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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96화 (796/1,108)

796화 대장군부 (2)

“호가가 여기 있다가 도망갔다고 의심할 만한 행동은 하지들 말게나.”

범한이 앞서 부하들에게 숨어 있도록 명령을 내린 진짜 의도가 이것이었다. 감찰원이 서호에 숨겨둔 첩자는 너무나도 중요했다. 이에 범한은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더욱이 이리 많은 사람에게 들켰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병사 하나가 교관 귓가에 대고 몇 마디 하자 교관의 눈이 번뜩였다.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 게 분명했다. 그가 범한 일행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여봐라! 저 첩자 놈들을 잡아 오너라!”

범한이 병사들의 얼굴을 훑어보니 그들은 동문을 지키던 이들로 자신의 일행이 정주성으로 들어올 때 문서를 심사했던 이들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건지 알게 된 범한은 저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고는 목풍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목풍아는 자신이 세부 사항을 처리하는 데 실수해 정주 쪽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는 걸 알고는 화가 나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리고 또 대인의 노기를 사지는 않았을까 염려한 탓에 낯빛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무수히 많은 창끝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목풍아가 교관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잠시 후에 물을 한 바가지 들고 와 상대방에게 물 싸대기를 날려버릴 기세였다.

교관은 이 상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에 전혀 두려움이 없는 얼굴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이들에게는 조금 수상한 구석이 있는 게 맞는다고 확신했다.

이에 그는 명령을 내려 다른 부하들을 보내 도망간 사람들을 계속 쫓도록 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달려 문제의 상인들 앞으로 다가왔다.

범한은 정주군이 호가를 쫓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명령을 받아들인 목풍아의 눈에서 싸늘한 빛이 번뜩였다.

그가 발을 바닥에 잠시 문질렀다. 그러자 누런 모래가 세 차례 일었고, 이후 목풍아는 회색 그림자가 되어 재주넘기를 한 후 손바닥으로 말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소매 안에 있는 단도를 재빨리 꺼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교관을 제압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교관이 혼자서 문제의 상인들 앞에 나선 이유는 자신의 실력에 대단히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갑자기 일어난 이변에 그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한 손으로 칼집을 들어 목풍아의 손목을 쳤다. 말고삐를 잡고 있던 왼손은 어느새 목풍아의 울대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말 깔끔한 동작이었고, 제대로 된 섭씨 가문의 금나(擒拿: 상대방의 관절이나 경혈을 공격해 제압하는 기술) 초식이었다.

교관의 무공은 과연 고강했다. 하지만 그는 상인들이 첩자일 거란 생각에만 빠져 있어 이들의 진짜 신분이 무엇인지 아예 생각해보지를 않아 결국에는 적을 얕보고 말았다.

교관은 목풍아는 막아냈지만 그와 함께 몸을 띄운 몇 개의 검은 그림자는 막아내지 못했다. ‘촤좍촤좍’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렸을 뿐인데 몇 사람이 동시에 교관이 타고 있는 말로 다가와 어떤 이는 손을 잡아채고 어떤 이는 목을 움켜쥐고······.

6처 검수들이 폭발해 공격에 나선 것이다.

범한이 지금 시점에 공격에 나서는 걸 꺼리고 있고, 또 저 교관은 정주성의 별 볼 일 없는 군인일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이 한 차례 구슬프게 울고는 이내 자기 등 위에 사람 넷이 서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이게 어찌 말 한 마리가 견딜 수 있는 무게란 말인가.

결국 말은 앞발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주변에 먼지가 자욱이 일고, 크게 놀란 정주군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첩자에게 가볍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목풍아가 교관의 칼집을 집어 들더니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상대방의 목에 횡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사방에서 달려오고 있는 정주군을 향해 소리쳤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오너라!”

교관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첩자들의 공격을 단 한 초식도 막아내지 못한 교관이 이를 악물고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여라!”

지금 교관은 이들이 단순한 첩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정주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목숨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관과 달리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신경 쓰였다. 정말로 무력 충돌로 발전한다면, 정주군은 자신의 사람을 남겨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조정에는 어떻게 해명해야 하지?

