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2화 세월과 소송 (2)
경도에서 서쪽 지역으로 가려면, 푸르른 창산을 돌아 수많은 강을 건너고, 또 다시 십여 일을 가야 했다. 그러면 군대가 개간해 놓은 수백 리에 이르는 황무지가 나왔다. 이곳은 바로 경국 7대 로(路) 중 하나인 서량로(西涼路)로, 경국의 최빈곤 지역이자 대단히 특이한 경치를 지닌 곳이었다.
서량로 지역은 대부분 수백 년 동안 중원 정권과 서쪽 이민족이 반복적으로 쟁탈전을 벌인 곳이었다. 또한 북위 세력이 약해진 후에는 경국과 경국의 전신인 여러 제후국들이 암암리에 세력을 일으킨 곳이기도 했다.
이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대륙 중심지로 아직 나아가지 못했을 때, 서쪽 이민족은 천년 동안 쌓인 피의 채무를 이행하고 자신들의 땅을 돌려받으려 했었다.
결국 여러 해 동안 싸우고 수많은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경국이 이 지역을 손에 넣고 확실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경국은 여기에 여러 개의 성과 해자를 만들고 수많은 백성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새로 조성된 지역이다 보니, 논밭을 제외하고는 발달된 상업도 없었고, 돈이 되는 물건이 생산되지도 않았다. 이에 이주시킨 백성들이 도주하는 일이 빈번했지만 최근 몇 년 전부터는 그러한 현상이 조금 줄어드는 추세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소수의 사람이 경작하는 전답,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 그러다 시선 끝에 갑자기 울뚝 솟아 있는 흙 언덕,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황량한 광야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 지역은 그냥 보기에도 황량해 보였다.
이곳에서는 대륙의 그 어떤 곳보다 늦게 석양이 떴다. 석양은 피처럼 붉었고, 황량한 대지 위를, 그리고 그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성을 비추었다.
성은 돌과 흙을 쌓아 만든 것이었지만 웅장했고, 대지 한 자락에 우뚝 솟아 있어 경국의 강성한 국력과 군사력을 빛내고 또한 서쪽 초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이곳이 바로 서쪽 변방 지역의 군사 요충지 정주성(定州城)이었다.
경도에서 정주까지 깔린 국도(國道: 여기에서는 나라에서 깔은 정식의 넓은 도로란 뜻)는 유지보수가 상태가 대단히 좋았고, 말 여덟 필이 병렬로 가도 될 정도로 넓었다.
이 국도를 깔기 위해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재정을 쏟아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경국이 서부 지역의 지속적인 안정을 확보하고, 이 넓은 땅에 대한 통제력을 견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결국에는 꽤나 수지가 맞는 결정이었다.
일렬의 마차대열이 국도를 통해 정주성으로 질주했다. 해가 지기 전에 정주성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다만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뛰는 말은 죽을 노릇이었다.
특히 이런 평야 지대에서는 정주성이 바로 눈앞에 있는 듯 보여도 실은 저 멀리 땅끝에 있었다. 이에 말이 달리고 또 달렸지만 도무지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주성에서 약 20리 떨어진 곳에 역참이 있었다. 이곳은 군에서 사용하는 역참이었지만 정주군이 아닌 공부(工部)가 관할하는 우편로를 위한 역참이라 보기에도 낡고 오래된 상태였다.
이곳의 장정 일고여덟 명이 석양을 맞으며 하품을 했다. 이들은 이미 저녁밥을 먹고 잠시 후 도박이나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질 무렵, 장정들의 얼굴에서 갑자기 괴상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후원으로 가더니,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입을 가리고 웃기 시작했다.
‘안에 있는 놈이 안달이 나 있긴 했나 보구먼!’
* * *
후원의 돌로 된 방 안, 역참의 유일한 정식 관원 역승(驛丞)이 눈처럼 새하얀 여인의 허벅다리를 끌어안고 양손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주무르며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방안 곳곳에는 음탕한 기운이 가득했다.
