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화 독주로 덥히는 심장 (2)
범한은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반대한다는 듯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물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의심하셨다면, 어찌하여 세자에게 정주군을 맡기셨겠습니까?”
“말이 좋아 대장군이지. 섭씨 가문과 비교하면 내 군 통제력은 아직 멀었다네.”
이홍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물론 서대영을 내 가병으로 만들 생각은 없어. 자네도 보았다시피, 여기에서 내 측근은 고작 넷뿐이라네. 자네를 대장군부까지 잡아 온 교관은 섭씨 가문 사람이야.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긴 하나······ 그래도 경도에 있는 대신들은 믿지 못하겠더군. 최근 2년 동안 황제 폐하께서 군을 네 차례나 교대하셨지. 연경 쪽 군사, 남조국 쪽 군사, 그리고 나머지 4로 변방에서도 내가 있는 정주성까지 놀러 왔었으니······.”
이홍성이 고개를 들고 범한의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군을 이끌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알 것이네. 명장은 병사를 다루는 데 숙달되어 있어야 해. 한데 견고해야 할 병영에 병사들이 물밀 듯 쑤욱 들어왔다 쑤욱 나가는 바람에 장군은 자기 병사에 대해 모르고 있어. 그러니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하겠는가? 이번에 자네가 경도로 돌아가면 나를 도와줘야겠네. 황제 폐하께 진언 좀 해달란 말일세. 병사들을 그만 교체하시라고 말일세.”
이홍성의 말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병사 교체 덕분에 병력이 보충되어 여유가 있어진 건 확실해. 하나 막상 싸우려면,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단 말이지······. 더군다나 서쪽 이민족 열네 부족이 펼치는 공세는 날로 맹렬하고 교활해지고 있는데······.”
범한이 이홍성의 말허리를 잘랐다.
“추밀원에 관련 내용을 보냈더군요.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 보낸 비밀 상주문도 다 봤고요. 한데 황제 폐하께서 왜 2년 동안 병력을 번갈아 가며 보내고 계신 건지는 분명히 알고 있을 터이니······. 연경과 창주 일대가 교착 국면에 처해 있는 건 황제 폐하께서 이민족을 칼을 가는 숫돌로 사용하고 계셔서입니다. 장래에 치를 일을 위해 병사들을 훈련하고 계신 거라고요.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황제 폐하께 그 수를 거두어 달라 청한 것이니, 이루어질 가망성이 너무 낮은 일이었습니다.”
“천하통일의 위업 따위, 나는 신경 안 쓰네!”
이홍성이 분노했다.
“맞아! 대전이 시작되면, 나도 그날 기꺼이 황제 폐하를 위한 병졸이 되어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싸울 거네. 하나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이 너무 급박하단 말일세. 만약 서량로(西凉路)가 정말로 이민족들 때문에 못쓰게 되어버린다면, 그 염병할 천하통일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후원에는 범한과 자신뿐이라서 그런지 이홍성은 유난히 거리낌 없이 말했다.
황제 폐하의 국책(國策)을 놓고 염병할 이라고 평하다니. 하지만 이홍성은 범한의 성정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자신의 험한 말을 듣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게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시종일관 군무에 관해 내가 개입하는 걸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세자도 다 아는 일 아닙니까.”
이홍성이 한숨을 내쉬고는 술 사발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런 후 욕을 차지게 내뱉은 후 목소리를 낮추어 통탄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병사들을 연마시키는 건 말이 된단 말이지. 한데 신병 열 묶음이 왔다가 일곱 묶음이 돌아간다면, 나머지 세 묶음은 들판에서 죽은 것이니······. 만약 원래 정주에 있던 노병을 계속 쓰거나, 지금 대전 아래에 가 있는 과거 정서군 소속 사람들을 데려다 썼다면 그 세 묶음의 사람은 죽을 필요가 없었던 거네.”
“한데······.”
