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화 변경 성의 옛 사람
기마병을 이끌고 들판으로 용감하게 야간 습격을 나갔다 온 장수는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을뿐더러 갑옷과 투구의 아래로 보이는 몸도 좀 말라 보였다. 그런데도 범한은 상대방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걸 느꼈다.
특히 수려한 눈썹 아래의······ 그 두 눈에서 범한은 광채를 보았다.
그 두 눈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잡티라고는 없는 보석처럼 태양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눈썹을 찌푸리고 있어 몇 년 전에 비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리고 갑옷과 투구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타고 있는 말도 피로에 지쳐 있는 것으로 보아 어젯밤에 제대로 된 살육전을 치른 것 같았다.
그녀의 맑고 깨끗한 눈빛에 눈을 찔려서 그런지 범한은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상대방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만을 바라는데 심장에서 이상한 기분이 용솟음쳤다.
지금 이 상황은 시간이라는 게 절대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5년 전, 범한이 담주에서 경도로 왔을 때였다. 범한은 경도성 밖에서 눈썹이 수려하고 눈동자가 옥석 같은 어린 낭자를 보았다.
과거 자신을 스승님이라고 불러주었던 낭자는 그때 당시 옅은 색의 치마를 입고, 세련되고 멋진 사슴 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성 밖에서 본 여인은 먼지가 뒤덮인 갑옷을 입고 온몸에서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시간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더니, 그녀는 이름을 제외하고 많은게 변해 있었다.
범한이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고 부하의 몸을 엄폐물 삼아 자신의 몸을 숨겼다.
말을 타고 있는 섭령아는 분명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주변 거리에 있는 상인 중에 익숙한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상인들도 기병대를 이끄는 게 섭령아란 걸 발견하고는 바로 시선을 거둬들였다.
오랫동안 청주를 왕래한 상인들은 이러한 광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군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섭씨 가문의 아가씨였지만 그녀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으며, 이민족을 죽이지 않으면 절대 성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도에서 반역이 일어난 지 이미 2년이 지났다. 황제 폐하는 섭씨 가문의 충정에 고마움을 마음을 표하기 위해 특별 성지를 내렸다.
섭령아에게서 왕비라는 신분을 없애 실제로 재가를 할 수 있도록 윤허해 준 것이다.
정주군이 있는 옛 근거지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온 여인을 버릇처럼 아가씨라고 부를 뿐 그 누구도 마마라고 칭하지 않았다.
하지만 섭령아는 고집스레 자신을 왕비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러다 1년 전에는 칼까지 빼 들고 이홍성을 압박해 청주로 오고야 만 것이다.
* * *
범한은 점점 멀어져가고 또 점점 홀쭉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섭령아가 2년 동안 정주와 청주에서 생활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지금까지 왕비를 자처하는지, 그리고 왜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들판에서 칼과 검을 휘두르는 동안은 그 불쾌한 기억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초원이라는 환경과 무기를 휘두르며 사는 삶은 그녀에게는 확실히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제일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추밀원 정사의 딸이, 경국의 병마를 관장하고 있는 사람의 딸이, 뜻밖에도 이런 제일 위험한 변경지대에서 적과 정면으로 맞서 교전 중이라니. 이는 아마도 역사에서는 등장한 적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방식으로 섭령아가 거둬들인 수확물은 더는 동정 어린 눈빛과 쓸데없는 위로가 아닌 존중과 경외였다.
범한은 섭령아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았다. 분명 이홍성 녀석이 섭령아를 위험에 빠뜨릴 리 없기 때문이었다.
변방 양쪽에 있는 백성들은 섭씨 가문에 태생적인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섭령아가 이끄는 기마병은 경국의 정예병 중에서도 분명 최정예병일 것이다.
섭령아도 7등급의 실력자니 자기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이 망각을 위한 길은 섭령아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으므로 범한도 그녀의 선택을 지극히 존중해준다는 것이 관건이었다.
* * *
힘겹게 출관(出關) 문서를 발행받고 나자, 청주군 쪽에서 감찰원 사람의 귀를 잡아끌었다. 그런 후 저 들판에 있는 이민족이 얼마나 무서운지 잔뜩 겁을 주며 한바탕 훈계를 했다.
목풍아는 드디어 모든 수속을 마치게 되었기에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으로 모든 걸 잠자코 들어 주었다.
화물은 모두 청주사 관아에 가져다 두어야 했다. 그리고 성 밖 들판으로 나가기 전에 통행증을 받아가야 했다. 이는 화물 검사를 마친 후 누군가가 물건에 몰래 이상한 짓을 할까 봐 염려해 마련해 놓은 장치였다.
화물 사이에 물건을 몰래 끼워 넣는 행위는 국경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나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일부 군관이 그 행위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주 대장군부에서는 이 일에 대해 한쪽 눈을 감아주었다. 청주라는 뚝 떨어진 변경은 생활하기가 말도 못 하게 힘든 지역이었다. 이에 군관들이 여러 해 동안 이곳에 붙어 있도록 하려면 이렇게라도 외부 수익을 챙기게 해줘야 했다.
밤이 되자 범한 일행은 여럿이 잘 수 있는 기다란 침대에서 휴식을 취했다. 커다란 방 안에는 꼬리꼬리한 발 냄새가 가득했고, 하필이면 또 한밤의 추위까지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런데도 범한은 ‘특권’을 이용해 벽 쪽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비록 방 안에서 제일 추운 곳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공기가 제일 쾌청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목풍아는 범한 옆에 누우며 연신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를 해댔고, 범한은 이에 웃기만 할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감찰원 부하들 눈에 범한은 황족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가 두 번의 인생을 살면서 어떤 고통을 얼마나 겪었는지는 알지 못한 채 범한이 고생을 얼마 해보지 못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기다란 창문에서 매우 미세한 이상한 움직임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목풍아는 도무지 잠에 들 수 없었던 터라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작은 범 대인에게 알리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범한의 맑고 차분한 눈동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한밤인데도 범한의 눈동자는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늑대처럼 말이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감찰원 4처 관원과 머리를 부딪쳤다. 그는 바로 몰래 칼을 가지고 경도까지 온 그 똑똑한 사람이었다.
