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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793화 (793/1,108)

793화 정주 안의 호가(胡歌) (1)

역참의 역승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연신 닦아 내며 범한의 뒤를 따랐다. 그의 심장은 계속 방망이질을 쳐대고 있었다.

또한 지금 그는 상인의 복장을 한 채 억지로 감찰원의 손발 노릇을 하느라 표정이 갈수록 옹색하게 변해가는 중이었다.

그는 속으로 앞에 있는 이 귀한 분이 왜 자신을 데리고 성으로 들어가는 건지, 더군다나 왜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곧 범한 일행의 차례가 다가오자, 범한은 정주군 병사들이 엄격히 조사하기는 해도 그게 병사들에게 돈을 뜯어낼 기회나 빌미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상인이나 채소를 팔러 온 농민을 일부러 잡아두고 트집을 잡지 않아, 범한이 보기에도 조사는 정말로 빨리 이루어지고 있었다.

목풍아가 준비한 통관문서, 통행증, 차 매매계약서를 건넸다. 그러자 교관이 살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상한 구석을 발견한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던 범한은 그냥 옆에서 실눈을 뜨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가 놀랐거나 당황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오후에 서량로 총독 관아로 가 신분을 밝혀야 했다. 양측 모두 오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실 교관이 놀랐던 이유는 이 문서들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아무 문제가 없어서 이상하게 여긴 것이었다.

특히 날인한 인장이라든가 서명 부분에서······ 뜻밖에도 관아라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는 건 이 상인들이 대단히 훌륭한 신분을 지녔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조정의 나이 많은 관리 나리들께서 이 문서들을 직접 심의해줄 리 없었을 터였다.

그게 문제가 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다니, 범한 일행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였다.

감찰원에서 문서를 위조하려고 작정했다면 당연히 간단히 만들 수 있었다. 한데 최근 도찰원이 주시하고 있던 터라 감찰원에서는 아예 각부 관아로 찾아가 진본 문서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대놓고 진짜라는 티를 내다 보니, 그게 눈길을 끈 것이었다.

만약 왕계년이 범한 곁에서 세세하게 일들을 책임지고 처리해줬다면, 아마 이와 같은 실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교관이 목풍아를 잠시 노려보고는 무의식적으로 범한에게도 잠시 눈길을 보냈다. 저 귀티 나는 잘생긴 젊은이가 상단의 진짜 우두머리로 보여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교관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정주성 담벼락 아래를 흥미롭게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주성은 사방이 평야 또는 황량한 광야였다.

‘성벽을 쌓은 돌들은 대체 어디에서 공수해 온 걸까? 돌과 돌 사이에 채운 흙은 황토인가? 저런 것으로도 성을 만들 수 있는 거였나?’

교관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잘난 체하는 젊은이를 더는 쳐다보고 싶지 않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냥 보내주었다.

하지만 상단이 성으로 들어가자 바로 부하 하나를 불러 자그마한 목소리로 몇 마디 분부를 내렸다.

* * *

범한은 성벽을 감상하는 게 정주 병사들에게 잘난 체하는 것으로 비칠 줄 몰랐다. 그는 그저 자신의 두 눈으로 세상 모든 걸 살펴보는 게 좋을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쉬이 얻지 못할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아름다움, 역사, 존재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 것뿐이었다.

그는 상경성에서 수백 년 된 고성의 담벼락도, 또 경도성의 삼엄한 방비 능력을 지닌 담벼락도 모두 보았다. 그러다 오늘, 제국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정주에서 거대한 성을 보게 되었으니 당연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여 범한은 소문으로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성이라 일컬어지는 동이성을 아직까지 가보지 못한 걸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줄곧 죽상을 한 채 성으로 따라 들어간 역승은 담박공이 왜 자기 같은 사람을 데려 왔는지 차츰 알게 되었다.

작은 공작 어르신은 거리 구경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정주성의 거리는 별별 형태의 것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어 복잡했다. 그래서 현지인의 길 안내가 없으면 알려지지 않은 곳은 찾아가기가 힘들었다.

한데 높으신 공작 어르신께서 처음 온 것 같은 외진 곳에서 쉼 없이 온갖 곳을 걸어 다니는 것도 모자라 물건마다 관심을 보이는 통에 역승은 골치가 좀 아팠다.

특히나 범한은 서지하(西池河) 쪽 호족(胡族) 부락에서 가져 온 그들의 그릇을 꽤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약 반나절을 걸은 끝에 범한 일행은 정주 교역방(交易坊) 일대를 모두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로써 상단이 보여야 할 적극적인 자세를 완벽하게 드러내 보였다.

흙으로 만든 담 아래에서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웅장한 정주성의 성루를 바라보며 소리를 죽여 물었다.

“소식이 왔는가?”

목풍아가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자 간의 약정에 따라 이미 보내놓았습니다. 한데 우리가 이틀 일찍 온지라, 상대방이 아직 성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범한이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어떻게든 이틀 일찍 와야 하는데. 내가 경도를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을 리는 없을 걸세. 홍성은 분명 내가 온 걸 알 거야. 그러니 녀석을 붙잡고 있는 게 있다면 분명 말술일 걸세. 다시 말해, 대영(大營)과 총독 관아에 서호의 첩자가 없다고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단 말일세.”

목풍아가 대오 뒤에서 불안과 긴장에 휩싸인 채로 있는 역승을 쓱 바라보았다.

“지형에 대해 잘 알았다면 저자를 데려와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잠시 후에 어찌 처리할까요?”