범한은 이홍성이 나중에 부지불식간에 실수하지 않도록 무언가를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정주군과 옛 정서군만 투입시킨다면······ 어찌 북제와 동이를 공략할 수 있겠습니까? 2년 전 경도에서 반역자들이 들고 있어났을 때, 진씨 가문 소속의 군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결과 군 내부는 급작스레 불안정해졌고, 군사력은 급전직하했지요. 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반드시 정주를 경국의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정에 다시는 진언하지도 말아요. 소용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황제 폐하의 심기만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도 세자 혼자서 이리 고생하는 걸 가만히 보고 계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범한의 입가에 살짝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나도 이리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이홍성은 그 일에 대해서는 다시는 언급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홍성을 바라보고 있던 범한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요즘 며칠에 한 번꼴로 목욕을 하는 겁니까?”
이홍성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기억이 나지 않네만. 대략 보름 전이나 한 달 전일걸?”
범한이 코를 쓱쓱 비비더니 웃으며 한마디 해주었다.
“어쩐지 몸에서 고약한 내가 난다 했습니다!”
그러자 이홍성이 범한을 향해 잠시 눈을 부라렸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주성에는 깊은 우물이 있어서 물이 마르지 않을 텐데요? 더군다나 본인은 대장군의 신분인데, 설마 목욕도 못 할 정도란 겁니까?”
“귀찮으이.”
이홍성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로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나 같은 사람이었다면, 일찌감치 저 황량한 들판과 사막에서 이민족들을 반년은 상대해봤을 것이네. 그러면 자네도 목욕을 안 하는 것에 익숙해졌겠지. 늘 창 들고 몽둥이 들고 사는 데다가 주변에 거친 놈들뿐인데 누가 그까짓 거에 신경을 쓰겠나?”
“부하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쳐도, 저택에 있는 애첩들도 그리해 줄까요?”
범한이 입술 안으로 딸려 들어가 씹을 뻔한 수염을 가다듬으며 우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이홍성이 순간 멍하니 있더니 한참 후 미소를 지었다.
“대장군부에는 애첩이 없다네. 섭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경도로 돌아간 후에는 종만 몇몇 데리고 있을 뿐이지.”
경악한 범한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자기 귀를 믿을 수 없어서였다. 정왕 세자 이홍성이, 과거 경도에서 풍류로 이름을 떨치던 자가, 거기다가 2 황자를 대신해 세상 절반의 청루 여인들을 암암리에 관리하며 밤마다 새로운 이와 한 베개를 벤 사람이 정주에서는 혼자 지낸다고? 그것도 곁에 애첩 하나 두지 않고?
범한이 무슨 생각 중인지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홍성이 집게손가락으로 술 사발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약약이가 싫어하기에, 내 끊어버렸네.”
범한은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 하다가 한참 후에야 천천히 다시 입을 뗄 수 있었다.
“그 일은 내가 미안했습니다.”
“자네가 나한테 무슨 미안한 일을 했다고 그러는가?”
이홍성이 웃으며 한소리 했다.
이에 범한은 고개만 가로로 내젓고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일로 말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일석거에서 세자를 보았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곁에 식객들이 있고 멋지고 자유로워 보였는데. 지금 이런 꼴이 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단 말입니다.”
“이 꼴도 썩 나쁘지는 않으이.”
이홍성이 대여섯 해 전부터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며 살짝 감상에 빠졌다.
“그때 일석거에는 곽보곤도 있었고, 하종위 일행도 있었지······.”
이홍성이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범한은 곽보곤이 누구인지 잊고 있었을 것이다.
“자네가 곽보곤을 한 대 갈기는 바람에 그 자가 소란을 일으켜 결국에는 집안도 망하고 사람도 죽지 않았는가.”
이홍성이 범한을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반면 하종위는 조정에서 대단히 잘 나가는 인물이 되어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으니. 세상 조화란 게 참. 줄곧 거리를 둔 나 같은 경우는 이만하면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지 뭐.”
그러자 범한은 아무런 대꾸 없이 웃기만 했다.
“야 이 악랄한 사람아. 자네가 경도로 들어오기 전에는 경도는 십여 년 동안 조용했단 말일세!”
이홍성이 계속 말했다.
“자네가 경도로 온 후 연달아 사람이 죽어나갔어. 자네도 하종위 같은 잡놈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테지. 도찰원이 경도에서 자네 감찰원의 목을 쥐고 있지 않나. 그리고 하종위는 문하중서에서 열리는 회의에도 참석하기 시작했고. 이미 자네를 위협하기 시작한 거야······.”
