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9화 모두의 불청객인 겨울 (2)
상문이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장 대인께서 좋아하시니 다행입니다.”
그 말을 범한이 무슨 생각이 든 듯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순간 자신으로 인해서 이미 많은 사람의 인생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자신 때문에 자신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상문의 누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범한이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이런 사람들을 그냥 두고 무책임하게 떠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 * *
하지만 누군가는 홀연히 떠나고 말았다. 작은 저택에 선 범한의 얼굴은 잔뜩 어두웠고,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저택 안의 우물과 돌 탁자와 휘장과 넝쿨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왕계년 가족이 살았던 저택이었다. 이 작은 저택은 서성 민간 속에 숨어 있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범한은 과거 이곳에서 자주 식사를 하고 왕계년의 수줍음이 많은 딸을 놀려주고 넝쿨에 달린 호박을 가지고 놀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득한 추억 속 과거가 되어 있었다.
왕계년 가족들은 소리소문없이 이사를 가 버렸다. 심지어 범한이 왕계년 가족의 안전을 보호해 주기 위해 심어두었던 감찰원 밀정에게까지 이 사실을 숨겼다.
범한은 왕계년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진평평의 입을 통해서 왕계년이 살아 있다는 희소식을 들은 동시에 왕계년이 떠났다는 소식도 알게 되었다.
그는 진평평이 왕계년을 보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왕계년이 대동산에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경국 법률과 감찰원 조례에 따라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심복인 그가 죽는 걸 가만히 보지 않을 테니 이 일로 그와 폐하 사이에 마찰이 생기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진평평은 왕계년이 범한의 비밀을 아주 많이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왕계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하가 떠났다는 사실에 범한은 굉장히 상심했다. 지금 그의 손에는 왕계년이 진평평을 통해서 전달한 편지가 들려 있었다.
편지에는 짧은 말만 적혀 있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자신은 폐하를 돌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산에서 내려와서 죽을죄를 지었지만, 범한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서 무척이나 안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읽은 범한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계년이 애초에 죽음을 무릅쓰고 산에서 내려와 그를 찾았던 이유는 그가 황제가 죽었다고 확신해서 황권 싸움에 뛰어들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손에 들고 있는 편지가 구겼다. 이제 더는 함께 농담하고 웃고 떠들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그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소문무는 말동무로 삼기에는 농담 수준이 왕계년보다 한참 못 미쳤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왕계년의 작은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아주 오래전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 그는 경도에 온 지 얼마 안 된 소년이라서 규범이나 이런 걸 잘 알지 못했다. 그냥 무턱대고 경묘로 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또 바보처럼 막무가내로 감찰원에 찾아갔다가 생기 없는 얼굴에 하얀 치아를 가진 관리를 만났었다.
바로 그 하급 관리는 왕계년이었다.
당시 왕계년은 서류 작업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며 감찰원 안에서 조용히 퇴직하는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범한을 만난 뒤 그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고 다시 젊은 시절 천하를 누비며 도둑질을 했을 때의 긴장감과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된 뒤로 범한은 왕계년을 누구보다도 믿었고, 왕계년도 그런 범한에게 충성을 다했다.
범한은 왕계년의 인생을 바꾸었고, 자신의 비밀을 모두 알려 주었다. 상자, 열쇠, 진심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왕계년은 그의 부하를 넘어 친구였으며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이런 역할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이었기에 왕계년은 어쩔 수 없이 범한의 미래와 안전을 위해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 버리는 걸 선택했다. 범한이 얼굴이 약간 창백하게 질려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가, 나 혼자 이곳, 사람이 머물 수 없는 곳에 버려두고 떠나는구나.’
그가 작은 저택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자신의 비밀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기에 왕계년이 최근 몇 년 동안 받았을 압박과 괴로움을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이 꼭 나쁜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왕계년에게는 위험 가득했던 이전의 삶보다 아무 압력 없이 한가롭게 사는 지금의 삶이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범한은 왕계년 가족들의 앞날이 평안하기를 누구보다도 바랐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저택을 나오다가 고개를 돌려 묵묵히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는 목풍아를 바라보았다. 목풍아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왜 죽상을 하고 있는 거지? 네 아내가 둘째를 낳은 마당에 왕씨 딸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가?”
왕계년이 떠났으니 범한의 곁을 지킬 심복이 필요했지만 가장 적합한 인물인 등자월은 북제 상경에서 힘겹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소문무는 황실 금고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범한은 할 수 없이 목철의 조카인 목풍아를 곁에 있게 했다.
한 달 동안 같이 다니면서 보니 목풍아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왕계년만큼 재미있지는 못해서······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비로소 범한은 왕계년 대인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보조자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능력은 평소 웃음 아래 숨어 있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 * *
2개월 동안 미루어졌던 하사품이 마침내 내려졌다.
새로 등용된 관리들이 반란으로 비어버린 자리를 보충했을 뿐만 아니라 반란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각 로의 사람들은 황궁에서 내려진 교지를 받게 되었다.