범한이 웃었다.

“사람을 죽여 입막음할 정도로 큰일이 아니지 않은가. 단순히 상대방의 안전만 보장하면 되기에 이리 조심하는 거야. 그러니 저 역승에 관한 일은 내일 미인이나 보내 주는 걸로 해결하게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범한은 살짝 유감스러웠다. 황제 폐하께서 감찰원이 군 측 깊은 곳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걸 엄히 금해서였다.

그래서 각 로를 관할하는 4처에서든, 아니면 정보를 수집하는 2처에서든, 정주에서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물론 감찰원은 정주에 첩자를 심어 두었다. 하지만 정주성 내부는 지극히 안전하다는 생각에 범한은 첩자들을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대장군부와 총독관아의 심기가 틀어지면 손해를 보는 쪽은 감찰원의 하급 관원이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그늘져 서늘한 곳에 마차를 세웠다. 그리고 태양이 이동할 때만을 느긋하고 또 조용하게 기다렸다. 점심 식사는 구운 떡과 찬물로 때웠다. 범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매번 행동에 나설 때마다 감찰원 부하들의 마음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려 노력했다.

한편 역승은 작은 공작 어르신께서 힘겹게 구운 떡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은근슬쩍 경탄을 금치 못했다.

* * *

마차 뒤에 있는 흙 담벼락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질 무렵, 범한의 부하 하나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손에는 길거리에서 산 호족 부락의 특산품이 들려져 있는 걸로 보아, 걸어오는 동안 유난히 조심한 모양이었다. 그가 마차 뒤로 가 물건들을 던져 넣고는 소리를 낮추어 범한에게 몇 마디 건넸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목풍아를 잠시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쪽이 우리보다 더 몸이 닳았군. 가서 만나보세.”

목풍아가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분명 음모는 아닌 것 같았다.

정주성은 위대한 경국에 속한 천하가 아니던가. 그러니 누가 감히 감찰원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목풍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역승을 불러 세웠다.

마차 없이 이동하는 이는 범한, 목풍아 그리고 역승 이 셋뿐이었다. 이 세 사람은 흙 담벼락을 지나 혼잡한 시가로 들어선 후 이곳을 처음 온, 내지 상인처럼 이것저것 신기해하는 모습으로 길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셋은 드디어 양고기를 파는 점포에 도착했다.

점포에 아무런 간판이 없자 범한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기랄. 진짜 찾기 힘든 데로군.”

범한이 역승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 꽤 괜찮은 자로군! 이런 데도 다 알고 말이지.”

순간 긴장이 풀려 온몸이 나른해진 역승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작은 공작 어르신께서 토닥여준 어깨니 보름은 씻지 말아야겠군······. 아니지. 나는 한 달에 겨우 한 번 씻잖아. 그러니 보름은 여자를 멀리해야겠어. 맞아 여자를 멀리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하면 내가 좀 손해 보는 기분이기는 한데······.’

역승이 혼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동안 목풍아는 이미 양고기를 파는 점포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몸을 옆으로 돌려 토방 안쪽 문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코를 막고 안으로 들어가 약속한 돗자리 위에 앉았다.

점포 토방 안에는 모두 네 개의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자리 앞에는 손님에게 고기와 술을 대접할 수 있는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돗자리 사이에는 얇은 천으로 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하지만 소리까지 막지는 못하는 그냥 구색 맞추기 용으로 달린 것뿐이었다.

범한이 가장 안쪽으로 앉았다. 역승은 바깥에 있는 의자에 궁둥이를 반만 걸치고 앉아 이 존귀한 인물께서 대체 어떤 자를 만나려 하시기에 이 보잘것없는 점포까지 온 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러던 중 작은 공작 어르신이 술을 건네주자 그는 황송히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손에 쥔 양고기를 뜯어가며 독한 술을 두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범한의 눈빛은 오히려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가 옆에 쳐진 얇은 가림막을 힐끔 보았다. 목풍아에게 눈짓을 보낸 것이었다.

그러자 목풍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술 사발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림막을 열고 다른 돗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가림막이 들렸을 때였다. 시력이 날카로운 범한은 약 사오십 대로 보이는 남자를 발견했다. 얼굴이 까만 것으로 보아 분명 서호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범한의 판단이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때 태양은 하늘 높은 곳으로 솟아올라 점점 더 밝아왔지만, 토방 안은 아직 그윽하기만 했다. 아직은 술을 마실 시간이 아니다 보니 점포 안은 범한 일행과 신비한 서호 사람만 있어 분위기가 유난히 차분했다.

목풍아가 오랑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참 후 천 가림막이 다시 들렸다. 그리고 목풍아가 범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했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범한이 몸을 반 정도 돌린 후 차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민족을 주시했다. 상대방이 술 사발을 안정적으로 들고 있고, 동공에도 아무 변화가 없다는 걸 확인한 범한이 천천히 입을 뗐다.

“좌현왕장(左賢王帳: 좌현왕의 천막을 이름. 왕장은 왕의 천막을 이르며, 왕궁과 비슷한 의미다)의 어엿한 제1 고수가 어찌하여 변장을 하고 몰래 예까지 온 것입니까?”

그러자 서호 사람이 술 사발을 내려놓고는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젊은이의 진짜 신분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순간 심장을 파고드는 ‘찌릿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야말로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냉담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서호 사람이 미간을 살짝 움찔했다. 경국 감찰원에서 온 관원이 예상치도 못하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대담함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맞소. 내가 바로 호가(胡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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