하종위를 향한 이홍성과 범한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두 사람 모두 과거 하종위가 범약약이란 눈처럼 고운 백조에게 군침을 흘린 원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하종위는 빨리 올라간 만큼 떨어지는 것도 빠를 것입니다. 하여 나는 아무 걱정도 않습니다.”
“자네야 당연히 그자가 무섭지 않겠지.”
이홍성이 웃기 시작했다.
“내가 경도로 돌아간 적은 없으나, 세 가지 성을 가진 종놈이란 별명은 자네가 지어줬을 것이야.”
범한이 묵인의 의미로 헤헤 하고 두어 번 웃었다.
이홍성이 범한의 코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탄식했다.
“자네 말이야······! 자네가 써먹던 그 방법들. 제일 먼저 사람의 명성부터 더럽힌 다음에 황제 폐하의 총애를 업고 뒤에서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는 거 말이네. 내 일러두는데, 하종위는 나와 달라. 둘째와도 다르고. 그는 황제 폐하께서 세운 신하이니 자네가 쉬이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확실히 범한이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과거 범한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2 황자와 이홍성을 살해당한 기녀 사건으로 압박하고 이들의 명성을 실추시킨 후, 최종적으로 2 황자를 함정에 빠뜨렸다. 그리고 그 일로 이홍성은 정왕야에 의해 정왕부에서 반년 동안 갇혀 지내게 되었다.
“맞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많은 관원들이 하종위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지요. 그런데······ 세 가지 성을 가진 종놈이라고요? 사실 그가 따랐던 주인들의 성은 항상 이씨였습니다. 더군다나 관원이란 생물이 어찌 명성을 기피하겠습니까?”
범한이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조정의 국면이 어찌 변하든 하종위가 종국에는 죽게 될 것임을 그 관원들 대부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찌 말해야 좋으려나?”
범한이 이홍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냉소를 짓고는 조금도 숨김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도찰원을 이용해 감찰원과 균형을 맞추려 하고 계십니다. 감찰원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계신 거죠. 이는 사전에 제게 해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데 하나만은 인정해야겠더라고요. 감찰원만 홀로 큰 힘을 가지면 조정과 백성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지요. 하나 감찰원이 악명을 날린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으니,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든 감히 저와 맞설 수 있는 신하를 골라 내세우셔야 했던 것이고······ 하여 하종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어떻게 변하고 발전하든 하종위 본인은 제가 그자를 놓아주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어서입니다.”
범한이 입가에 냉담함을 싣고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한데 그의 능력이 아무리 강해도, 도찰원이 감찰원과 대립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해도, 그게 뭐 어떻습니까? 도찰원의 위상이 일어서게 된 것일 뿐, 그의 위상이 높아진 건 아니거든요. 감찰원이 정말로 단순 조사원이 되는 날, 하종위 역시 이용 가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가로로 내젓고는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 지금 아들이 몇몇이 있으셔도, 황위를 이을 수 있는 건 셋째뿐입니다. 셋째가 어찌 생각할지는 떠나, 황위 계승 초창기에 내가 어찌 할지 생각해 봐야 하는데······ 한데 하종위는 나를 오랫동안 압박했으니, 어찌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자는 근본이 없는 풀[草]로, 황제 폐하께서 쥐고 있기에 살아 있는 중이에요. 하니 그의 인생은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살아 계시느냐에 달린 거지요.”
이홍성은 순간 심장이 오싹해졌다.
범한이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모두들 황제 폐하께서 옥체 강녕하시다고 알고 있지요. 또 대종사이시고요. 하지만 그분도 이제는 쉰에서 예순 정도 되신 분이란 걸 아무도 생각지 않더라고요.”
이홍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가 나보다 더 멀리 보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당연한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에 정왕야께서 세자를 그리 오랫동안 왕부에 가둬두지 않았겠지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이홍성을 바라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자네가 내 생명을 살렸어.”
이홍성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만약 2년 전에 계속 경도에 남아 있었다면, 나는 지금 죽고 없었을 거야.”
이홍성이 고개를 들고 감개무량하게 탄식을 했다.
“둘째처럼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