“우리는 첩자가 아니오.”

범한이 앞으로 걸어 나와 사람들을 온화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저 상인일 뿐이라오.”

범한의 교란 작전에 교관은 추격 명령을 제때 내리지 못했다. 호가 일행이 포위망에서 안전하게 벗어났을 거란 확신이 들자 범한은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이에 부하들에게 모두 병기를 내 놓으란 의사 표시를 하고는 용감한 교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군관 나리, 부하들이 모두 거친 녀석들이라, 나리를 놀라게 해드렸군요.”

범한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거친 강호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정 군대는 쉽사리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교관이 긴장한 목을 문지르다가 자신이 아직도 이 첩자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에 대장인 교관이 범한을 매섭게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너희들이 어디까지 도망가는지 지켜보겠다!”

“도망 안 갑니다. 저희는 고작 상인일 뿐입니다. 아까는 그냥 과도하게 대응했던 것뿐이고요.”

말을 마친 범한은 더는 참아줄 수 없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가야, 호가야, 이 도련님께서 너 때문에 적잖이 애를 먹고 있구나!’

“그런가? 그렇다면 어디 소속 상인인가?”

교관이 음침하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안전 따위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만 같았다.

포위하고 있던 정주군은 저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그저 대장군부로 급히 전갈을 보내는 동시에 주변 포위나 더 견고히 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 누구도 점포 뒤쪽으로 도망간 게 누구인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영남의 웅씨 가문에서 왔소이다.”

목풍아가 입을 열었다.

“상인이라 했으니 우리와 함께 관아로 가 조사를 해보세.”

교관이 이가 부서질 듯 바드득 갈며 크게 노해 소리쳤다.

“불응하는 자는 모조리 죽이거라!”

교관이 소리를 친 건 다음과 같이 판단해서였다.

첫째, 이들 상인이 곧 포위를 뚫으려 할 수도 있다.

둘째, 자신이 이들에게 통제당하고 있어 부하들이 이들 첩자를 공격하기가 불편할 것이다.

셋째, 이유 불문하고 이들 상인을 대장군부로 데려가 심문하려는 상황이니, 이들이 절대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교관의 생각과 달리 젊고 준수한 상인은 잠시 생각을 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본디 법을 지키는 상인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명확히 해명하고 싶군요.”

교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첩자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일단 잡혀가면 그들을 맞이해주는 거라고는 끝도 없는 매질과 심문뿐인데. 설마 모르고 응하는 건가?

하지만 상대방이 바보처럼 자신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자 교관도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직접 양손을 묶거라.”

그가 범한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 * *

상인으로 변장한 범한은 그들의 처분을 고분고분 따랐다.

심지어는 황제 아버지 앞에서보다도 더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그러자 정주군 병사가 그의 양손을 실뭉치처럼 보일 정도로 꽁꽁 싸매더니 몸이 욱신거릴 정도로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한 대 내리쳤다.

그러자 범한 수하인 감찰원 관원들도 온순하게 나왔다. 이들이 고분고분 양손을 묶고 또 아무런 싸움도 일어나지 않자, 어리둥절한 쪽은 오히려 정주군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상인으로 변장한 첩자들이 단 한 초식 만에 자신들의 상사를 제압한 것 때문에 병사들은 사양 않고 이들을 포박했다. 그리고 감찰원 관원들의 손을 묶으며 몰래몰래 심하게 손찌검까지 해댔다.

범한이 교관 옆에 서서 애걸하듯 말했다.

“사람은 때리지 맙시다.”

교관은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 범한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이 첩자는 왜 이렇게 배짱이 두둑한 거며, 또 거리에서 반항한 걸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면서 자신에게 차분하게 요구까지 하느냔 말이다.

“점포 안에 잠재워 놓은 이가 있습니다. 잊지 말고 꼭 함께 데리고 가 주십시오.”

말투나 말하는 내용만 보면, 범한은 마치 정주군의 참모쯤 되는 사람 같았다.

“무슨 군말이 그리 많은 거냐?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을 테니 그리 알거라!”

교관이 범한의 두 눈을 노려보며 모질게 말했다.

