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화 두 동강이 난 칼 (2)
범한이 두 손을 교차해 가슴 앞에 얹고 차분한 상태로 되돌아간 후 조용히 말했다.
“사람에게 이상이 없다면, 소금에 절인 생선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경국을 통틀어 자네의 그······ 이상이란 걸 지지해줄 사람은 없어.”
이홍성이 차차 차분함을 되찾더니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안타까워했다.
“진 원장과 범 상서를 포함한 그 누구도 자네의 생각을 지지해주지 않을 걸세.”
“나도 알고 있어요.”
범한이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세상의 절대 다수의 사람과 다르니까요. 나는 그저 사실을 가지고 황제 폐하를 설득해 보려는 것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설득을 당하실 분이 아니야!”
이홍성의 말에 아까보다 한결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누가 알겠습니까?”
범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내가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란 사실을 잊지 말아줘요. 세자도 2년 안에는 혼인을 해 아이를 낳겠지요. 하면 우리 후손에게 무얼 남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아이들이 물려받을 세상이 적어도 전란이 끊이지 않고 가는 곳곳마다 시체가 뒹구는 곳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천하통일을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인가?”
범한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아무 말 않던 세자가 겨우 입을 열고 물었다.
“천하를 공격하는 건 쉬워도 천하를 다스리는 건 어려운 일이지요.”
범한이 엉망이 된 옷을 고쳐 입은 후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과거 북벌로 북위를 멸망시켰지만, 전씨 가문이 대업을 물려받았지요. 그러자 강남과 강북, 산동, 연경의 주민들이 그들에게 복종했습니다. 하나 북위의 옛 백성들은 그들에게 쉬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어요. 우리 대(大)경국의 정예 기마병이 상경성을 공격했는데도 일반 백성이 이씨 황족의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적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고요.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 수십 년 동안 진압과 학살이 자행되었단 겁니다.”
범한이 서재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을 이었다.
“내 딸 소화와 아들 량이 나중에 보게 될 게 서호의 아름다운 경치와 동해의 풍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철제 무기가 곳곳에 꽂힌 광경이 아니라요. 그래서 바꿔 보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적어도 방식만이라도 바꿔 보자고 말이지요.”
“하나 수십 년의 철혈(鐵血)로 만세의 태평을 이룰 수도 있는 거라네.”
이홍성은 여전히 범한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천하대세를 보면 오랫동안 나뉘어 있던 건 반드시 합쳐지게 되어 있어요. 합쳐진 지 오래되면 분할되기 마련이고요. 그러니 강산을 통일하는 게 어쩌면 백성들에게 좋은 점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 내게는 그리 멀리까지 고려할 능력은 없군요.”
범한이 말을 이었다.
“이 생각을 언빙운에게도 말한 적이 있어요. 한데 내 능력으로는 아내와 내 아이들이 살아가는 지금밖에 생각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성인(聖人) 같은 건 될 생각은 없고, 그저 말린 생선이나 되지 말자고 생각한 것이지요.”
말을 마친 범한이 서재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서재 안에서 두 손으로 지도를 누르고 있던 이홍선이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한데 자네는 왜 그런 이야기를 나에게 한 건가?”
범한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친구 아닙니까. 내 생각을 친구에게까지 숨기고 싶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은 갑자기 꽃무늬 치마를 두른 친구가 생각났다. 심장 한쪽이 찌르듯이 아파 왔다.
* * *
며칠 후, 서향로 흠차인 감찰원 제사 담박공 범한 대인이 정주성으로 찾아와 황제 폐하 대신 순시에 나섰다. 그러자 서량로 총독과 대장군이 성 밖까지 나와 범한을 맞이했고, 온 성이 사흘 간 범한의 방문을 축하했다.
사흘 후, 대장군부에서 양고가 점포 간첩 사건을 심문했고, 강남 상인이 서호와 몰래 접촉해 소금과 철기를 밀무역한 걸 밝혀낸 후 모두 14명을 참했다.
큰 연회가 끝난 후 흠차가 정주성을 떠나자 온 성이 나서서 그를 배웅했다. 그런데 흠차 범한은 이미 상인으로 변장을 마치고 청주에 가는 마차에 올라타 자신만의 사건 조사 여행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날 밤 이홍성과의 흉금을 털어 놓은 대화에서도 말했듯이 범한은 천하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서호의 국면을 평정하고, 동이성을 평화롭게 굴복시키려 했다.