정주는 외지고 멀리 떨어져 있어 오락거리로 삼을 만한 게 별로 없었고 해도 너무 늦게 떨어졌다.
이에 매일 해 떨어질 때가 되면, 역승은 서둘러 자신만의 유일한 오락거리에 빠져들었다.
역승의 몸 아래 있는 여인은 정주성에서 데려온 창기(娼妓)였다. 성 밖까지 나와 준 창기다 보니 외모는 대단할 것 없이 평범했지만, 그래도 그는 이 창기의 아양 떠는 모습과 부드러운 살결이 좋았다.
손에 느껴지는 매끄러운 느낌에 역승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는 오롯이 자기 몸 아래에 있는 솜사탕 같은 여인네만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여인의 눈빛은 정주성의 우물물보다 더 달콤하고 끈적했다. 그런데도 한 달에 은전 석 냥이라니. 역승 입장에서는 본전은 뽑은 거였다.
그가 한창 재미를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갑자기 방문을 밀고 들어오자 역승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뜸 욕부터 날렸다.
“엿듣든, 보든 다 상관없는데, 이런 씨부럴, 조심 못 하겠냐! 갑자기 들어오면 이 어르신께서 복상사하실 수도 있는데······.”
그의 말에 아래에 깔려 있는 창기도 키득키득 웃었다. 그녀도 누가 보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순간 역승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자기가 말을 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뒤에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아서였다.
이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웬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서둘러 온돌로 된 잠자리에서 펄쩍 뛰어내린 후 얼른 바지를 여몄다. 그리고 침상 위에 있는 창기의 뽀얀 하반신을 서둘러 검정 이불로 덮어주었다.
역승은 원래 거침없이 욕을 날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낯선 이의 행색을 보아하니 꽤 귀티가 났다. 어쩌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관원일 수도 있으니 그는 두려움에 입술이 마르기 시작했다.
역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이요?”
* * *
범한이 역참 안에 있는 유일한 팔걸이의자에 앉아 앞에 꿇어 앉아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구겼다.
“일어나라고 했으면, 얼른 일어나야 할 것 아닌가.”
범한은 이번에 황명을 받아 정주군을 위문을 하러 왔다. 한데 말이 군대 위문이지, 실은 어서방에서 완전히 다른 내용의 비밀 지령을 받고 온 거였다.
요 2년 동안 서쪽 호인은 흥분제와 진정제를 번갈아 먹기라도 한 듯 예전처럼 봄이 오면 물러났다가 가을이 오면 되돌아오는 낭만주의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단히 조직적으로 그리고 대단히 교활하게 변화된 전술을 사용해 정주 쪽을 침략하고 있었다.
섭씨 가문이 정주군 군무를 함께 맡아보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섭중은 추밀원에서 천하 군마를 관리해야 해 직접 이곳에 주둔하며 지킬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서호의 공세가 너무 맹렬하고 음험해 공격이 들어온 첫해에 정주는 긴급 위기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한데 다행히 마지막에 황제 페하가 직접 나서서 각로의 군을 교대로 지원하도록 해 그나마 국면은 안정될 수 있었다.
황제와 범한은 일찌감치 그 이면에 있는 문제점을 발견한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자료는 아직 받지 못한 터라 둘 다 서호 내부에 어떤 변화가 발생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서호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경국에게는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이 직접 정주까지 오게 되었다. 반드시 정주 장수들에게 직접적으로 보고를 받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만 했다.
범한은 황제 폐하가 왜 5로의 군을 서로에서 교대로 복무하도록 한 건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랑캐의 칼로 경국의 검을 더 날카롭게 벼리려는 의도였다.
다시 말해, 훗날 경국이 천하 통일 전쟁을 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해야 하는데 서쪽 이민족의 공격은 경국의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었다.