어둠에 싸인 한쪽 구석에서 범한이 소리를 낮추어 그 관원에게 물었다.
“이런 칼이 얼마나 더 있었는가?”
“이 한 자루뿐이었습니다.”
4처 관원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원래는 세 자루를 찾아 돌아왔습니다. 하나 제가 한 자루를 가져왔고, 다음날 가서 보니 두 자리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순간 심장이 오싹해진 범한이 물었다.
“그렇다면?”
관원은 범한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정서 대군영에서 가져간 게 아닙니다. 이 정도의 전리품은 별거 아니라 전부 창고에 쌓아두기만 할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칼 두 자루는······ 분명 누군가가 훔쳐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훔쳐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자네가 그날 저녁에 지키고 있지 않았던 건가?”
범한이 그 관원의 눈을 주시하며 물었다.
관원이 고기를 들고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했다.
“밤새도록 지켰지만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었는데······.”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만약 제 앞에서 칼을 훔쳐갈 실력이라면 분명 고수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범한은 부하의 자신만만한 판단을 믿어버렸다. 이에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얼마나 고수여야 하지?”
“9등급 정도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하가 참으로 귀엽게 대답을 했다.
몇 번 대화가 오간 후 범한은 자신이 이 이름도 모르는 4처 관원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데 자신이 왜 이 관원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범한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원을 잠시 바라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바로 생각에 빠졌다.
‘9등급이 되면 모두 천하에 이름이 나 대단한 인물이 되는데, 오지인 청주에 어떻게 9등급 고수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이 관원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살짝 내리 깔린 눈꺼풀 아래 있던 범한의 눈동자는 결국 싸늘하게 냉각되기 시작했다.
범한이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는 눈앞에 있는 이 관원을 언제든 공격해 죽일 준비를 했다.
“마지막 질문이네. 왜 이 칼에 그리 주의를 기울인 건가?”
마차 안에서 두 동강이 난 칼은 평범하게 생긴 거였다. 만약 범한이 칼을 만든 재료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았다면, 당연히 그 안에 숨은 흉악함에 대해서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범한이 숨기고 있는 살의를 아직 느끼지 못한 4천 관원이 대단히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인, 하관은······ 계년조 소속입니다.”
4처 관원이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어떤 물건을 바쳤다.
범한은 그 물건을 받아들고는 손바닥으로 천천히 매만져 보았다. 마음이 온통 텅 비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이것은 자신에게 가장 충성한 부하가 지니던 증표였다. 한데 지금 그가 어디에 가 있는지 범한은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 범한은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관원이 몸을 일으킨 후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저는 왕 대인이 직접 선발해 들어온 대원이나 지금껏 나서지 않았을 것뿐입니다. 몇 년 전 저는 계속 3대 작업장에 있었지요. 그러다 올해 초에야 청주로 자리 이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칼을 보는 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칼을 만든 소재가 병 작업장에 있는 을종(乙種) 강철이기 때문이었는데······. 과거 황실 금고에서 생산한 병기인데 어쩌면 전투 중에 유실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 이런 칼은 아직 군에 보낸 적이 없습니다. 하여 하관 긴급 사태라 사료되어 서둘러 대인께 통지한 것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호흡을 했다. 본인에게 붙은 좋은 운이 아직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나머지 두 자루를 훔쳐간 9등급 고수가 누구인지는 범한으로서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범한은 그 자가 만약 자신의 적이라면 아마 조정 내부에서 일찌감치 본인을 공격하고, 반역을 일으킬 여론 작업을 해놓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조정 내부가 안정적인 건 칼을 훔쳐간 이가 자신을 숨기고 싶어서라고 범한은 생각했다.
“왕씨가 직접 뽑은 사람이었군.”
어둠 속에서 범한은 잠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웃는 얼굴이 살짝 일그러져 있다는 건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말하는 게······ 조금 재미있다 했네.”
범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송지선령이란 이름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는가?”
그러자 그 관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지하게 보고했다.
“서호 왕장에 최근 2년 동안 외부인 몇몇이 늘어난 상태입니다. 하나 송지선령이란 자에 대해서는 하관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범한이 말을 이었다.
“이미 2처에 그 이름에 대해 조사를 해 놓으라 했네. 그러니 자네는 일단 여기에서 기다리게. 소식이 들어오면 곧바로 초원으로 사람을 보내 내게 알리게나.”
“대인께서 저 들판으로 직접 들어가시려고요?”
“칼을 훔친 사람을 찾으려 하네만.”
범한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내 관원의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참 잘했어. 이번 안건 조사를 마치면, 경도로 돌아가 나를 도와주게나.”
“발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원이 너무 기쁜 나머지 범한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소리만 낮추어 말을 이었다.
“2년 동안 왕 대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여 그분 가족들이 잘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왕계년의 행방에 대해 범한도 감찰원 관원들에게 제대로 전해들은 게 없었다. 언빙운 등을 포함한 내부 사람도 늙은 왕씨가 제사 대인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간 줄 알고 있어서 아무도 그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외지에 나가 있는 감찰원 관원들은 더더욱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4처 관원의 말에 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욕만 날렸다.
‘왕계년 이 우라질 인간 같으니! 내 곁을 떠나 놓고도 계속해서 나를 도와주고 있었잖아. 이러면 이 몸께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