기네 쪽으로 끌기 위해서였다.

“올해는 상인들이 유난히 많이 왔더군. 그러니 이민족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기라도 하면 어찌하는가?”

‘호족(胡族)의 귀족들은 상인들이 계속해서 물건을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미쳐 날뛸 수 있겠습니까!’

장수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그 상인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가 출병하면 오히려 그들에게 불편함만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섭령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인 채 초원으로 들어가는 세 개의 길에서 혼란을 일으키면 분명 범한의 일처리를 더 쉽게 만들어 줄 수 있으리란 생각만 했다.

지금으로서는 범한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초원으로 들어가는지 아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스승이란 사람은 혼란 속에서 최대 이익을 이끌어 내는 데 도가 텄다는 걸 말이다.

* * *

요 이삼일 새 청주 후방인 정주 대본영 내에 외부인이 부쩍 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조정 관원의 신분을 들먹이며 검사 상황을 봐야겠다고 했고, 일부는 각지에서 온 상인이었으며, 또 일부는 전투가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으니 이 틈에 금을 캐기 위해 서쪽으로 가려는 일꾼들이었다.

이들은 신분이 너무 잡다하게 섞여 있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런데 알게 모르게 여러 조로 나뉘어 있었고, 군집마다 모두 대장이 있었다.

그런데 범한 일행이 청주를 떠나 초원 왕장을 향해 나아가며 송지선령이란 사람을 찾고 있을 때였다. 여러 군집의 대장이란 자들이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대장군부로 들어왔다.

오늘 대장군부에서는 중요한 일이 있던 터라 관련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저택 밖으로 내쫓아 놓은 상태였다.

각양각색의 복색을 입고 아래쪽에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대장군 이홍성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내지었다.

“범한이 이번에는 정말로 크게 나오는군.”

정주성으로 들이닥친 이들은 모두 감찰원 관원으로 밀정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장군부에 있는 이들은 모두 각 부문의 대장이었다. 하나 그들 중 단 한 사람만 아래쪽에 있는 의자에 앉을 자격이 있었다.

그 사람은 중년이었지만 아직 흰머리는 나지 않았고, 눈빛은 피로에 절어 있었다. 3년 동안 이국 타향에서 지내며 정말이지 유난히도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게 딱 봐도 티가 날 정도였다.

이자가 이홍성을 바라보며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후 입을 열었다.

“감찰원의 생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만약 정주성 안에 있는 첩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싶으시다면 필시 갑작스럽고 맹렬한 수단을 쓰셔야 합니다.”

이홍성이 그 사람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데 자네가 직접 여기까지 오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등자월, 자네가 상경성에 있지 않고 갑자기 정주성으로 오면 조정의 북쪽 변방은 어찌 되는 건가?”

이홍성은 신분이 존귀했지만 이 중년에게는 비교적 예를 차려 말을 해주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북제에 주둔 중인 경국 밀정의 총 우두머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계년조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등자월은 지금 범한에게 가장 힘이 되어 주는 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이번에 첩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감찰원 관원을 이끌고 정주에 나타난 이는 2년 동안 범한이 북제로 파견했던 등자월이었다.

이번 작전에 어떤 문제가 있어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뜻밖에도 범한이 이 자를 정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 그들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등자월은 이 말을 속으로 생각만 할뿐 세자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다. 이번 일이 서호와 경국 사이의 전쟁뿐만 아니라 다른 강대한 세력과도 연계되어 있어서였다.

범한이 등자월을 남하시켜 놓고 상경성으로 돌려보낼 생각을 하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3년 동안 등자월이 상경성의 북제 금의위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북제에 대해 숙지하고 있는 정보가 필요해서였다.

“이번 일을 마치면 하관은 상경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등자월이 이홍성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홍성이 등자월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서 대군영에는 어찌 합류할 생각인가?”

* * *

“등자월이 정주로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났겠군.”

범한이 눈을 반쯤 감으며 혼잣말을 했다. 말에 타고 있었지만, 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염려는 전혀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범한이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약정한 시간에 따라 우리가 좀 서둘러야겠군.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먼저 정주성에서 손을 쓸 테고, 그러면 초원에 있는 저들이 분노하겠지. 그리되면 안 되는데.”

이번 일은 4개월에 걸쳐 준비한 거였다. 만약 마음속에 분노가 이리 진하게 쌓이지 않았다면 범한은 거친 수단까지는 동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이 보기에 상대방은 초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미 1년 동안 정주성 침투를 준비했을 게 뻔했다. 이미 자신은 시간적으로 한참 뒤쳐져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초원에서 상대방의 지휘관을 꼼짝 못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착오가 생길 수 있었다.

목풍아가 대인을 쓱 바라보고는 다시 앞쪽으로 늘어서 있는 기다란 상단 행렬을 쓱 바라본 후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너무 느리게 이동합니다. 더군다나 가는 길에 부락이 나오면 계속 멈춰 서고 있으니 왕장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계획에 따르면 범한의 상단 일행은 어제 상인 대열에서 떨어져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 어제 초원 갈림길에서 호가가 보낸 측근과 접선을 하고, 이후 지름길을 통해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계획을 잡아 놓았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갈림길에 마중을 나온 사람이 없던 것이다. 이에 호가가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측근이 밤중에 기회를 엿봐 숙소 천막 안으로 몰래 들어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해명했다.

초원에 있는 다른 두 개의 길에 청주군이 침범을 해왔다. 그런데 호가는 좌현왕장의 제1 고수였고, 또 하필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이곳에 와 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지원에 나서야만 했다. 그래서 경국 감찰원 일행을 마중하러 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섭령아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걸 알지 못했다. 더욱이 자신의 여제자가 스승님의 걱정을 덜어준답시고 한 일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번거로움만 초래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자는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왕장에 도착해도 그자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목풍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지적을 해주었다.

“상대방은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경국에서 상인들이 온다는 걸 분명 알고 있는데, 자신의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낼 리 없습니다.”

말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서인지 말이 가을날의 풀을 밟는데도 풀냄새가 올라오지 않았다.

“정주 쪽은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목풍아가 다시 일러주었다. 이는 목풍아가 보기에 호가가 아무리 서호 좌현왕장의 고수라고는 해도 정주성 첩자들을 일망타진하고 나면 상대방이 큰 풍랑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굳이 이런 모험을 할 필요가 있을까’란 의구심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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