범한 일행이 오늘 안에 정주성으로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하여 이들은 이 낡은 역참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막상 맞으러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일고여덟 명의 사내는 아이처럼 벽에 귀를 대고 무언가를 엿듣고나 있으니 범한으로서는 순간 호기심이 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범한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고 의도치 않게 살아 움직이는 춘화를 보게 된 것이다.
역승과 사내들은 바닥에 꿇어앉아 연신 고개를 조아려댔다.
한편 범한을 따라온 관원들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이미 다 본 셈 치고 각자 알아서 쉴 준비나 했다.
범한이 역승을 향해 웃으며 한소리 했다.
“염병할.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재미나 보고 있다니. 그 짓거리 할 배짱은 있는 사람이 뭘 그리 무서워하는 건지.”
역승은 이제 곧 죽음 목숨이라는 생각에 울상이 되었다.
‘눈앞에 계신 어르신이 ‘천자 제2호’ 귀인인 감찰원 제사 대인이시라니.’
그것도 자신은 만나 뵐 수도 없는 저 높은 곳에 계신 분이었다.
범한이 궁금해서 물었다.
“뭘 그리 무서워하는가?”
“대인께서는 악인을 원수처럼 싫어하시고, 또 관리들의 부패를 끔찍이도 싫어하신다기에······.”
역승은 겁에 질려 곧 울 것만 같은 표정에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은 자세로 천하 백성들이 말하는 범한의 인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내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거늘, 어찌하여 천하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은 속세의 음식은 먹지 않는 성인 아니면 마귀인 걸까?’
* * *
날이 아직 어두컴컴하니 밝아오기 전인데, 경도에서 온 사람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이를 닦았다.
범한은 이번에 감찰원 내부 사람들만 데리고 왔다.
그리고 지금 계년조 일을 주관하고 있는 목풍아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2처와 6처 사람들이었다.
이들 감찰원 관원들은 절반은 군인처럼 생활하는 직책상의 특성 때문에 차분하고 과묵하게 행동했다.
이에 아침을 깨운 이들이 낸 소리라고는 물소리, 문을 여는 소리뿐, 대화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역참에서 정주성까지의 거리는 근 20리 정도였다. 이에 여덟 필의 말이 널따란 국도 위를 날듯이 내달리면 오래 걸리지 않을뿐더러, 오늘은 말이 힘들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인지 범한 일행이 정주성 동문 아래에 도달했을 무렵, 태양은 아직 높이 떠오르기 전이었고, 따스한 햇살이 비추고 있는데도 공기에는 여전히 찬기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성문 앞에는 이미 채소를 팔기 위해 온 농부와 중원 중심지에서 온 상인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경도는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된 정도였지만, 이곳 변방 지역의 장수들은 이미 갑옷에 솜을 넣어 입고 있었다.
범한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잠시 주변을 살펴보고는 목풍아에게 통관 문서를 준비하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이번 정주행에서 범한은 처음부터 자신이 흠차임이 드러나도록 의장을 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일행 십여 명은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감찰원 일행은 이번에 강남 상인으로 변장을 한 터라 손에 호부와 황실 금고 전운사에서 발행한 차(茶) 매매계약서와 통행증을 들고 있었다.
위장을 한 이유는 조정에서 정주성 내부 상황을 의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범한이 사적으로 누군가와 만나야 해서였다.
그 사람의 안전을 제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조정과 관련한 경로가 아닌 사적 만남을 택한 것이다.
서쪽 이민족이 갑자기 안목이 트였으니 황제와 범한은 호인 안에 능력자가 나타난 건 아닐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주성의 대장군부와 총독 관아에도 서호 첩자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동문을 지키고 있던 군사는 조사를 대단히 꼼꼼하게 하고 있었다. 줄을 서지 않고 대열 한 쪽에서 냉정하게 주시하고 있던 범한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섭씨 가문이 서쪽 변방을 지킨 지 십 년. 그런데도 그들은 조금의 태만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쩐지 황제 폐하께서 그들을 좋아하신다 했더니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