이는 범한이 말린 생선과도 같은 인생에서 한 걸음 벗어나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일을 해결하려 한다는 거였다. 그건 범한을 대단히 분노하게 만든 일이었고, 이홍성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차가 전답 사이에 들어선 끝도 없어 보이는 국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 앞뒤로 감찰원 부하들이 이민족들의 약탈식 공격인 타초곡 공격을 막기 위해 모든 걸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범한은 서호 소대(小隊)가 자신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랐다. 한데 안타깝게도 그날 이후 이홍성이 경력 9년 가을 공세를 앞당겨 발동해 천산 자락에서 서호의 유격대 기마병을 퇴치해 버렸고, 이에 허허벌판인 청주 후방은 잠시 안전지대로 변하게 되었다.
범한이 창밖을 향하고 있던 눈길을 거두었다. 서대영이 대대적으로 행동에 나선 건 순전히 범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해주기 위해서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홍성은 직접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행동으로 범한을 도와주고 있는 거였다.
범한이 손에 들고 있는 칼로 시선을 옮겼다. 평범해 보이는 칼이지만 좋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어 절대 서쪽 초원 이민족의 공예 수준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칼이 5개월 전에 청주성에서 전리품으로 챙긴 서호의 병기란 사실이었다.
청주성에 있던 4처 관원은 주변을 대단히 경계하며 이 칼을 경도로 가지고 와 범한에게 보여주었다. 칼에는 내력을 알 수 있는 기호 같은 건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이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왜냐하면 이런 칼은 북해 쪽 어느 은밀한 공방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범한의 눈동자를 통해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는 체내 정기를 순간 증폭시켜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이 칼을 두 동강 내버렸다.
* * *
국도를 따라 가는 내내 범한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서쪽 이민족의 피비린내 나는 급습으로 남은 흔적이 가끔씩 보기는 했다.
범한은 그와 같은 흔적과 마주칠 때마다 마차에서 내려 한동안 살펴보았다. 그런 후 2처 정보 담당 관원에게 관련 정보를 여러모로 상세하게 모으도록 했다.
이렇게 가다 서기를 반복했지만 범한은 생각보다 빠른 엿새 만에 경국에서 가장 외지에 있는 곳이자, 나이가 가장 어린 주성(州城)인 청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청주는 범한이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여기에 오기 전, 범한은 감찰원에서 모아 놓은 정보를 세세히 살펴보았다. 심지어는 1 황자에게 찾아가 서쪽 전선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물어 보기도 했다.
이에 청주는 황폐한 변성이고, 경계가 삼엄한 군영에 가까울 거라 생각했다. 한데 청주는 범한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간 곳이었다. 범한 일행이 성내로 들어서는 순간, 그들이 제일 많이 볼 수 있었던 건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사를 빼면······ 뜻밖에도 상인이었다.
범한과 같은 상인이었다. 그들은 청주 내 몇 개 없는 거리를 바쁜 모습으로 걸어 다녔고, 서둘러 관문을 나서는 문서를 교환했으며, 크게 힘쓰는 소리를 내며 물건을 옮기고, 자신이 변방까지 가져 온 물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청주성에서 나는 철혈(鐵血)의 기운을 약화시키고, 대신 금전의 냄새를 들끓게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청주성은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범한은 조정이 이곳에 주(州)를 설치한 건 상징적인 의의를 두기 위해서일 거라 생각해 청주성은 유난히 작고 고루한 곳일 거라 상상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곳에서 작은 소주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되다니. 범한은 할 말을 잃은 채 마차 끌채 위에 앉아 씁쓸하게 웃으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청주의 기형적인 번영은 범한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다. 이 자그마한 주성을 통해 서둘러 초원으로 들어가는 용감한 상인들은 대부분 강남 사람이었다.
경국 조정에서는 서쪽 이민족들과의 통상을 줄곧 엄히 금했지만, 3년 전 범한이 황제 폐하께 올린 간언으로 관련 규정이 암암리에 느슨해졌기 때문이었다.