범한은 화는 내지 않고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정주성으로 데리고 들어온 상인들도 대인께서 분명 잡아들였겠군요. 하면 대인, 고문은 가하지 말라 말씀 좀 해주시지요.”

그러자 교관이 비웃으며 범한을 쓱 보았다.

‘지금껏 첩자 질을 하는 놈을 수도 없이 봤다만, 그쪽처럼 유치하고 웃긴 경우는 처음이구나.’

범한이 교관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까 우리가 죽이지 않고 살려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살려준 정을 봐서 우리도 봐주는 건 어떠신지요?”

그러자 갈수록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던 교관은 가슴 한구석이 오싹해지면서 문득 ‘내가 뭐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저도 모르게 첩자들을 구타하고 있는 부하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 * *

정주성에서 큰일이 났고, 또 첩자 무리까지 체포했다.

비록 첩자라는 게 매년, 매월 있기는 했지만 오늘 양고기 점포에서 잡아들인 첩자들은 무언가 확연히 달랐다.

첫째, 이들은 중원 중심지에서 왔기 때문에 서호와 사적으로 소금 거래를 하려는 건지 더 큰 계책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둘째, 이들 첩자들은 확실히 이상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정주군 상층부에서는 첩자들에 대해 대단히 큰 흥미를 보였다. 그들은 조정과 감찰원에서 내린 판단에 줄곧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서호 왕장은 절대 군사적으로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최근 몇 년 동안 서호가 이리 대단해진 건 모두 조정 내부에서 서호와 결탁한 누군가가 저들에게 거액의 자금 지원을 해주고 있어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주군 쪽에서는 강남에서 출발해 경도를 거쳐 온 이들 상인 첩자들로 자신들의 판단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워낙 중차대한 일이고 이 첩자들에게는 고문을 가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정주성 내 군측 통수권자는 총독 측에서 손을 뻗기 전에 이 첩자들을 속히 대장군부로 옮기라 명령을 내렸다.

공(功)을 두고 다투는 일은 전선이나 후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범한 일행을 데리고 대장군부로 들어간 교관은 오늘 대장군께서 직접 심문하신다는 걸 알고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이들을 잡아들였으니, 분명 과오보다는 공을 더 크게 평가받을 거라 생각했다.

“심문하기에 아직 늦지는 않았겠지?”

상석에 앉아 있는 대장군이 소리가 나도록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았다.

“무얼 머뭇거리느냐! 우선 저놈들의 다리부터 부러뜨리고 곤장 30대를 친 후 질문을 해야겠다.”

그러자 관아에 있던 정주군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고문을 가할 준비를 했다.

대장군이 침을 ‘퉤’하고 뱉고는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

“지랄 염병할 놈들. 감히 이 대장군님 앞에서 무릎도 꿇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영남 웅씨 집안 타령인 게냐? 네놈들이 하명기 상회 소속이라 해도 본 장군은 늘 하던 대로 일단 두들겨 패고 봐야겠다.”

조정의 군 측 인사들은 하명기가 범 제사의 가신이란 걸 다들 알고 있었고,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범한의 얼굴을 팔고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대장군의 말투 속에서는 그런 허풍은 느껴지지 않았다.

범한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한데 얼굴 가득 수염을 기른 서정(西征) 대장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문득 ‘저 자식이 저렇게나 못생겼었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어 범한이 한숨을 내쉬고는 한마디 했다.

“때리고 싶어도 못 때릴 것입니다.”

그는 정서 대군영에 대장군으로 봉해진 이홍성이었다.

‘저 호로 새끼들, 이 몸께 도무지 쉴 틈을 안 주는구나!’

이홍성은 이런 생각을 하며 화가 안 풀린 듯 독한 술을 들이켜다가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무의식적으로 재판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다.

이홍성의 이목구비에 변화가 일었다. 그런데 눈동자에 담긴 야박한 기색은 오히려 과거만큼 더 짙어져 있었다.

재판대 앞에 있던 대장군 이홍성은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결국 입에 머금고 있던 술을 모두 뿜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입에서 분출된 술은 모두 옆에 있는 교관의 얼굴과 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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