섭중은 승진하고 후한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도에서 추밀원 정사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경도 수비사 통령 직무는 소금화(蕭金華)에게 갔는데, 바로 마지막에 황태자의 반란군을 성안에서 막은 동화문 통령이었다.
그리고 13성문사 통령이었던 장덕청은 포로로 잡힌 뒤 능지처참을 당했고, 3족이 죽임을 당했다. 이건 반란군 전체 처벌 중에서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지만 범한도 이 문제를 가지고 황제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장덕청의 사촌 형제들이 이번 반란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걸 알았지만 황제 폐하가 장덕청의 행동을 알고 얼마나 진노했는지도 잘 알았기에 차마 막을 수 없었다.
폐하는 장덕청을 신뢰했지만 그는 반란을 저질렀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폐하의 마음이 드리운 분노와 실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1 황자는 여전히 금군을 맡았고 작위는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미 화친왕이 봉해졌으니 더는 내려질 작위가 없기도 했다. 궁전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서 시위 방면의 사무를 맡기 시작했는데, 미래에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해서 황제가 속으로 계획을 품고 있을 거라고 범한은 짐작했다.
그리고 범한에게 상을 내리는 일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황궁에서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폐하가 범한을 군왕에 봉하려고 했지만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가 기겁을 하며 막았다는 것이었다.
성이 다른 사람을 왕에 봉하는 건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으니 대신들이 폐하의 뜻에 기겁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비록 범한이 폐하의 사생아인 걸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범씨 성을 가지고 있는 범한이 갑자기 왕야가 된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경국을 비웃을 것이었다.
범한 역시 놀라 팔짝 뛰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왕야나 담박왕이 된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황제의 뜻은 막혀서 실현되지 못했고, 그는 기개를 가진 서 대학사와 호 대학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1등급 담박공은 황족이 아닌 자제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였다. 그리고 범한은 상으로 얼마큼의 밭이나 금전이 내려지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이미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 말이다. 황제도 다른 걸 상으로 주어서는 범한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역사상 최초로 황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봉하겠다는 황당한 제의를 한 것이었다.
왕으로 봉할 수 없게 되자 황궁에서 예상치 못한 교지가 내려졌다. 바로 범한의 딸인 범소화에게 범숙녕(範淑寧)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군주로 봉한다는 내용이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황당한 일을 다 합쳐도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은 없을 터였다.
대신의 딸을 군주로 봉한다니? 정실부인이 낳은 것도 아닌 딸에게 억지로 임완아와 같은 작위를 내려준 것이다.
너무나도 황당무계한 일이라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누구도 황제 폐하에게 이처럼 고집스럽고 무모한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범한에게 가장 황당한 일은 황제가 자신의 딸에게 숙녕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을 내려줬다는 거였다.
정말이니 황당무계한 교지였지만, 범한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성의가 느껴져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래서 다음날 입궁을 한 그는 황제에게 감사 인사하면서 겸사겸사 숙녕이란 이름을······ 바꿀 수 있는지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황제 폐하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짐이 교주 허무재의 관직을 박탈하고 고향에 돌아가도록 했다. 이미 천주로 돌아가 있을 거야.”
그 말을 들은 범한은 너무 놀라서 입안이 바짝 말라버렸다. 혓바닥이 입천장에 달라붙어서 도무지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 일을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던 범한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서재 안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며 폐하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뭘 알고 있는 건지 추측했다.
범한은 허무재의 정체가 어디에서인가 드러냈을 거라 생각했다. 대동산에서 담주까지 허무재는 교주 수군과 맞서면서까지 그가 상륙할 수 있게 도왔으니 분명 그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교주 수군은 바다 위 대동산 앞에서 포위되었으니 허무재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알리기는 불가능했다.
모든 일을 철저하게 계산하는 폐하는 신하들의 진심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허무재는 조정이 아니라 범한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건을 살펴보던 폐하가 허무재의 행적을 의심해 이력을 조사했다면 그가 과거 혁혁한 명성을 떨쳤던 천주 수군 출신이라는 걸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상황이 바뀌었다면 허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범한은 최근 몇 년 동안 황제에게 변치 않는 충성을 보이었고, 이번 대동산 사건을 포함해서 무수히 많은 시험을 거친 끝에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번에 허무재가 죽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은 황제가 이런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 내려준 조치였다.
마음이 서늘해진 범한은 다시 그 안에 담긴 뜻을 음미하다가 곤혹스러운 감정에 빠졌다. 다음 날 그는 입궁해 죄를 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은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폐하가 정말 이전보다 훨씬 너그러워진 건 확실했다. 만약 황태자와 2 황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절대 가볍게 넘어가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폐하가 범한에게 너그럽게 대할수록 범한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더구나 이전에 황궁에서 범한에게 패도의 정기에 대한 상황에 관해 묻고는 폭발할 위험이 없다는 걸 알자 침묵하던 황제의 모습 때문에 범한은 그의 진짜 의도가 뭔지 더더욱 짐작할 수 없었다.