소금, 철, 양식을 이민족에게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 건 당연한 조치였다. 하지만 보석, 향수, 독주와 같은 사치품은 이민족에게 팔아도 경국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굳이 기피할 필요가 없었다.
서호와의 무역은 경국 황실 금고에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서호 부락에서는 9할 몇 푼에 이르는 대부분의 재화를 왕공귀족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이런 사치품을 대단히 환영했다. 또 이들과 무역을 하면 초원에 첩자를 파견하기가 쉽다는 이점이 있었다.
범한은 이와 같은 생각으로 과거 황제 폐하께 간언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청주에 직접 와보지 않은 탓에 청주가 단 시간 안에, 그것도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특별히 값도 나가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물건들을 가지고 서쪽 이민족들이 지니고 있는 보석 원석, 좋은 말, 융단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이윤이 무척 크다 보니 경국 상인들에게는 큰 자극이 된 게 분명했고, 이에 상인들은 양측이 끊임없이 교전하는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초원 먼 곳까지 와 장사를 한 것이었다.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이리 많은 동종 업계 사람들에게 엄호를 받으며 갈 수 있으니 저 초원 안으로 반드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청주에 주둔 중인 변방군은 상인들에 대한 조사를 엄격히 진행했다. 이에 상인들은 군관들 품에 은표를 찔러 넣어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인들이 조사를 더 빨리 진행해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에 범한 일행은 성문 입구에서 반나절을 기다린 후에야 어렵사리 앞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하늘 꼭대기에서 가을 날 초원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다. 성안에 있는 상인과 군사들에게 더위라는 시련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밝은 태양빛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청주는 정말이지 너무 특수한 곳으로 군인과 상인이 만들어낸 기이한 주성(州城)이었다.
군인들은 초조해지자 상인들에게 거칠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상인들은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초조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오히려 웃고 있었다.
서대영의 군인들은 이들 상인을 탐욕적인 염병할 놈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왜 조정에서 이들이 청주를 통해 초원으로 들어가 불구대천의 이민족 원수 놈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동의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군인들은 문서를 발행해 주면서도 속으로는 악의를 담은 저주를 퍼부어댔다. 돈 때문에 목숨도 체면도 버린 놈들이니 초원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이민족의 화살에 맞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심사하는 관아 밖에는 검은색 관복을 입은 감찰원 관원도 몇몇 있었다. 이들은 군관 옆에 앉아 화물과 관련한 사항을 감독했다.
범한이 목풍아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목풍아가 바로 대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4처 동료들과 몰래 접선할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범한이 마차에서는 더 못 기다리겠는지 끌채 위에서 뛰어 내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떨어냈다. 그리고 하인으로 분장한 부하를 데리고 청주성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범한은 옷깃을 끌어 올린 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하늘 위에서 작열하고 있는 조그마한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속으로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땀을 흘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바로 이때 범한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청주성 문이 갑자기 열렸다. 이내 다급하지만 질서정연한 한 무리의 말발굽 소리가 성문이 있는 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하자 화물 검사를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던 상인들은 깜짝 놀랐다.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성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부대가 군영 안으로 복귀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성으로 들어가는 거라면 분명 어젯밤에 초원에서 토끼 사냥에 나선 이들이었을 것이다.
토끼 사냥은 변경 지역에서 쓰는 은어로 서호 쪽에서 말하는 타초곡(打草穀)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갑자기 공격해서 약탈하는 것과 비슷한 뜻이었다. 경국과 서호는 매년 서로 싸우고 있었고, 이처럼 소탕전과 소탕전에 맞서 반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서 서로 피맺힌 원한이 쌓이게 된 것이었다.
한데 경국군이 강한 것도 있지만 한밤중에 나가 작전을 펼치고 온 부대라 그런지 저들에게서 아직까지도 용기가 넘치는 것만 같았다.
말들이 군집해 달리는 소리가 들리자 하늘을 보고 있던 범한도 시선을 거둬들이고 성문 쪽으로 돌렸다.
하늘에 태양이 작열해서 그런지 몰라도 범한은 순간 눈이 어리어리했다. 그래서 성문 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고 있는 기마병을 보았을 때, 특히 기마병의 제일 앞쪽에 있는 장수를 보았을 때 범한은 순간 태양을 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